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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지원한 쿠바 독립운동가들을 아시나요?" [한판승부]

정치 일반

    "윤봉길 지원한 쿠바 독립운동가들을 아시나요?" [한판승부]

    CBS 박재홍의 한판승부

    ■ 방송 :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FM 98.1 (18:00~19:30)
    ■ 진행 : 박재홍 아나운서
    ■ 패널 : 진중권 작가, 박성태 사람과사회연구소 연구실장
    ■ 대담 : 김재기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쿠바 사탕수수 농장서 일하며 독립운동 지원한 역사 기억해야
    - 쿠바 독립 유공자 후손들, 조상들 서훈 사실조차 몰라
    - 쿠바 독립운동가 현재 43명 서훈, 100여 분 추가 서훈 남아
    - 쿠바 수교 이후 역사 유적 발굴 및 정부 지원 가속화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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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BS에 있습니다.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박재홍>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2부 문을 열었습니다. 3. 1절 휴일 생방송으로 함께하고 계시는데요. 최근 우리 정부가 쿠바와 수교 합의를 발표했습니다. 지난 2월이었죠. 이에 따라 강정애 보훈부 장관이 수교를 계기로 또 '쿠바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겠다', 최근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3. 1절을 맞아서 쿠바 일대에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역사를 또 발굴해 오셨던 분이 계세요. 직접 모시고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김재기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 김재기> 안녕하세요.

    ◇ 박재홍> 진 교수님, 박 실장님 인사 나누시죠.

    ◆ 박성태> 안녕하세요.

    ◆ 진중권> 안녕하세요.

    ◇ 박재홍> 작년에 우리 교수님이 이끄시는 연구팀에서 일제강점기에 쿠바, 멕시코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한 성과를 내시기도 했는데, 어떻게 또 그 지역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셨습니까?

    ◆ 김재기> 제가 대학에서 이제 디아스포라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죠. 정치학에서는 디아스포라 정치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데요. 멕시코와 쿠바는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주로 미주, 미국, 중국, 중앙아시아, 러시아. 한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연구를 가졌는데, 2015년도에 제가 연구년, 안식년으로 1년 동안 뉴욕대학에 있었거든요. 그때가 딱 오바마 정권 때인데 쿠바하고 수교가 되는 그런 시기였어요. 그래서 여러 교류들이 있었고. 그래서 이제 뉴욕 가게 된 계기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유대인 정치학에 대한 그런 부분들. 또 그 즈음에 버지니아 사람들이 동해병기법을 통과시켰어요, 한인들 정치력으로. 그래서 일본의 단독 표기를 동해 표기와 일본해를 동시에 쓰는 그런 정치력 신장에 대한 것들. 또 하나는 이제 뒤에 이야기하겠습니다마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북미 지역에서 어느 정도 지지했었나. 그런 자료를 찾기 위해서 갔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과정에서 이제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에 실제 이런 기록이 나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그런 보도 자료가 나왔더라고요. 그걸 찾는 과정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당시에 한인들 단체로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그런 기사들이 한 100회 나오더라고요.

    ◇ 박재홍> 1929년에 3. 1운동 이후에 가장 큰 규모로 항일운동이 있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 김재기> 그래서 그전에 쿠바에서도 지지운동하고 특별헌금을 냈다는 자료가 나와요. 그래서 제가 깜짝 놀랐죠. 쿠바에서 한인들이 이렇게 했었나? 그래서 현지를 한번 가서 그 후손들이 어떻게 살고 또 이후에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특히 저는 광주시민으로서 90여 년 전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런 특별 후원금을 낸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도 감사 표시를 하기 위해서 방문하게 됐었죠. 그래서 당시에 보훈처 가서 보훈처 공훈전자사료실에 가니까 열세 분이 서훈 추서됐다고 나오더라고요.

    ◇ 박재홍> 쿠바에서 독립운동했던.

