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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리뷰]틀에서 벗어나 주체로 거듭난 눈부신 이름 '정순'



영화

    [노컷 리뷰]틀에서 벗어나 주체로 거듭난 눈부신 이름 '정순'

    핵심요약

    영화 '정순'(감독 정지혜)

    영화 '정순' 스틸컷.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영화 '정순' 스틸컷.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스포일러 주의
     
    아줌마, 이모 그리고 엄마. 사회는 중년 여성을 그의 이름을 대신해 아줌마 내지 이모, 엄마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말들은 어느새 여성들을 '중년 여성'이라는 틀 안에 가두게 됐다. 그런 중년 여성은 피해자가 되어서도 틀 안에 갇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정순'은 이 모든 편견과 틀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주체로 눈부시게 거듭난다.
     
    '정순'(감독 정지혜)은 무너진 일상에서도 결코 '나다움'을 잃지 않고 곧은 걸음으로 나아가려 하는 정순(김금순)의 빛나는 내일을 응원하는 드라마로,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은 작품이다. '정순'으로 데뷔를 알린 정지혜 감독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겪게 된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섬세하면서도 배려 깊게 그리고 따뜻하게 그려냈다.
     
    영화 초반에 그려지는 정순이라는 인물은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중년 여성'에 대한 선입견을 반영한다. 또 한편으로는 공장의 젊은 여성 노동자에게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화장을 진하게 하냐"고 말하는 등 그 나이대 여성으로서 일반적인 관점을 가진 인물, 즉 전형적인 중년 여성을 담아낸 인물로 나온다. 집 안 거실에 앉아 있는 정순의 모습 역시 전형적이고 일반적인 풍경 안에 놓인 중년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순이 일하는 식품공장은 세대 차이, 권위와 권력, 남성성 등이 모두 휘몰아치며 사회의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이 축약된 곳이다. 여기서 여성, 중년, 낮은 지위의 노동자 등 모든 면에서 약자인 정순은 '아줌마' 내지 '이모'로 불린다.
     
    그러나 정순이 단순히 정형화된 인물도, 틀 안에만 갇혀 있으려 하는 인물이 아님을 슬쩍 드러내는 공간도 공장이다. 노동자로서도 여성으로서도 약자의 위치에 놓인 공간에서 정순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권위에 저항한다.
     
    영화 '정순' 스틸컷.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영화 '정순' 스틸컷.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이처럼 복합적인 공장에서 만난 영수(조현우)를 통해 정순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설렘은 영수가 도윤(김최용준)에게 남성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과정에서 공포로 바뀌게 된다.
     
    영화에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 장면 자체를 수위 높게 묘사한다든지 하지 않고, 적정선을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거듭 엿보인다.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 건 정순이 춤추며 노래 부르는 최초의 단 한 장면뿐이고, 이후는 보이지 않고 소리를 통해 가해자들이 영상을 소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후 정순의 딸 유진(윤금선아)이 경찰서에 가서 엄마의 피해 사실을 신고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직접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등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겪는 2차 가해와 불합리한 일들이 보인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대하는 태도나 법은 가야 할 길이 멀고, 특히나 피해자가 정순과 같이 중년 여성인 경우에는 성범죄 피해자임에도 또 다른 편견과 불합리한 일들이 더해진다.
     
    영화 '정순' 스틸컷.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영화 '정순' 스틸컷.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그러나 정순의 피해 사실을 접한 가족과 지인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미디어와 현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실수와 2차 가해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독이 얼마나 섬세한지 드러낸다. 보통 피해자를 향해 피해자의 잘못이 아님을 알면서도 "왜 그랬어?"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영화 속 딸인 유진도, 회사 동년배 동료나 젊은 세대 동료도 그저 정순을 보듬고 위로하며 연대할 뿐이다.
     
