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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뿌리' 광복군 80주년 "조국과 더불어 영원할 것"



국방/외교

    '국군의 뿌리' 광복군 80주년 "조국과 더불어 영원할 것"

    1919년 4월 11일 임정 수립 이후 21년만에 광복군 창군
    일제 패망 직전 서울 진공 작전 추진…항복으로 실행은 못 해
    미 군정에 정식 정부 인정 못 받고 광복군도 1946년 해체
    장제스에게 "한국 독립 주장 지지해 달라" 외교전 펼쳐
    라디오 방송 선전전, 교포·일본군 탈출 청년들 모아 군사훈련
    "피 흘리며 싸운 독립운동 역사, 가볍게 평가해선 안 돼"

    1940년 8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사진=독립기념관 제공)

     

    1940년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만들어진 한국광복군이 17일 창군 80주년을 맞았다.

    대한민국 국군은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했음을 공언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2018년 배포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 "대한민국과 국군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광복군의 정통성 위에 건설됐다"며 "광복군은 자주독립정신을 대한민국 국군에게 물려준 군맥의 주체이며, 국군 또한 이러한 광복군의 법통을 계승함으로써 '광복군의 후예'가 되고자 하였다"고 명시했다.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옮겨 다닌 임시정부…광복군은 독립운동 세력 통합에 중점

    (왼쪽) 1945년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기 전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 요인들이 사진을 찍었던 충칭 임시정부 청사는 지난 1995년 복원됐다. 사진은 복원된 청사의 2019년 모습(사진=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김형준 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이보다 한 달 전부터 한반도를 크고 작은 만세운동으로 뜨겁게 달군 3.1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됐다.

    하지만 당시 중국을 침략했던 일본군의 끊임없는 탄압을 피해 항저우·광저우·창사·류저우·치장에 이어 내륙 중심지인 충칭까지 계속 옮겨다녀야 했다. 더욱이 무장독립운동 세력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어 통합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1940년 8월 17일 한국광복군 창군 당시에도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다. 병력이 고작 본부 요원 정도를 꾸릴 수 있는 30여명 규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다음해 1월 무정부주의 성향 무장조직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 5지대로 흡수되면서 한 번에 100여명의 병력이 보충됐다. 나월환 대장이 이끄는 전지공작대 측은 "국군인 광복군에 군사역량을 집중해 이를 발전시켜야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류 이유를 밝혔다.

    이어 1942년에는 김원봉이 좌익 성향의 조선의용대 본대 약 50여명을 이끌고 광복군에 합류했다. 1938년 창설돼 주로 선전공작과 정보수집활동을 하던 조선의용대는 1941년 3월 80% 이상의 병력이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화북으로 이동했고 본대만 충칭에 남은 상황이었다.

    합류 이후 김원봉은 조선의용대가 합류한 광복군 1지대의 대장과 광복군 부사령관을 겸임했다.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군무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5년 국내 침투 위한 '독수리 작전' 추진했지만…일제 갑자기 항복하며 무산

    '독수리 작전'을 위한 특수훈련이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산시성 시안의 중난산(終南山) 자락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모습(사진=김형준 기자)

     

    작전명 독수리 작전.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한국광복군은 국내 침투를 위한 비밀 훈련을 감행했다. 특수 훈련을 받은 대원들을 한반도 곳곳에 잠입시켜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진공 작전을 진행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는 미국 정보기관 CIA(중앙정보부)의 전신인 OSS(전략첩보국)이 참여했다. 기밀해제된 OSS 문건과 백범일지, 현지 증언 등을 근거로 이들은 중국 산시성 시안의 중난산(終南山) 자락에서 훈련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지난해 2월 이 곳을 직접 찾았다. 산세가 험하고 가파른 절벽과 수풀에 둘러싸여 있어, 작전 보안을 위해 일부러 이런 곳에 훈련장을 지은 것으로 보였다.

    당시 광복군의 훈련을 모형으로 재현한 모습(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들은 미군 교관 20명에게 사격과 교량 폭파, 강 건너는 기술 등 야전훈련과 게릴라 전술훈련 등을 받았다. 이들의 임무는 해군기지·병참선·비행장을 비롯한 군사시설, 산업시설, 교통망에 대한 정보 수집이었으며 시설 파괴와 주요 지점 점령, 나아가 차후에는 일본 진입까지 고려됐다. 독수리 작전 계획서에 따르면 이를 위한 1차 진입 목표는 서울과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 등 한반도 5개 전략지점이었다.

    혹독한 훈련 끝에 8월 7일 김구 주석과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이 시안에서 OSS 책임자 도노번 소장을 만나 작전을 실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직후 일본이 항복하면서 독수리 작전은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중국 산둥성 웨이현에서 촬영한 정진대·OSS 사진(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지난 2015년 8월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C-47 수송기 전시회 '70년 동안의 비행' 개막식이 열렸다. 여의도공원에는 정진대원들이 탑승했던 것과 같은 기종의 C-47 수송기가 전시됐다. (사진=황진환 기자)

     

    일제의 항복 사흘 뒤인 1945년 8월 18일 한국광복군 정진대는 미군의 C-47 수송기를 타고 일본군의 무장 해제, 일본군에 징병된 한국인 인수, 국민자위군 조직 등의 임무를 띤 채 서울로 향했다.

