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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고난'의 피난길…여린 아이들은 죽어나갔다



제주

    제주4‧3 '고난'의 피난길…여린 아이들은 죽어나갔다

    [제주4‧3, 짓밟힌 꽃망울④]
    군‧경 마을 불태우자 피난길 떠나
    추위‧굶주림 속에 영‧유아들 숨져
    집단 수용소서도 전염병에 희생

    70여 년 전 제주 4‧3 당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만 1만4천여 명. 희생자 10명 중 2명은 아이들이었다. 군‧경을 피해 부모와 함께 피난길을 떠났던 여린 아이들은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나갔다. 제주CBS는 그동안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혔던 이들의 비극을 조명한다. 1일은 네 번째 순서로 죽음의 피난길을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젖먹이‧임산부도 죽였다…제주4‧3 아동학살 '참극'
    ②제주4‧3 학살터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③"마구 때리고 고문"…소녀에게 제주4·3은 '악몽'이었다
    ④제주4‧3 '고난'의 피난길…여린 아이들은 죽어나갔다
    (계속)


    제주4·3 당시 홍춘호 할머니 가족이 숨었던 큰넓궤. 동굴 안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고상현 기자

     


    "우리 마을은 옛날에 할아버지들이 '어린 아이들이 춤추는 형국'이라고 해나서. 그만큼 살기 좋았주게. 그런데 4‧3 터지니깐 마을도 아이도 몬딱(몽땅) 어서져(없어져) 불언…."

    지난달 5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홍춘호 할머니(84)는 돌담만 남은 텅 빈 집터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홍 할머니가 세 남동생과 뛰놀던 마을은 온데간데없다. 4‧3 당시 군‧경이 마을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11살 소녀였던 홍 할머니는 어린 남동생들과 함께 부모님 손에 이끌려 하루하루 삶과 죽음이 교차한 '고난'의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오름과 굴로 피난…추위·굶주림 속에 동생들 죽어

    4‧3 광풍이 휘몰아치던 1948년 11월부터 군‧경은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130여 가구가 살았던 무등이왓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경은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 10여 명을 총살했다. 홍 할머니 가족은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홍춘호 할머니(84)가 4·3 당시 겪었던 고초를 증언하고 있다. 고상현 기자

     


    "집 다 태워버리난, 어멍(어머니)이 '오늘은 이디시믄(여기 있으면) 죽습니다. 다른 데 숨게' 한 거라. 아방(아버지)이 우리를 데리고 마을 인근 원물오름으로 데려갔어. 납작한 굴에 우릴 곱저두고(숨겨두고) 아방은 군인들 오나 망보러 다녔어."

    12월부터 군‧경은 마을 주변에 숨은 주민들을 찾기 위해 대대적으로 수색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주민 40여 명을 찾아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홍 할머니 가족은 살아남은 주민 120여 명과 함께 길이 200m의 깊은 굴인 '큰넓궤'로 숨었다.

    "굴속에 들어가서 한 달 넘게 살아나서. 하늘 한번 본 적 어서난(없었지). 깜깜하니깐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가 어서. 어른들만 굴 밖에 나강 먹을 거 구해오고. 우린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 돌 틈에 고인 물 빨아먹으멍 살았주게."

    이듬해 1월 큰넓궤마저 군‧경에 발각되자 홍 할머니 가족은 오름과 곶자왈(숲) 등 이곳저곳을 떠돌며 피신했다. 군‧경을 피해 도망 다니는 과정에서 이불과 옷가지 등도 사라진 터였다. 추운 겨울 11살 소녀가 감당하기엔 피난길은 가혹했다.

    제주4·3 당시 군·경을 피해 홍춘호 할머니 가족이 숨었던 큰넓궤. 고상현 기자

     


    "아방은 나하고 우리 동생들하고 따로따로 숨겨나서. 한 번에 발각되면 다 죽으카부댄, 낮에는 옴팡진 데 곱아서(숨어서) 어둡도록 아방 기다려. 아방, 어멍 봐지믄 그렇게 반가와. 오늘은 우리 살앙 어멍 아망 봐졈구나. 하루 사는 게 그추룩(그렇게) 좋안."