    피해자가 디지털 성범죄를 겪은 후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피해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하고, 자신을 여전히 '성적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수사기관도, 미디어도 '피해자 탓'을 하며 2차 가해를 할 때가 있는데 정순의 가족과 동료는 정순과 연대한다. 우리 현실이 피해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가 그들의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정순'이 기존 미디어와 콘텐츠에서 보기 어려웠던 모습을 하나 더 포착해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바로 정순이 사건 이후 처음으로 공장에 간 후 고개 숙이지 않고, 또 영상 속 노래와 춤을 재현하는 장면이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공장에 들어선 정순을 보고 고개 숙이는 건 가해자들이다.
     
    공장이라는 공간에서 자신을 가장 억압했고, 또 피해자로 만들었던 가해자들 앞에 선 정순은 영상 속 춤과 노래를 재현하면서 감정을 터트린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저항하려는 분노이자 더 이상 '피해자'로만 남아 가해자들 앞에서 고개 숙이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노래의 의미 역시 정순 스스로에게 이 모든 일이 지나가고 다시 새롭게 설 수 있다는 희망이자 위로이자 다짐으로 변화한다.
     
    영화 '정순' 스틸컷.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영화 '정순' 스틸컷.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또한 정순의 변화는 여성 노숙자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데서도 보인다. 처음 정순은 영수와의 관계를 들킬까 봐 노심초사하며 늘 얼굴을 가린 채 눈치를 보며 빠져나온다. 그런 정순은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여성 노숙자를 보고 처음에는 놀라고, 걱정스럽지만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그러나 이후 정순은 목격자이기도 한 노숙자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외투를 건넨다.
     
    범죄 피해를 겪으며 누군가의 악의적이면서도 비난 어린 시선에 놓였던 정순은 여성 노숙자에게 온기를 나눠줌으로써 냉정한 사회 속에서도 온기를 잃지 않았음을 그리고 편견에 갇혔던 그가 편견으로 타인을 바라보지 않으려 함을 보여준다. 또한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갖는 편견에 얼마나 저항하고자 했는지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틀 안에서 빠져나와 당당하게 주체로 서는 정순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나오는 자동차와 조수석이다. 늘 조수석에 앉아 조수석 창가를 통해 보이던 정순은 영화 마지막에서 스스로 운전대를 잡고 백미러를 통해 웃는 얼굴을 보인다. 여성성이라는 사회가 만든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피해자성을 넘어 객체에서 주체로 거듭나는 정순의 모습은 영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영화 '정순' 스틸컷.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영화 '정순' 스틸컷.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영화를 보며 정순의 감정을 따라가며 조금 더 몰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사건이 본격적으로 발생하면서부터 정순의 불안한 감정에 따라 함께 흔들리는 카메라가 있었다. 스크린 속 정순은 흔들리지 않고 있지만, 카메라는 마치 정순의 내면이 불안과 배신 등 여러 감정으로 요동치고 있음을 대신 보여준다. 또한 흔들리는 속에서도 정순은 굳건하게 나아갈 것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런 정순의 행보는 세상 모든 피해자와 모든 중년 여성에 보내는 위로와 응원 그 자체다.
     
    감독은 첫 장편 데뷔작 '정순'을 통해 우리 사회가 가진 중년 여성, 중년 여성 피해자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피해자를 보여주기 위해 피해자성을 강조하거나 피해를 재현하기 위해 2차 가해를 저지르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만큼 배려 깊고 섬세하게 다가가며 우리가 현실에서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끌어안지 못했는지 이야기한다.
     
    배우 김금순은 스크린 안에서 온전히 '정순'으로만 존재하며 관객들을 정순의 내면을 이끈다. 감독의 배려 깊은 시나리오의 글들을 스크린 안에서 섬세하게 표현해 내며 살아 숨 쉬게 만든 김금순의 연기에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많은 감독이 김금순 안에 숨어 있는, 아직 보지 못한 수많은 매력과 빛나는 가능성을 끌어내 주길 바란다.
     
    104분, 4월 17일 개봉, 15세 관람가.

    영화 '정순' 메인 포스터.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영화 '정순' 메인 포스터.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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