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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형제묘'를 지웠나…여순의 주홍글씨는 비문보다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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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왜 '형제묘'를 지웠나…여순의 주홍글씨는 비문보다 깊었다

    편집자 주

    지난해 1월 20일 여수·순천 10·19사건 특별법 시행과 함께 진실과 화해로 가는 길이 성큼 다가오는 듯 했지만 갈 길은 먼 실정이다. 진상 규명을 위한 기초 조사부터 신고·접수,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실질적인 배·보상 등 개정안을 통해 풀어내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전남CBS는 여순사건 75주기를 맞아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여순사건의 아픔과 과제를 4차례 연재한다.

    [전남CBS 여순10·19 기획 '끝나지 않은 여순' ①]
    여순 이듬해 125명 총살…박채영·박소록 형제도 포함
    유족들, 사비 털어 묘지 단장…나무 훼손에 '부역 혐의자' 오명도
    박채영 재심 앞두고 있어…연좌제 죽은 박소록, 기록조차 못찾아
    전문가 "형제묘, 개인과 공동체 피해 가리키는 중요 자료"

    여수 만성리에 위치한 '형제묘'. 박사라 기자 여수 만성리에 위치한 '형제묘'. 박사라 기자 
    ▶ 글 싣는 순서
    ① 왜 '형제묘'를 지웠나…여순의 주홍글씨는 비문보다 깊었다
    (계속)

    "'부역 혐의자'라뇨, 너무 억울하고 부아가 치밀어 덧씌워 버렸습니다."

    전남 여수시 만성리 여순항쟁 유적지 중 하나인 '형제묘'. 125명이 한시에 묻힌 이곳은 '죽은 사람들끼리 이제라도 서로 형제처럼 지내라'는 의미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박채영·박소록 형제가 같이 묻혀 붙여진 이름이다.

    1949년 1월,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서 정부군에 붙잡힌 125명은 10.19 여순항쟁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만성리 산골짜기로 끌려가 재판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 해명할 기회를 얻지도 못한 채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무차별적인 총탄에 맞아 죽어갔다.

    여수 인민대회 의장 중 한 명이었던 박채영도, 그의 동생인 박소록도 무리 중에 포함돼 학살됐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시신더미에 불을 지피고 흙과 돌덩이로 묻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형제의 어머니도 아들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아들들의 육신은 땅에 묻혔지만, 어머니는 두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고통은 남겨진 이들의 몫이었다.

    연좌제로 죽은 박소록의 둘째 아들 박의철(78)씨는 가족들조차 그날의 죽음에 대해 일절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전했다. 집안의 불문율이었다.  

    "세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고, 우리도 묻지 않는 게 효도라고 생각했다"며 "어머니는 33살에 남편을 여의고 4평짜리 방에서 삯바느질로 남매를 키우며 너무 고단한 삶을 사셨다"고 했다. 이어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어 부단히 노력했다. 연좌제다 뭐다 그 피해를 말로 다 어떻게 하냐"며 "평생 먹먹하게 살아온 세월, 이제와서 뭐하러 말하냐"며 입을 닫았다.

    '형제묘' 비석 뒤 안내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덧씌워져 있는 모습. 박사라 기자  '형제묘' 비석 뒤 안내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덧씌워져 있는 모습. 박사라 기자 
    그날부터 박 씨 가족은 125명이 묻힌 형제묘를 지켰다. 당시 박 씨 가족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았다. 근처에라도 왔다가는 '빨갱이'로 낙인 찍히기 때문이다.

    박 씨는 "큰 집에서 관리를 하다가 10살 때부터 제 어머니와 큰 집 사촌형제 두 명과 추석이 다가오기 전 해마다 벌초를 해왔다"며 "어린 나이에 무작정 낫을 들고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고 전했다. 그는 "묘가 커서 하루에 끝내기가 힘들어 이틀이 걸렸다. 시신이 묻혀있는 어두컴컴한 골짜기를 갈 때마다 아무 것도 안 보여 막대기로 벽을 쭉 긁으면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어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도 함께 묻힌 묘지지만 아버지와 큰아버지와 같이 묻힌 한 가족이라 생각하니 억울하지도, 고생스럽지도 않았다"고 덧붙였다.

    여순사건으로 학살당한 고 박소록씨 아들 박의철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사라 기자  여순사건으로 학살당한 고 박소록씨 아들 박의철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사라 기자 
    지난 2003년에는 여수시와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학살 당한 민간인 125명의 죽음을 기리는 묘비를 하나 세우면서 이들에 대해 '부역 혐의자'라고 표기한 일이 있었다.

    이를 본 박 씨는 한달음에 달려와 안내문을 가리는 판을 덧씌웠다.

    당시 글씨는 가려졌지만 지난 세월 가족들에게 씌워진 주홍글씨는 비문보다 더 깊고 짙었다.

    박 씨 가족은 흙과 돌만 있던 묘지에 사비를 들여 새로 단장했다. 가을 뙤약볕 아래 벌초와 성묘하러 오는 가족들을 위해 나무 5그루를 심어 그늘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들은 누군가에 의해 동강이 났다.

    형제묘는 5년여 전부터 여수시와 여순사건 여수유족회가 관리해오고 있다.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되는 등 재조명되면서 지역에서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서장수 여순사건 여수유족회장은 "당시 여순사건이라고 하면 말도 꺼내지 못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는데 박 씨 가족들은 형제묘를 관리해왔다"며 "몇 년 전부터는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여수시와 유족회에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채영, 박소록 형제에 대한 주민 조사 피해 상황. 박의철 씨 제공 박채영, 박소록 형제에 대한 주민 조사 피해 상황. 박의철 씨 제공 
    형제묘는 여순사건 당시 학살의 진상을 가리키는 중요한 증거다. 개인뿐 아니라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걸 기억하기 위한 유의미한 자료인 것이다.

    여순사건 역사학자인 주철희 박사는 "묘비문이 지어진 것 자체도 역사적 증거"라며 "한 집안에 의해 형제묘가 지켜져 온 일도 참 의미있지만, 형제묘를 통해 여순사건이 준 개인과 공동체의 피해까지 되새겨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주 박사는 "여순사건으로 인한 연좌제 등 피해를 들여다볼 때 개인의 고통을 넘어 공동체적인 피해에 접근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오는 19일 박채영에 대한 여순사건 재심 선고가 예정돼 있다. 유족들은 박채영이 당시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돼 형법으로 사형당했던 국가기록원의 판결문을 찾아 재심을 신청할 수 있었다. 앞서 9월에는 검찰이 무죄를 구형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의철 씨 아버지 박소록에 대한 사형기록은 아직 찾지 못해, 연좌제로 죽은 그는 재심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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