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창원지검 통영지청 앞에서 사건의 신속한 처리를 촉구하며 1인 시위 중인 이만신씨.(사진=이만신씨 제공)
코로나19 사태로 유독 시간의 흐름이 더디게 느껴진 올해, 삼성SDI 해고노동자인 이만신(56)씨에게 이번 여름은 더욱 길었다. 이씨는 불볕더위와 장마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초 농성 중인 서울 서초구 삼성 본사 앞을 잠시 떠나 경남 통영시에 위치한 창원지검 통영지청 앞에서 24일을 보냈다. 자신의 해고무효확인 소송에 증인으로 나와 허위증언을 한 삼성 관계자들에 대한 검찰의 신속한 사건 처리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사건이 5월에 수원에서 통영으로 넘어갔는데, 3개월이 넘도록 검사가 조사를 해주지 않는 거다. 사건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 하는데, 여전히 '검토 중'이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통영까지 직접 내려갔다. 가서 검찰청 주차장에 텐트를 쳐놓고, 먹고 자고 하면서 매일 1인 시위를 했다."
지난 1987년 삼성SDI에 입사한 이씨는 지난 2012년 '근무 태만', '지시 불이행' 등의 이유로 징계해고됐다. 이후 그는 삼성을 상대로 수년간 '복직 투쟁'을 하면서 거리 위의 삶을 일상으로 살아왔다.
앞서 이씨는 지난해 7월 서울중앙지검에 임봉석 삼성중공업 전무(전 삼성SDI 상무)를 위증죄 혐의 등으로, 이상훈 전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강경훈 삼성전자 부사장 등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이들이 공모해 노조를 설립하고자 했던 이씨를 부당해고했을 뿐 아니라, 임 전무의 경우 이씨가 제기한 소송에서도 '인사에 관여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는 이유다. 사건은 수원지검을 거쳐 창원지검 통영지청으로 이관되며 1년 넘게 표류하다 최근에서야 결론이 났다.
이씨가 복직 투쟁을 하며 노숙하고 있는 서울 서초구 삼성 본사 근처 현장.(사진=이만신씨 제공)
법조계 등에 따르면, 창원지검 통영지청은 지난 8월 말 임 전무를 위증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비록 노동조합법 위반 혐의는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피고소인 전원이 불기소 처분됐지만, 임 전무의 혐의가 인정되면서 이들이 이씨를 위법하게 해고했다는 정황이 확인된 셈이다.
공소장을 살펴보면, 임 전무는 지난 2015년 6월 이씨의 해고무효확인 소송에 증인으로 나와 'MJ(문제) 사원이라는 것은 어떤 사원인가'라는 이씨 측 질문에 "저희들이 공식적으로 쓰는 단어가 아니다"라고 답했고, "비공식적으로(도) 모른다. 최근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는 내용"이라고 답변했다. 'MJ로 관리하는 사원들은 노조 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감시하는 것 아닌가'라는 물음에도 "이상하게 엮지 말라", "MJ라는 용어를 사용 안 한다" 등 거듭 연관성을 부인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같은 증언이 거짓이라고 봤다. 입사 때부터 인사관리과 소속이었던 임 전무가 증언 당시까지 약 25년 동안 삼성중공업과 삼성SDI에서 '노사관리 업무'를 담당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임 전무는 지난 2004년 중국에서 근무하던 이씨가 화재에 휘말렸을 때에도 "MJ인력 이만신 사원도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기재된 내용을 직접 확인하는 등 해당 용어를 수시로 접하고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러한 임 전무에 대한 수사기관의 판단은 4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씨는 앞서 임 전무를 같은 혐의로 고소했지만 당시 수원지검은 임 전무를 불기소 처분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씨가 제기한 해고무효확인 소송이 2016년 4월 대법에서 '패소'로 최종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전환의 실마리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지난해 말 1심에서 이상훈 전 의장 등이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이른바 '삼성 노조와해' 사건 재판에서 이씨가 연루된 삼성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의 문건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당시 서울중앙지법이 심리한 이 사건은 삼성SDI가 아닌 삼성전자서비스가 대상이었지만, 공판 과정에서 미전실이 계열사의 모든 인사를 관리하고 노조 설립을 조직적으로 훼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관련문건 속에 이씨의 이름도 숱하게 언급된 것이다.
이씨 측이 법원에 신청한 문서송부촉탁을 통해 얻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문건 중 일부. '문제인력' 관리자 란에 임봉석 전 삼성SDI 상무의 이름이 선명히 보인다.(사진=이만신씨 측 제공)
이에 이씨 측은 해당 재판의 문건을 열람·복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앙지법에 별도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고 문서송부촉탁을 통해 어렵게 증거 문건들을 얻어낸 것으로 파악됐다. 비록 해당 소송은 지난달 패소 판결이 났지만, 임 전무의 혐의를 입증할 귀중한 증거를 입수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3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이 문건에는 '삼성SDI 문제인력' 관리자를 임 전무로 분명히 명시한 내용과 함께 '복수노조 시행 이후 문제인력 조치'와 관련해 '노조 설립 및 시도화'를 진행한 이씨를 퇴직 처리했다는 문구 등이 또렷이 담겼다.
이씨를 대리해온 김낭규 변호사는 "삼성에서는 '문제인력'을 전향 가능·불가 둘로 나누는데 이씨는 '전향 불가자'였다. 2002년부터 '문제인력'으로 분류된 이씨를 삼성그룹 미전실에서 해고 결정한 것"이라며 "다만, 상황이 변화됐음에도 (중앙지법에서) 손해배상 소송을 사실 심리 없이 그대로 기각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씨 측이 법원에 넣은 문서송부촉탁을 통해 입수한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문건 중 일부. '문제인력'과 관련해 이만신씨를 '퇴직조치'했다고 명시하고 있다.(사진=이만신씨 측 제공)
이씨 측은 '정당한 해고였다'는 삼성 측의 주장이 허위로 드러남에 따라, 임 전무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오면 이를 기반으로 대법에 재심을 청구하고자 하는 소망도 품고 있다. 대법 확정판결에 대한 재심 청구기한은 5년으로, 내년 5월이면 청구 자체가 불가한 상황이다.
이만신씨는 "이제 희망이 보인다"며 "제가 삼성에 근무할 때 늘 들었던 말이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명백한 불법이 드러났는데, 삼성은 9년째 본관 앞에서 노숙 중인 억울한 노동자에게 사과하고 원직 복직시키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