    ◆ 김재기> 그래서 그럼 그 후손들을 만나봐야 되겠다 했는데 공적 조서에 광주학생독립운동 때 지지를 했다는 그런 공적 조서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 후손들을 만나기 위해서 쿠바를 갔는데, 16년도에 두 번 갔어요. 그때는 미국과 쿠바가 수교했지만 직항이 없었어요. 그래서 캐나다 피어슨공항에서 갔었고. 마탄자스로 갔었고, 두 번 다. 가서 보니까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후손들이. 자기 할아버지 이름. 대한제국 때 떠났던 이름도 모르고 또 서훈 사실도 모르고. 왜 저한테 '거짓말하냐', 그렇게 물어봐요.

    ◇ 박재홍> 우리 할아버지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였다?

    ◆ 김재기> 서훈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이건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표가 됐는데 서훈이라는 것이 전수가 되어야 의미가 있거든요. 발표만 해버리면 서류상 있는 거잖아요. 이거 정부가 바빠서 그런지 수교가 안 돼서 그런지 못하고 있어서 '나라가 안 하니까 나라도 하자.'

    ◇ 박재홍> '나라가 안 하니까 나라도 하자' 해서 쿠바에 가셨어요.

    ◆ 김재기> 계기가 돼서 올해로 9년째 됐네요. 16년에 처음 시작했던 프로젝트고요.

    ◇ 박재홍> 그렇군요.

    ◆ 김재기> 그게 계기가 됐습니다.

    ◇ 박재홍> 사실 일반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미국과 러시아, 중국에서는 독립운동가 영화화도 많이 됐고 해서 우리 디아스포라라고 해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많이 있는 걸 알고 있는데, 이게 또 쿠바에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어떻게 쿠바까지 갔으며 거기서 또 어떤 식의 독립운동을 하셨을까. 이런 궁금증이 있으실 것 같아요.

    ◆ 김재기> 한인 디아스포라 역사가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잖아요. 고려인들, 그때 러시아로. 한 160주년이 되는 해거든요, 올해가. 1864년을 보통 기점으로 삼고 있는데. 그런 분들에 대한 것하고. 또 하나는 이제 북미로의 한인 디아스포라. 이 부분은 아마 하와이도 여러분 잘 아실 거예요, 사탕수수 농장에. 1903년부터 1905년까지 80회에 걸쳐서 8000여 분이 가셨거든요. 그중에서 견디지 못하고 오신 분들이 한 1000여 분, 2000여 분 계시고 본토로 한 1000분 가시고. 하와이 본토로는 한 4000분. 이것 때문에 이승만 박사가 이제 하와이에서 재정적인 게 되기 때문에 가시거든요. 그래서 그분들은 그냥 자유계약이었어요. 그런데 미주로 이주가 이제 1905년도에 딱 한 번 멕시코로 가거든요. 그게 1905년도에 5월 4일에 도착해요, 그분들이. 그래서 1033분이 딱 배 한 대로 가는데, 이게 멕시코 출신의 그런 마이어라는 그런 사업자, 브로커하고 일본 회사하고 결탁해서 이분들이 황성신문에 광고를 냈죠. 그래서 그때 하와이로 가면서 많은 좋은 소문이 있었고 그래서 멕시코로 가도 황금도 많고 좋은 환경에서 먹을 것도 많고. 그때 재해도 있었고 우리 상당히 어려웠었거든요. 러일 전쟁 이런 시기라서. 그래서 1033명을 모아서 이제 갔죠. 가서 보니까 이게 황당한 과장 광고였던 것이죠. 그래서 이제 그분들이 깜짝 놀랐죠.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메리다 같은 지역이 덥거든요.

    ◇ 박재홍> 멕시코 메리다?

    ◆ 김재기> 그쪽으로 많이 가셨는데, 22개 농장으로 분배됐는데 주로 유카타 반도, 마야 이런 지역이죠. 우리는 사계절이 뚜렷한데, 그쪽은 거의 이 시기에도 한 36도, 38도 되거든요. 여름에는 더 덥고. 그 뙤약볕 속에서 일을 하면서 '속았다', 이제. 그렇지만 4년… 그때는 4년 계약이었어요. 그래서 그 노예 같은 삶을 살고 돌아오려고 하니까 대한제국이, 나라가 사라져버렸죠. 그래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래서 이제 자료를 보니까 그분들이 유대인하고 비교해서 크리스찬들이 많아서 그런 기도회를 하면 유대인들이 외국 땅으로 노예로 자꾸만 열악한. 영화도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래서 다시 그들이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그게 우리 영화도 많잖아요. 이렇게 되어 있는데 한인들도 태평양을 홍해에 비유하고 또 멕시코 에네캔 농장을 외국 땅의 노예 같은. 그래서 그곳에서 빨리 벗어나서 해방된 곳으로 가고 싶다는 그런 기도문이 기록이 나와 있거든요. 정말 어려운 열악한.

