밀라노 두오모 성당 옥외광고 전광판을 장식한 삼성 디자인 전시 '공존의 미래'. 삼성전자 제공국내 가전 업계가 다시 '디자인 철학'을 전면으로 내걸고 나섰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중국 가전 업계의 맹추격 속 디자인 철학 재정립을 통해 자사 프리미엄 브랜드 가치를 공고히 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디자인 중심지'서 디자인 철학 담은 '초프리미엄' 빌트인 가전 공개
유로쿠치나 전시장에 비스포크 AI와 유럽 빌트인 신제품이 전시되어 있는 전경. 삼성전자 제공18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지난 16일부터 21일(현지시간)까지 진행되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 2024'에 나란히 참가하며 유럽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밀라노 디자인위크는 매년 전 세계 180개국에서 37만명 이상이 참가하는 세계 최대 디자인·가구 박람회다. 가구 박람회에서 시작했지만 현재는 조명과 욕실, 사무용품, 가전제품 등으로 분야를 늘리면서 CES처럼 디자인 분야의 최대 행사로 자리잡았다. 올해는 격년으로 열리는 주방 가전·가구 전시회 '유로쿠치나'가 있어 주방 관련 트렌드와 기술까지 한 곳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전시회에서 양사는 자사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가전으로 꾸민 전시관과 자사 철학을 담은 장외 전시관을 꾸며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삼성전자는 전용면적 964㎡ 규모의 부스를 마련하고, 비스포크 AI 가전 라인업과 유럽 시장을 겨냥한 빌트인 패키지를 선보였다. 비스포크 AI 가전이 스마트싱스 안에서 연결되며 사용자의 일상을 편리하게 해주는 시나리오가 중점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32형 와이드 스크린과 AI 비전 인식 기술이 탑재된 비스포크 AI 패밀리허브 냉장고와 7형 터치스크린 기반의 'AI 홈'이 적용된 '애니플레이스 인덕션'으로 주방 공간이 연결되고, 세탁건조기 비스포크 AI 콤보로 집안 어디서든 다른 가전을 손쉽게 제어할 수 있는 식이다. 주방 가전뿐 아니라 세탁기, 공기청정기, 로봇청소기 등 리빙 가전도 함께 전시해 세탁실부터 거실까지의 연결 시나리오도 제안했다.
삼성전자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미래를 위한 사람과 기술의 이상적 균형을 주제로 한 미디어 아트 전시인 '공존의 미래'(Newfound Equilibrium)도 선보였다. 삼성전자는 미디어 아트와 오브제로 '본질, 혁신, 조화' 등 자사의 새로운 3가지 디자인 철학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앞서 2005년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은 밀라노에서 "애니콜을 제외하고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라며 "차세대 핵심 전략은 바로 디자인"이라며 '디자인 선언'에 나섰는데 이후 20년 만에 같은 장소에서 새로운 디자인 철학이 공개된 것이다.
전시장을 찾은 삼성전자 노태문 디자인경영센터장(사장)은 "사용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기술 혁신과 동반됐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혁신 경험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디자인을 통해 전 세계의 고객들이 삼성 제품에서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경험을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LG전자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전시존. LG전자 제공LG전자도 전용 483㎡ 규모의 전시관을 꾸리고 AI 기능을 강화한 '초프리미엄'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라인업을 공개했다. 이번에 처음 선보인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프리존 인덕션은 AI가 조리 기구의 온도를 감지, 음식의 끓는 정도를 파악하고 예측해 물, 수프, 소스 등이 넘치는 것을 막아 주는 '끓음 알람' 기능을 탑재했다. 오븐 내부 AI 카메라가 재료를 식별해 130개 이상의 다양한 요리법을 추천하고 최적화된 설정을 제안하는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오븐도 유럽 시장에 첫 선을 보였다.
LG전자는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쇼룸'에서 '정밀함의 미학'을 주제로 쇼케이스를 열고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디자인 거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중 한명으로 꼽히는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와 손잡고 선보인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언더카운터 모듈형 냉장고(서랍형 빌트인 냉장고)를 공개했다. 이번 쇼케이스에서는 우르퀴올라의 신작 2점이 전면 배치됐다.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쇼룸에서 차로 10분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네덜란드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모오이의 쇼룸에서도 LG전자와의 협업이 공개되기도 했다.
中 가전업계 맹추격, 예술 담은 초프리미엄으로 돌파
LG전자가 세계적인 가구 디자이너이자 건축가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와 협업한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언더카운터 모듈형 냉장고를 사용하는 모습. LG전자 제공삼성전자와 LG전자의 '디자인 사랑'은 글로벌 경기 침체와 중국 가전 업체의 맹추격에 대해 프리미엄 전략으로 대응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곳은 중국 기업 하이얼이었다. 하이얼의 지난해 실적은 3분기까지만 공개됐는데 하이얼은 지난해 3분기까지 누적 매출(1986억 5730만 위안·36조 7098억 원)을 기록하며 LG전자(H&A사업 부문)를 압도했다.
물론 LG전자나 삼성전자처럼 하이얼이 단일 브랜드로 이런 매출을 달성한 것은 아니다. 하이얼은 지난 몇 년 간 △일본 산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가전 부문 △뉴질랜드 피셔&파이클 △이탈리아 캔디 등 프리미엄 가전 업체를 사들였고, 독립경영을 보장하며 경쟁력을 유지했다. 하이얼의 성과는 이들 브랜드들의 성과지만 하이얼이 이들 브랜드의 이미지와 노하우를 흡수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에 국내외 유력 예술가들과 협업을 통해 제품 자체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물론 브랜드 자체에 품격을 높이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 노태문 사장은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앞둔 지난 4일 자사 뉴스룸에 올린 기고문을 통해 "본질에 충실하고 혁신에 도전하며, 삶과 조화를 이루는 제품을 디자인하겠다는 삼성의 새로운 다짐을 통해 전 세계 수많은 고객이 어떤 삼성 제품을 선택하더라도 삶에서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경험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의 이런 변화에 환영을 표하면서도 국내 가전 브랜드가 명품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급변하는 기업 생태에서 예술적인 사유 방식과 미학적인 안목을 접목해 기업 경영에서 창조적 혁신을 선도하는 '예술경영' 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이화여대 경영학과 김효근 교수는 "지금은 예술가들이 창의적인 작품을 탄생시켜 관객을 감동하게 해 팬이 되게 하고, 그 팬덤이 확대 재생산 되어서 장기적인 기업 매출 구조에 영향을 끼쳐야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시대가 됐는데 우리나라 대기업은 소비자들이 미학적인 감동을 하는 이유, 또 어떻게 그런 감동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기업들이 디자인에 철학을 담아서 심미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칭찬 받을만 하지만 그 브랜드들이 명품 반열에 오르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지적했다.
이어 "중국을 비롯한 후발 주자들의 추격 속도가 워낙 빠르고 기술력과 디자인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감이 있다"며 "빠른 시일 안에 회사의 철학과 가치, 소명을 찾아 그것을 어떻게 제품에 반영 시킬지, 그래서 소비자들에게 어떤 현존감을 전달할 수 있을 지를 제품 개발 프로세스의 맨 앞 단에 장착 시키는 노력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