    1949년 3월 '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군 당국의 말에 따라 홍 할머니 가족은 서귀포시 천지연폭포 인근 수용소(단추공장)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때는 남동생 3명(2살‧5살‧8살) 모두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죽은 뒤였다.

    ◇벼룩·이 들끓었던 수용소…전염병에 유아들 죽어나가

    군‧경의 '초토화 작전' 기간 중산간 마을에서 피신 중이던 수많은 아동이 숨졌다. 군‧경에 쫓기다 총살당하거나 산에서 얼어서 죽는 일이 허다했다. 특히 젖먹이의 경우 어머니가 제대로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아 굶어 죽는 경우도 많았다.

    중산간 마을인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빌레못' 마을에서 살다가 4‧3 당시 2살의 나이에 부모와 함께 피난길을 떠났던 고상국 할아버지(75)는 "군인들이 집을 다 태워버리니깐 이곳저곳 떠돌이 생활을 한 거라. 내 위로 3살, 4살, 6살, 7살 형제들이 모두 굶엉 죽어서"라고 말했다.

    지난달 17일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자택에서 고상국 할아버지(75)가 증언하고 있다. 고상현 기자

     


    군‧경에 의해 집단 수용소에 끌려가더라도 전염병으로 죽는 아동들도 있었다. 먹을 것도 없을뿐더러 위생 상태도 좋지 않은 환경에서 집단으로 수용되다 보니 '여린' 아이들은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1949년 초 명월리, 금악리, 상명리 등 중산간 마을 주민 수백 명이 수용됐던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 통조림 공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공장 안에서 소개민들은 판자나 가마니 등으로 칸을 막아 생활했다. 식량도 부족했고, 위생 상태도 불량해 유아들이 홍역에 걸려 숨졌다.

    12살의 나이에 통조림 공장에 부모와 함께 수용됐던 홍군석 할아버지(84)는 당시 상황에 대해 "죽지 않으면 살기였지. 그때 고생이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 고구마 찌꺼기 말린 거로 끼니를 때웠어. 쥐도 다니고 벼룩이랑 이가 온몸에 들끓었어"라고 증언했다.

    이어 "그때 마침 홍역이 돌아서 병원도 없고 그래서 한두 살부터 네 살, 다섯 살 아이들이 많이 죽었지. 우리 세 살배기 막내 여동생 하나도 죽었어"라고 말했다.

    집단 수용소가 있었던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 지금은 육가공센터가 들어서 있다. 고상현 기자

     


    군‧경의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을 잃고 부모와 함께 피난길에 떠나거나 수용소에 수용됐던 아동들에게 있어서 기아와 전염병은 하나의 공포였다. 또 다른 학살과 다름없었다.

    ◇피난길 홀로 살아남은 11살 소녀…부모마저 잃어

    죽음의 피난길에서 4남매 중 홀로 살아남은 홍춘호 할머니는 얼마 안 있어 부모마저 잃었다. 단추공장 수용소에 있다가 해안마을인 서귀포시 화순리로 소개된 뒤였다. 1951년 5월 아버지가 마을 성담을 지키러 갔다가 숨졌고, 3개월 뒤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우리 살리려고 고생하신 탓"이라고 홍 할머니는 넋두리했다.

    "그때는 살아짐직 안해신디(살 수 없을 거 같았다). 나만 살아나시난. 밤에 혼자만 가만히 있으면 별생각이 다 나. 이제토록 살아온 거 생각하믄 말로 다 표현 못 해."

    2001년 4월 3일 무등이왓 입구에 세워진 '잃어버린 마을 표석'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인가가 자리했을 대숲을 지나 아이들이 뛰어나올 듯한 올레길을 걸어보라. 마을을 지나 큰넓궤로 발길을 돌려보라.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지난달 5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 '잃어버린 마을'에서 홍춘호 할머니가 옛 집터를 바라보고 있다. 4·3 당시 집이 불에 타며 현재는 돌담만 남아 있다. 고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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