    ◇ 박재홍> 그래서 멕시코에 한 1033명이 갔다가 너무 열악해서 그중 일부가 쿠바로 갑니다. 288명 정도가 쿠바 사탕수수 농장으로 갔다.

    ◆ 김재기> 그렇죠. 1921년도인데요. 에네캔이 주로, 항해시대니까 밧줄을 만드는 재료거든요. 튼튼하기 때문에. 이게 또 폭락해버요.

    ◇ 박재홍> 가격이.

    ◆ 김재기> 그러니까 일자리가 사라지죠. 그런데 설탕가격이 국제시장에서 또 올라가요. 폭등해요. 그러니까 쿠바가 이제 수확해서 사탕수수 세계에서 많이 생산하는 곳인데. 그것에 일자리가 있다. 그래서 쿠바드림을 가지고.

    ◇ 박재홍> 쿠바드림.

    ◆ 김재기> 그렇죠. 처음에 멕시코 드림으로 갔다가 쿠바 드림으로. 그래서 이제 이분들이 1921년도에 3월 25일에 도착해요, 프로그레스항으로 가서 라스투나스의 마나티항에 도착하거든요. 그분들이 드디어 1921년에 이제 지구촌 끝 쿠바에 한인들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죠.

    ◇ 박재홍> 거기서 어떻게 이제 항일운동, 독립운동이 조직돼서. 또 이게 자금도 모아서 전달하는 그런 활동이 있을 수 있었는가. 그 부분도 많이 궁금해 하실 것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 조직됐던 겁니까?

    ◆ 김재기> 멕시코에서 16년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게. 그래서 우리가 1909년도에, 우리 국권을 상실하기 전이죠,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만들어져요. 안창호 선생이라거나 이승만, 박용만 이런 분들이. 그런데 이 조직이 멕시코에 한인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죠. 아주 어렵다는 것을. 그러면서 이제 미주에 있었던 대한인국민회를 확장을 시켜요. 그래서 멕시코까지 포함을 시키죠. 그래서 멕시코 메리다라거나 탐피코라거나… 이런 곳에 만드는데, 이게 상당히 중요해요. 그래서 대한인국민회라는. 그때 당시에는 국권 상실했을 때는 임시정부도 있기 전이잖아요. 1919년에 임시정부 만들어졌는데.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게 임시정부 역할을 했다. 실제 한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 박재홍> 대한국민회.

    ◆ 김재기> 대한인국민회. 뭐 북미총회라고도 합니다마는 줄여서 '국민회'라고 하고 Korean National Association. 샌프란시스코에도 만들어지고. 이게 또 30년 중반에는 LA로 옮겨요. LA에 회관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만들어지고. 동시에 대한여자애국단이라는 조직이 만들어져요. 이것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들어지는데, 3. 1운동 후에 만들어지거든요. 이런 경험들이 멕시코에서 만들어지죠. 그들 중 일부가 그런 경험을 가지고 쿠바에 가서 쿠바에서도 쿠바지방회를 만들어요. 대한여자애국단은 좀 늦게 38년도에 만들어지는데요. 그들이 독립운동자금 내는 게 엄청 많아요. 그래서 임시정부에 내는 인구세, 주민세라 그러죠. 그걸 다 내서 샌프란시스코로 보내면 그쪽에서 이제 상해로 보낸다든지. 인구 조사를 다 했었죠, 샌서스를, 그 때문데. 그 자료들도 있고. 그리고 광복비, 외교비 또 의무금, 의용금. 또 어떤 경우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 순국을 추모하는 그런 비용도 오니까 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이순신 장군. 조선에 있는 이순신 장국의 유족을 보호하는 그런 돈을 내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런 조직 속에서 이제 결속을 다지면서 남성은 남성대로 또 여성은 여성대로. 대한인국민회 활동은 아이들까지 다 모였더라고요.

