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관계자들 및 피해자들이 지난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유영근 부장판사)는 SK케미칼·애경 前대표를 비롯한 모든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한형 기자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사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유영근 부장판사)가 지난 12일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의 1심 재판에서 내린 판결을 거칠게 요약한 결과다.
재판부는 업무상과실치사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가 폐 질환이나 천식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SK케미칼의 전신인 '유공'이 지난 1994년 내놓은 '가습기메이트'가 사실상 첫 가습기살균제 제품인 만큼 관련기업들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이번 판결은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다.
10년 전인 지난 2011년 가습기살균제의 실상이 처음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검찰 수사가 이뤄졌고, 같은 혐의로 기소된 옥시레킷벤키저 관계자 등이 실형을 선고받은 선례를 생각하면 의문은 더욱 커진다. 물론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에 함유된 성분은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이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내 몸이 증거인데 다른 상품이라는 이유로 무죄가 말이 되나"라고 반발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지난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이 현행법이었을 경우 이같은 모순적 판결을 막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유명을 달리한 고(故) 김용균씨의 모친 김미숙씨 등 주로 산업재해(산재) 피해유족들이 이 법안 제정에 앞장서면서, 산재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왔지만 중대재해법은 '중대시민재해'까지 아우르는 법안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의결된 중대재해법은 '사망자가 1명 이상인 재해와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인 중대 산재와 함께 중대 시민재해도 중대 재해로 규정하고 있다. 법안에 따르면, '공중 이용시설과 공중 교통수단 등의 관리부실'로 인해 △사망자 1명 이상 △2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10명 이상이 발생한 재해가 해당된다.
이러한 요건에 부합하는 중대 시민재해 발생 시 사업주와 경영 책임자가 안전조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회사 법인에도 같은 책임을 물리는 양벌규정과 '징벌적 손해배상'도 적용된다.
다만, 공포 후 1년이 지나야 시행되는 지금의 중대재해법이 현행법령이었다 해도 이번 유·무죄 판결 여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리란 것이 법조계의 지배적 시각이다.
재판부가 CMIT·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폐질환 등 사이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해당 성분이 동물시험에서 염증 반응을 유발했고 국립환경과학원이 지난 2012년 'CMIT·MIT를 1% 이상 함유한 혼합물'을 유독물질로 지정·고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성분을 소량(0.015%)만 함유한 가습기살균제가 이 사건과 같은 폐손상이나 천식 질환을 일으킬 만큼의 위해성이 있다고 단정하긴 어렵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 제품들이 피해질환의 원인이라고 확정짓기 위해서는 △CMIT·MIT가 폐질환 혹은 천식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킬 수 있는 물질이어야 한다는 점 △가습기 사용환경과 동일한 인체 흡입을 통해 CMIT·MIT가 사람 폐에 도달하는 것이 확인되어야 한다는 점 △폐에 도달했더라도 폐질환·천식을 유발·악화시킬 정도의 양이 축적돼야 한다는 점 등이 확인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미 환경부 산하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위원회로부터 피해자임을 판정받은 11명의 사례를 살폈음에도, "(환경부의) 피해인정 결과를 엄격한 증명을 요하는 형사사건에 적용하긴 어렵다"며 과학적 입증의 '완결성'을 요구한 것이다.
다수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대리해온 황정화 변호사(환경보건시민센터 공동대표)는 "어떤 법으로 가더라도 형사처벌을 할 때엔 기본적으로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는 판단이 나온 것이라 (중대재해법이 있었다 해도) 판결에 영향은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만, 원안과 같이 '형사상 인과관계 추정' 규정이 만약 있었다면 조금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민사에서도 보통 환경·보건 관련사건은 인과관계 추정이 들어가 있을 경우 판단이 다소 달라지기 때문"이라며 "재판부의 판단기준이 너무 엄격했다고 본다"고 부연했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대안)이 가결되고 있다. 내년부터 노동자가 사망하는 중대한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안전 조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경영진은 1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중대산업재해 처벌 대상에서 5인 미만 사업장은 제외되며 다만 하청을 받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하더라도 원청업체가 법 적용 대상일 경우 원청업체의 경영 책임자 등은 처벌 대상이 된다. 윤창원 기자
당초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 등이 발의한 중대재해법 원안(原案)에서는 △해당사고 이전 5년간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위반한 사실이 3회 이상 확인된 경우 △사고 관련 증거를 인멸하거나 현장을 훼손하는 등 진상조사와 수사를 방해하거나 지시·방조했을 경우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가 위험방지의무를 위반한 행위로 인해 재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일반적으로 피해자들이 스스로 피해를 입증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한 핵심조항이었지만, 해당 조항은 '무죄 추정의 원칙'에 반(反)하는 위헌적 발상이란 반대에 부딪혀 끝내 최종안에서 삭제됐다.
