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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다랑쉬굴 학살…유해는 화장돼 바다에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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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 다랑쉬굴 학살…유해는 화장돼 바다에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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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 74주년 증언본풀이 마당 '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

    함복순(80) 할머니가 증언 중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고상현 기자 함복순(80) 할머니가 증언 중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고상현 기자 70여 년 전 제주4.3 당시 '다랑쉬굴 학살 사건'은 4.3의 총체적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군경은 굴에 피신해 있던 무고한 주민 13명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굴 입구에서 불을 지피고 구멍을 막아 질식시켰다. 특히 40년 뒤 겨우 수습된 유해는 졸속으로 화장돼 바다에 뿌려졌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오빠…40여 년 뒤 싸늘한 유해로

     
    "(뼛가루를 만지니) 손이 뜨뜻해. 우리 오라방(오라버니)이구나 했주게."
     
    31일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진행된 4.3증언본풀이 마당에서 함복순(80) 할머니가 한 말이다. 4.3 당시 행방불명된 오빠 함명립(20)씨의 유해가 40여 년 만인 1992년 4월 제주시 구좌읍 다랑쉬굴에서 수습됐다. 하지만 오빠의 유해는 곧바로 화장된 채 바다에 흘려보내야 했다.
     
    "아휴. 오빠 유골을 화장시킨 거라. 바다에 뿌리라고 해서 뿌려서. 그때 마음속으로 '(수십 년간 그 좁은 굴속에 있던) 오빠에게 이제는 넓은 데로 나와서 훨훨 다니십서'라고 빌었어."
     
    함 할머니는 4.3 당시 1남2녀 중 막내로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다. 중산간 마을이었던 터라 군‧경의 총칼을 피해갈 수 없었다. 오빠는 집에서 숨어 지내다 갑자기 행방불명됐다. 이후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어머니는 희생됐다. 함 할머니가 불과 6세 때 벌어진 일이다.
     
    증언하는 함복순 할머니. 사진 왼쪽은 4.3연구소 허영선 소장. 고상현 기자증언하는 함복순 할머니. 사진 왼쪽은 4.3연구소 허영선 소장. 고상현 기자"밖에서 놀당(놀다가) 집에 들어와서 보니 오라방이 초가집 지붕에 숨어서. 어멍(어머니)이 '누가 오거든 오라방 숨어있다'고 하지 말라고 한 거라. 어느 날, 밥 올려주려고 보난 오라방이 어서진(없어진) 거라. 어멍이 울멍불멍 찾아야 된다고 울음바다가 돼서. 그게 오라방 마지막 모습이라."
     
    그렇게 생사가 불투명했던 함 할머니의 오빠 함명립씨는 1992년 4월 4.3연구소의 다랑쉬굴 발굴 작업 끝에 싸늘한 유해로 발견됐다. 당시 길이 30m 정도의 굴 안에는 4.3 당시 행방불명됐던 종달리‧하도리 주민 11명의 유해가 있었다. 불과 4살, 10살에 불과했던 영‧유아 유해도 포함됐다.
     
    학살 직후 시신 2구는 가족에 의해 바로 수습됐지만, 나머지 11구는 캄캄한 굴속에서 40여 년간 갇혀 있었다. 당시 참사를 피했던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군경이 처음에는 굴 안으로 수류탄을 던졌고,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입구에서 짚으로 불을 지피고 구멍을 막아 질식시켰다.
     
    40여 년 만에 어렵게 오빠 유해를 수습했지만, 반강제적으로 화장이 이뤄진 터라 함 할머니는 헛묘(시신 없는 무덤)에다가 비석 하나만 세워야 했다. "오빠가 산에 살다 죽어서 주변에서 하도 '폭도' '폭도'라고 하니깐 비석만 세워둔 거라…." 함 할머니는 70여 년 억눌렀던 한을 토해냈다.
     
    제주시 구좌읍 다랑쉬굴 학살 현장 모습. 지금은 굴 입구에 돌로 막아놨다. 자료사진제주시 구좌읍 다랑쉬굴 학살 현장 모습. 지금은 굴 입구에 돌로 막아놨다. 자료사진

    아버지 잃고도 대를 이은 연좌제…"참 비참한 시대"

     
    이날 증언자로 나선 고관선(76) 할아버지 역시 수십 년 세월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아버지 고태원(4.3당시 26세)씨 유해를 1992년 다랑쉬굴 유해 발굴 작업을 통해 수습할 수 있었다.
     
    4.3 당시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주민인 고태원씨는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군경의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자 산으로 도피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희생됐다. 어머니와 함께 전남 완도에 있던 터라 고 할아버지는 목숨을 건졌다. 불과 한 살 때 벌어진 일이었다.
     
    이후의 삶도 평탄치 않았다. 연좌제로 사회적 낙인이 찍힌 것이다. "중학생 때 친구랑 싸움이 붙었는데, 그 때 그 친구 가족이 와서 '산 폭도 새끼야! 누굴 패?'라고 한 거라. 충격이었지. 어렸을 때 작은할아버지께서 키워주셨는데, 어디 가서 말썽 피우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하게 돼서."
     
    고관선(76) 할아버지가 증언하고 있다. 고상현 기자 고관선(76) 할아버지가 증언하고 있다. 고상현 기자
    연좌제는 대를 이어 고 할아버지 가족을 괴롭혔다. "해군에 들어가려고 하니깐 면사무소 직원이 와서 신원조회 하니깐 '안 된다'고 한 거라. 펑펑 울었수다. 나중에 우리 큰아들이 사관학교만 가겠다고 했는데, 그때 어쩔 수 없이 고백했수다. 아들이 펑펑 울대요. 그 시대라는 게 비참하우다."
     
    고 할아버지는 1992년 어렵게 아버지 유해를 찾았지만, 제대로 제조차 지내지 못했다. "다른 유족과 합동묘를 하기로 했는데, 화장한 유해들을 항아리에 담아서 주는 거라. 김녕 바다로 가라고 해서 거기서 뿌렸어. 노태우 정권 때라서 그런지 주변에서 빨리빨리 처리하려고만 했수다."
     
    다랑쉬굴 학살 현장 발굴은 지금의 4.3진상규명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여태껏 그날의 학살을 기억하기 위한 위령공간은 없는 상황이다. 안내판만 있을 뿐이다. 고 할아버지는 마지막 소원으로 "다랑쉬굴 학살 사건을 알릴 수 있는 위령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4.3연구소 이규배 이사장은 "유해를 화장했으면 최소한 한줌의 재만이라도 가까운 곳에 묻을 수 있게 하는 게 마땅하지 않나. 유족의 간절한 염원도 차갑게 외면하고 바다에 수장한 것이 30년 전 대한민국의 공권력이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랑쉬굴 4.3유적지 모습.  안내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자료사진다랑쉬굴 4.3유적지 모습. 안내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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