    ◇ 박재홍> 아니, 그 이역만리에서 사탕수수 노동하면서 어렵게 돈을 벌었는데, 그 와중에 또 고국을 위한 그런 돈을
    십시일반 모았던 그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거네요.

    ◆ 김재기> 그렇죠. 한 5달러, 6달러인데 인구수에 1달러 냈고 또 외교비 각각 명목 내버리면 생활비 하기도 어려웠죠, 그게. 그런 공적으로 이제 서훈 추서가 됐는데 쿠바 가서 보니까 보훈처가 발표만 해 놓고.

    ◇ 박재홍> 관리를 안 했구나. 후손들이 전혀 모르는군요?

    ◆ 김재기> 몰라요.

    ◆ 진중권> 서훈을 전달해 주신 건가요?

    ◆ 김재기> 전수는 저는 국가기관 공무원입니다마는 보훈처가 하는 일이고요. 저는 후손, 누구누구 서훈자의 후손이 쿠바 어디에 살고 있다, 그 정보를 보훈처에 주는 거죠.

    ◆ 진중권> 그러면 나중에 보훈처에서 그 서훈을 전달하나요?

    ◆ 김재기> 현지에서 조사해서 요즘은 유전자 DNA 검사까지 해서. 국가 세금이 나가기 때문에 진짜인가 아닌가 이런 것까지 쿠바가 좀 이혼율이 높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런 문제도 있습니다, 이게.

    ◆ 박성태> 그러면 서훈을 줄 때는 과거에, 앞서 말한 LA도 있었고 샌프란시스코도 있었던 대한인국민회. 거기의 자료들을 토대로 '여기에 헌금을 냈던 분들이 일부는 쿠바에 가셔서도 계속 냈구나'라는 근거를 가지고 서훈을 만들었는데. 그거 말고는 가서 현지에 가서 그분들이 어떤 활동했는지 조사하고 그런 거 없이 일단 서훈을.

    ◆ 김재기> 없었죠. 일단은 수교가 안 됐고. 쿠바가 섬인데 섬 속에 섬이었죠, 고려 한인들이. 그래서 일단은 지금 120년 되어 가는데요, 우리 언어를 몰라요. 한글을. 그래서 그 2세대,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는 분들도, 2세대 분들도 많이 돌아가셨고요. 3세대들도 팔십, 칠십 이 정도 되시니까. 그래서 이게 이제 제가 가서 만나도 할아버지 이름을 모르는 거예요, 조선을 떠날 때. 보훈부에는 조선을 떠날 때 이름으로 서훈 추서가 됐어요. 그런데  100여 년 전에 스페인 이름으로 바꿔버린 거죠. 한 분이 2개의 이름이 있는 거예요. 쿠바에 한 분, 보훈부에 한 분. 이게 매치가 안 되기 때문에 이걸 보훈부에서는 사람들이 3년마다 한 번씩 바뀌다 보니까 이게 좀 전문성이 있지 않는 한 교차 분석해서 밝혀내야 되는데 어려움들이 있죠, 그게.

    ◇ 박재홍> 그렇군요.

    ◆ 진중권> 혹시 직접 만나보거나 발굴해 보신 분 중에서 기억에 특히 남는 분이 있으신지.

    ◆ 김재기> 많죠.

    ◆ 진중권> 예를 들어서.

    ◆ 김재기> 이게 8년째 만난 분들. 아마 거의 1000명 거의 만났던 것 같아요, 행사 때부터 해가지고. 쭉 9시간 동안 타고 마나티까지 가서 다큐멘터리도 찍었었고. 그게 이제 시간이 한정돼 있습니다마는 세 분입니다, 세 분. 그게 정말 이걸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승준이라는 그분의 공적이 있어서 주소를 가지고 이제 집을 찾기 위해서 갔거든요.
    (마탄사스=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쿠바 마탄사스에 있는 옛 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 지방회관 터(가운데 붉은 건물 자리). 목조 건물은 허물어지고, 현재는 새 건물이 지어졌다. 1층은 카페다. 2024.2.19 연합뉴스(마탄사스=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쿠바 마탄사스에 있는 옛 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 지방회관 터(가운데 붉은 건물 자리). 목조 건물은 허물어지고, 현재는 새 건물이 지어졌다. 1층은 카페다. 2024.2.19 연합뉴스◇ 박재홍> 이승준 씨라는 독립운동가 활동했던.