황 변호사는 "재판부는 특이성·비(非)특이성 질환을 구분해놓고 천식을 '비특이성' 질환이라 보고 있는데, 비특이성 질환의 전제는 한 가지 질환에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단 것"이라며 "비특이성 질환이란 전제 아래 서면 인과관계는 거의 입증하기가 어려워진다. 누군가 천식에 걸린 이유는 꽃가루 때문일 수도, 가습기살균제 때문일 수도 있고 복합적 증상이거나 개인적 체질·병력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이어 "CMIT·MIT가 일반적으로 천식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이어도, 현재 내 질병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정확히 판단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용량을 흡입해 얼마의 농도가 축적돼야 병이 될지 확실한 데이터로 나올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며 "물론 민사보다 형사상 인과관계를 엄격히 물어야 하는 건 맞지만, 이런 식으로 인과관계를 따지기 시작하면 절대로 형사책임을 지울 수 있는 사안이 없을 거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는 "법적 인과관계는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에서도 (재판부의 말처럼) 피해를 폭넓게 구제하진 않았다"며 "위원회 내 전문가들이 모여 개별적 인과관계를 엄격하게 따져 산정한 결과인데, 그런 논의들은 다 사라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오민애 변호사 역시 "옥시 판결은 인과관계 인정을 전제로 '어떻게 처벌을 받을 수 있을까'를 본 건데 이번 판결은 책임 소재까지 가기도 전에 인과관계 판단을 다르게 한 거라 중대재해법과는 관계가 없을 것 같다"며 "입증 책임이 기업이나 사업주에 부과돼야 피해 발생과 주의의무 위반 사이 인과관계 발생이 수월했을 텐데 통과된 법에는 그게 아예 없으니 (법원) 판단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가습기메이트 사건에서 CMIT·MIT가 폐 섬유화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밝힐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게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게 아닌 다른 물질이 원인이 될 수 있었느냐'는 측면에서는 그 또한 아니라는 게 확인이 됐다"며 "그럼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누가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설명했다.
또한 오 변호사는 "주의의무 내용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있고, 이를 기준으로 경영자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조가 담겨 있는 게 중대재해법"이라면서도 "가습기메이트 사건처럼 인과관계를 입증하고 밝히는 게 중요한 사건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검찰이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인과관계를 쉽게 밝힐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라며 "중대재해법이 현실에서 작용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활동가인 임자운 변호사는 애경과 SK 측의 '증거인멸' 혐의가 유죄로 확정된 점을 들어 원안에서 후퇴한 중대재해법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임 변호사는 "중대재해법에 따르더라도, 제품의 하자와 건강문제의 인과성이 인정되는 것을 전제로 제품의 하자와 사업주 주의의무 위반 사이 인과성이 인정되는 것인데, 이번 판결에선 전자조차 인정이 안 된 것"이라며 "아쉬운 것은 중대재해법이 원안대로 통과됐다면 이 사건에서 '인과관계 추정조항'이 적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회에서 그마저 삭제된 상황이라, 결론적으로 지금의 중대재해법으로도 이번 같은 판결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판사가 인과관계 입증을 너무 엄격하게 본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해 4월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가습기살균제 관련 자료를 은폐, 폐기한 혐의로 기소된 고광현 전 애경산업 대표와 양모 전 전무에 대해 각각 징역 2년 6개월, 징역 1년을 확정했다.
그래픽=김성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