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대 제공
코로나19 국경봉쇄에 따른 무역단절로 북한 내 생필품 부족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외교관들마저 자녀들의 옷이나 신발을 부모들끼리 서로 물려주면서 버티고 있다는 것이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의 전언이다.
생필품이 매우 부족하지만 북한은 한편에서는 '선질후량'의 구호에 따라 공산품 품질과 제품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공산품 생산이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신제품 개발 경쟁을 벌이는 이런 현상은 과거 전통적인 계획경제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백통일경제연구 창간호(한라대 동북아경제연구원)에 실린 한국산업은행 김영희 선임연구위원의 논문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의 '시장형 경제' 실태'는 이처럼 일견 모순되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북한 원산구두공장 제품들. 연합뉴스
◇수십년간 변화가 없었던 신발 디자인이 바뀐 이유는?김영희 연구위원에 따르면 2010년 이전에만 해도 북한에서 '개발'은 '국토개발'이나 '자원개발'을 의미했다고 한다.
연구개발, 기술개발, 신제품개발과 같은 용어는 김일성·김정일의 글이나 사전에서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과거 전통적인 계획경제에서는 북한 주민에 배급되는 의복, 식품, 신발, 생활용품 등에 굳이 상표를 붙일 필요가 없었다. 디자인도 한번 정해지면 거의 변화가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북한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신의주신발공장에서 생산되는 흰색 신발창의 남성용 운동화와 여성용 편리화 등 신발 디자인은 수 십 년간 바뀐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은 집권 이후인 2014년 5.30담화와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 도입 등을 계기로 상품가격 및 판매체계, 기업경영 등에 일정한 자율성을 부여하면서 기업의 신제품 개발과 품질 경쟁, 자체 디자인 개발, 상표도안 등이 확산됐다는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이 같은 오늘의 북한 경제를 사회주의 국가의 전통적인 계획경제의 변형된 형태로서 '시장형 경제'라고 평가했다.
코로나19에 따른 국경봉쇄로 수입이 끊기는 속에서도 '시장형 경제'가 내수에 영향을 미쳐 '선질후량'의 상품개발과 품질경쟁은 계속되는 것으로 관측된다.
한라대 동북아경제연구원이 펴낸 한백통일경제연구 창간호 "기로에 선 북한 경제, 남북경협 어디로?"는 김정은 시대 북한 경제와 남북경협 방안 등에 대한 전문가들의 다양한 논문을 실고 있다.
노동당 제8차 대회서 발언하는 김정은 당 총비서. 연합뉴스
◇북한 대외무역에 '와크' '일변도'의 정확한 의미는?북한 경제의 속사정을 알려주는 각종 용어에 대한 설명도 눈에 뛴다.
'한쪽으로 치우침'을 뜻하는 '일변도'라는 말이 북한의 대외 무역에서 사용될 때는 특정한 의미가 있다. 바로 중국 무역 일변도, 즉 중국 무역 의존을 언급하는 말이다.
김정은은 7차 당 대회와 8차 당 대회 때 모두 무역 부문에서 "대외무역에서 일변도를 없앨 것"을 언급한 바 있다.
이철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북한의 대외무역, 작동과정과 참여 단위들"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언급한 무역에서 일변도라는 것은 북한의 수출입 무역이 중국시장에 집중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며,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이후 러시아와 동남아 시장으로 수출입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흔히 북한에서 대외무역을 할 수 있는 할당량 정도로 알려진 이른바 '와크'에 대해서도 정확한 의미를 알려준다.
이철 연구위원은 "흔히 국내에서 북한의 수출입 계획을 '와크'로 알고 있는 사례들이 있으나, 북한의 대외경제성과 무역지도국 등 모든 경유 단위들의 경유도장을 받은 완성된 '무역품수출입신고서'가 '와크'의 정확한 의미"라며, "일례로 석탄수출 계획은 100만 톤을 받았다고 해도 '무역품수출입신고서'로 경유 수속이 완료된 것이 20만 톤이면 그 석탄 와크는 20만 톤"이라고 설명했다.
원산 갈마 해안관광지구. 연합뉴스
◇원산과 북한 최고지도부 3대의 인연도 주목 북한 도시 원산과 북한 최고지도부의 인연도 눈길이 간다.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에는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가 닻을 내리고 소련군 복장으로 하선하는 한 무리 중에는 김일성(당시 김성주)이 있었다고 한다.
김범수 강원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원산 개발과 남북강원도 통합관계성 연구'논문에서 "김일성에게 원산은 해방 이후 처음 밟은 조국이라는 의미와 함께 오랜 유랑생활을 마치고 해방 이후 첫 추석을 보낸 장소로도 상징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정일이 지난 2009년 4월 27일 원산 해안광장에 김일성 동상과 김일성 혁명사적관을 세운 바 있고, 김정은은 현재 원산 갈마 관광 지구를 개발 중이다. 원산은 김정은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고 재일교포 출신인 생모 고용희가 북송선 만경봉호를 타고 내린 곳이라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다는 추정도 있다.
조건식 한라대 동북아경제원장은 '한백통일경제연구' 창간사에서 "'한백'은 한반도 통일을 염원하는 표어인 '한라에서 백두까지'를 축약한 상징어"라며,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각 분야별로 끊임없이 남북경협을 시도해 나간다면 경제자양분을 필요로 하는 북측의 수요와 맞물려 결국 남북경제공동체를 향하는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 원장은 "최근 북한 경제가 기로에 서 있다. 가중되는 국제적인 대북경제제재와 홍수 등 자연재해로 막심한 피해를 입은 데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대외무역이 거의 제로 상태로 떨어졌다"며, "북한으로서는 이런 위기상황이 오히려 남북경협을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