    ◆ 김재기> 그분이 서훈 추서가 됐는데, 전수가 안 됐어요. 그래서 광주학생독립운동 공적도 있고 그런데 한-쿠바 영화제를 하는데 그 행사에 제가 갔어요. 그래서 저녁에 쿠바인들 딱 모여서 파티도 하는데 옆에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무슨 일로 왔냐고, 옆에 있는 한 10대 여학생이 물어봐요. 그래서 가지고 간 주소. 쿠바는 집도 배급제이기 때문에 거의 안 옮기더라고요. 60년대에 작성했던 주소를 가지고 '이 집을 내가 찾으러 가야 된다.' 그런데 '이 집 우리 집인데', 그러는 거예요. 옆에 앉아 있던.

    ◇ 박재홍> 인연이네요, 운명이네요, 운명.

    ◆ 김재기> 1000명이 되는 쿠바인 중에서 하필 그 자리에 앉았는데. 그래서 이거 하늘의 뜻인가, 나를 보낸 게. 그렇게 해서 그분 가족이 한 다섯 분이 서훈 추서됐는데 전수가 됐어요. 추가로 이제 추서와 동시에 전수가 되고. 그리고 또 돌아올 때 2016년 5월에 갔는데요. 마탄자스에서 왔거든요, 아바나의 호세마르티 공항이 아니고 캐나다 쪽은. 그래서 가는 길에 마탄자스에 대한인국민회가 거기에 있었거든요. 가장 규모가 컸었죠. 그래서 거기 가서 대한인국민회 회관이 어디 있는가, 독립 유적지 때문에. 그래서 보훈처 자료 가지고 찾으러 간다니까 문을 두드렸어요, 택시에 내려서 혼자서. 한 50대 쿠바 사람이 나오더니 탁 저를 보고 'Korean National Association. 대한인국민회 카사가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막 들어가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 모시고 와요. 보니까 얼굴이 한국인 얼굴이에요. 부모가 다 이제.

    ◇ 박재홍> 쿠바 현지인과 결혼을 하셨으니까?

    ◆ 김재기> 아니, 3세는 현지인. 아버지가 쿠바. 2세는 두 분 다 한국인. 그래서 우리말 전혀 모르세요. 막 손짓, 발짓 하면서 서류를 가지고 와서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페르난도 호'라는 이걸 찍어왔죠. 그래서 '호' 씨가 희성이잖아요. 그래서 'JO'라 이게 조 씨인지 호 씨인지 모르겠는데 그분들이 '호'라고 발음하더라고요. 그래서 열세 분 중에 보니까 호 씨가 딱 한 분 계세요. 그래서 그분 생년월일하고 그분이 가지고 간 서류하고 크로스 해 보니까 맞는 거예요. 그래서 전혀 모르는 집인데 물어보러 갔는데 호 선생…

    ◆ 진중권> 로또를 사셔야겠네.

    ◆ 김재기> 그래서 또 옆에 비가 많이 오잖아요, 쿠바가. 그래서 찾아다니다 비가 와서 천막에 갔는데 어떤 할머니가 나오는 거예요. 그분도 백발인데 우리 얼굴이에요. 우리말 좀 하시더라고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봤어요. 그분은 3세. 할아버지는 김세원이고 아버지는 김연경이고. '내 이름은 안동 김가, 김월성이다.' 그분은 또박또박 말씀하세요. 그래서 명단 보니까 김세원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간단히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운명의 만남이랄까요.

    ◇ 박재홍> 교수님이 보훈부에 들어가셔야 될 것 같은데요.

    ◆ 김재기> 저는 대학에서 할 일이 많이 있기 때문에.

    ◆ 박성태> 쿠바도 섬이지만 땅덩이가 꽤 크잖아요.

    ◆ 김재기> 그렇죠.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그래서 2016년 5월, 제가 잊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인가.

    ◆ 박성태> 약 100년 전에 288명이 이주를 한 건데, 멕시코에서. 그분들이 쿠바에서도 특정 지역으로 따지면 어느 구랄지 서울에. 경기도 어떤 시, 이런 데 모여 사시나요?

    ◆ 김재기> 당시에는 이제.

    ◆ 박성태> 지금 너무 우연히 여러 분들을 만나서.

    ◆ 김재기> 지금 많이 흩어졌죠.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한인국민회라는 조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마탄자스 주의 까르레라스라는 항구도시도 있습니다마는 마탄자스의 엘보로라는 지역이 한인촌이에요. 그 기록도 다 한인촌으로 나오고 거기서 집단생활 하셨죠. 몇 번 갔습니다마는 지금은 다 사라졌죠. 민성국어학교라는 한글학교, 우리의 글과 역사를 가르치는. 그리고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그런 학생들도 있었고 이제. 그곳도 사라졌고요. 당시에는 그렇지만 김월선 할머니는 민성국어학교를 다니셨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말 좀 알고 기억들도 있고. 나를 그 집에 보내서…

    ◇ 박재홍> 교수님이 아주 역사적인 실질적인 활동을 수교 되기 전부터 활동을 해 오셨던 건데. 마침 2월 중순에 수교가 됐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국가보훈부 장관이 지금 적극적으로, 강정애 장관이죠. 적극적으로 하겠다. 유물도 발굴하겠다, 이렇게 한 건데.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이 전개되는 겁니까? 교수님과도 좀 일을 하겠네요?

    ◆ 김재기> 글쎄요. 보훈부가 이제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내가 하니까 어떤 분은 '우리 일인데요. 이제 못하잖아요.' 그런 반응을 실제 보이기도 했었고.

    ◇ 박재홍> 그래요?

    ◆ 김재기> 그래서 이제 저는 그냥 봉사하는 걸로. 강의하고 연구하면서 방학 때 연구년. 작년에 연구년이었거든요. 북미 지역 갔었고.. 2015, 2016년에도 그랬었고. 그렇게 하고 있고.  보훈부에서 차관급에서 더 열심히 일하라고 장관급으로 승격을.

    ◇ 박재홍> 보훈부 장관이 됐죠.

    ◆ 김재기> 승격을 시켰죠. 그래서 더 열심히 하라고 하는데, 그쪽에서 연락하면 협조를 해야 되겠죠. 저 혼자 하기는 너무 벅차더라고요. 그 방대한 자료들 보고 맞춰봐야 되기 때문에.

    ◇ 박재홍> 지금 훈장 추서된 분이 독립운동가 중에 43분이 추서가 된 것이고.

    ◆ 김재기> 그렇죠. 2016년도 제가 갔을 때 13분이었거든요. 딱 한 분만 임천택 선생만 전수가 됐어요. 그분이 누구냐면.

    ◇ 박재홍> 헤르니모.

    ◆ 김재기> 카스트로 형제하고 아바나 법대 동기에요. 그다음에 체게바라가 장관할 때 아마 차관급인가, 한인 2세인데 상당히 고위급이죠. 그 좁은 나라에 한인 2세가 그렇게 올라갔으니까.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임천택 선생인데 그래서 아마 품격도 높아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해서 97년도에 전수했어요. 그 이후로 이제 16년 가기 전까지 한 번도 전수가 안 됐었죠. 그 이후로 변화가 생긴 거예요. 쿠바 한인사회에.
    아바나 도심 공원에 휘날리는 쿠바 국기      (아바나=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지난 18일(현지시간) 쿠바 아바나 안토니오마세오 공원에 있는 쿠바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2024.2.20     walden@yna.co.kr (끝)   연합뉴스아바나 도심 공원에 휘날리는 쿠바 국기 (아바나=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지난 18일(현지시간) 쿠바 아바나 안토니오마세오 공원에 있는 쿠바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2024.2.20 walden@yna.co.kr (끝) 연합뉴스
    ◇ 박재홍> 그러니까 한인 1세대 운동가였던 임천택 님의 장남이 임은조 씨.

    ◆ 김재기> 임은조, 헤르니모.

    ◇ 박재홍> 헤르니모. 그분이 체게바라랑.

    ◆ 김재기> 그렇죠. 같이 혁명세대를 지냈죠.

    ◇ 박재홍> 그렇군요. 방송 들으시는 청취자 여러분들이 갑자기 웬 쿠바 얘기야 이러면서 많이… 교수님께서 앞으로 더 발굴하시거나 또 앞으로 추가적인 활동을 계획하신 건 어떤 게 있습니까?

    ◆ 김재기> 현재 43분인데요. 제가 틈나는 대로 그런 자료들 보고 있는데 최대 한 150분 정도는 추서가 될 특성이 보이더라고요. 현재 서훈 추서된 분이 한 43분.

    ◇ 박재홍> 43분이 추서됐고.

    ◆ 김재기> 게다가 한…

    ◇ 박재홍> 플러스 150 정도.

    ◆ 김재기> 아니요. 한 100여 분. 그래서 288분 중에서 그때 가부장 사회였기 때문에 어머니들, 부인을 서훈을 안 했어요. 아버지가 대표로 해서 43분이고. 그다음에 이제 가장으로 했을 때 한 100분 되시더라고요, 288명 중에서. 그래서 한 반 정도 됐죠. 그래서 100분 정도가 대한인국민회 활동을 하셨죠. 그리고 대한여자애국단을 한 30분 정도가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러면 한 80분 되잖아요.

    ◇ 박재홍> 그분들이 세금같이 돈을 보낸 활동 플러스 어떤 활동도 했던 기록이 있습니까?

    ◆ 김재기> 그분들이 아까 말씀드렸던 한 10가지가 넘어요, 돈을 내는.

    ◇ 박재홍> 명목을 10가지 해서 고국으로 보내고.

    ◆ 김재기> 부인, 어머니들은 우리가 성미라는 말을 쓰거든요, 성미.

    ◆ 진중권> 쌀.

    ◆ 김재기> 쌀. 그래서 가톨릭에서 쓰는 그런 용어긴 한데. 밥을 할 때 한 주먹씩 덜어서 그게 이제 30명이 또 100명이 100가구가 하게 되고 한 달, 1년 모으면 그게 돈이 되잖아요. 그거 모아서 독립운동자금으로 이제 샌프란시스코나 중국은행이 아바나에 있었거든요. 상해에서 직접 보내시기도 하고. 또 어머니들도 했는데, 서훈자들이 두 분밖에 안 계세요. 그래서 2세대들도 한 30여 분 가능한 것 같아요. 1905년 2명 가서 그때 다 사랑도 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거든요. 그래서 1925년까지 태어나신 분들은 40년대가 성년이 되잖아요. 그래서 그때 여자애국단이나 국민회 가입한 그 기록들이 있습니다. 도움 됐던 분이 있고 현재 한 4분 정도가 2세대들이 서훈 추서가 됐어요. 자기 아버지는 안 됐는데 아들이 됐다는 얘기도 있고. 이것도 잘못됐는데. 그래서 그런 공적들로 인구세, 세금이잖아요, 그게. 그다음에 의무금, 광복비. 광복군비. 이런 분도 많았고 외교 활동하는 외교비. 그래서.

    ◆ 박성태> 지금 교수님 말씀 들으면 쿠바에서 힘들어서 쿠바의 사탕수수 드림을 가지고 288명이 갔는데 지금 기록에 있는 것만도 그중에 상당수가 사실은 여러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해서 헌금을 냈다는 거잖아요.

    ◆ 김재기> 대한인국민회 공식 기록에 나옵니다.

    ◆ 박성태> 그러면 저희 정부가 다 냈다는 건데 힘들게 사실은 사탕수수 어렵게 벌고 했을 텐데 그것도 참 놀랍네요. 대부분이 다 헌금을 냈다는 게.

    ◆ 진중권> 그게 일종에 세금이잖아. 그러니까 그거 내면서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다라는 이 느낌.

    ◇ 박재홍> 정체성.

    ◆ 김재기> 그런 결속력을 다지고 계속 후세대들한테 그런 교육을 하기도 하고.

    ◇ 박재홍> 알겠습니다. 쿠바에 있었던 가슴 뭉클한 역사의 기록들 발굴해 오셨습니다. 감사드리고요.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전남대학교 정외학과의 김재기 교수님 고맙습니다.

    ◆ 김재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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