    정진대는 8월 18일 오전 11시쯤 서울 여의도비행장(현재의 여의도공원)에 착륙했다. 하지만 무장한 일본군이 "본국으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지 못했다"며 이들을 포위하고 나서, 결국 정진대는 다음 날 시안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충칭의 임시정부 또한 갑작스런 해방을 맞아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의정원 회의(현재의 국회)에서는 국내에서 각계 대표로 구성된 과도정권을 수립해 임정의 기능을 여기로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미 군정으로부터 공식 정부의 지위를 승인받지 못한 채 요인들은 그해 11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물론 시민들은 환영했다.

    이후 1946년 1월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설립되고, 한국광복군은 그해 6월 해체됐다. 혼란스러웠던 정세 속에서 광복군 인사들은 상당수 국군으로 흡수됐으며, 김원봉처럼 일부는 월북을 택하기도 했다.

    ◇외교·선전전, 일본군 탈출한 학병들 모으기도…"독립운동 역사, 가볍게 평가해선 안 돼"

    1943년 7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장제스 위원장을 만나 한반도 독립과 관련해 "힘써 싸우겠다(力爭)"는 약속을 끌어내는 장면을 상상해서 그린 기록화(그림=박학성/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일각에서는 서울 진공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거론하며 국외에서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광복군의 역할을 저평가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광복군이 외교적 노력과 함께 문화와 예술, 선전 등을 통해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는 등 끝까지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 내걸고 분투했다는 사실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943년 7월 26일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각료들은 중국 충칭에서 장제스 국민정부 군사위원장을 만나 "한국의 독립 주장을 지지하고 관철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 결과 장제스로부터 "한국 혁명동지들은 한마음으로 단결해 복국운동(復國運動)을 완성하길 바란다. 중국은 힘써 싸우겠다(力爭)"는 약속을 끌어냈다.

    장제스 위원장은 그해 11월 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을 이집트 카이로에서 만나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해 미국의 동의를 얻어냈다. 하지만 식민지 인도 문제를 염려한 영국 측과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정을 거친 카이로선언 최종 합의문에는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에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한다"고 적혔다. 조건부였지만, 연합국들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것이다.

    (왼쪽) 임시정부 라디오방송의 실무를 맡았던 한국독립당 선전부장 겸 한국광복군 선전과장 故 김의한 선생 (오른쪽)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의 대적방송을 진행했던 故 지복영 지사(사진=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독립기념관 제공)

     

    이뿐만 아니라 충칭의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단파라디오를 이용한 선전전도 펼쳤다. 한국독립당 선전부장과 한국광복군 선전과장을 지냈던 故 김의한 선생,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딸이자 광복군 소속 여군인 故 지복영 지사가 실무를 맡았다.

    김 선생의 아들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과 이화여대 사학과 정병준 교수 등에 따르면 임시정부의 단파라디오 방송에는 주로 임시정부 독립투쟁과 일본군 패전 전황 등이 담겼다. 독립군이 전투에서 올린 전과로 중국 국민정부 장제스 주석이 지원을 약속했다는 내용도 나왔다.

    지복영 지사의 아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병에게 군을 탈출해 광복군으로 오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라며 "음악소녀의 꿈을 갖고 있던 어머니가 우리 동포 청년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데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제는 이러한 방송을 통해 임시정부와 국제 정세 등에 대한 소식이 퍼지자 1942년 말부터 이를 몰래 들었다는 혐의로 경성방송국(현재의 KBS) 직원 40여명 등 모두 150여명을 검거했다. 광복군의 선전전에 위협을 느낀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 내 적지에 직접 들어가 거점을 만들고 모병 활동을 하는 '초모공작'도 이뤄졌다. 지복영 지사도 여기에 자원했는데, 그가 참여한 징모 제6분처 초모공작의 지휘자였던 김학규 장군은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설치해 교포 청년들과 일본군에서 탈출한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과 정신교육을 시켰다.

    이들은 몇 달 동안 교육을 받고 희망하는 임무에 따라 광복군에 배치됐다. 일부는 현지에 남아 교육훈련을 맡거나 적지에 나가 다시금 지하공작을 벌였다.

    당시 임시정부 군무부 보고에 따르면, 1945년 3월 말까지 초모공작에 의해 모집된 인원은 339명에 달했다. 일제 말기 여러 무장조직들이 합류한데다 초모공작의 성과로 광복군의 규모가 대폭 늘면서 군사 작전을 계획할 정도의 규모가 됐다.

    한국광복군동지회장 김영관 지사가 1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군 8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1944년 12월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가담한 한국광복군동지회장 김영관 지사는 CBS노컷뉴스 취재진과 만나 "중학생 시절 충칭에 임시정부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곳으로 탈출해서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기억했다.

    김 지사는 17일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광복군 창군 80주년 기념식 기념사를 통해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하여 힘의 뒷받침이 되었고, 명실상부한 자주적인 군대로서 중국군 산하가 아닌 임시정부의 통수권 하에 있었으며, 특히 우리의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카이로 선언에서, 우리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크나큰 영향을 줬다"며 "광복군 노병들은 세월 따라 불원 사라지겠지만 광복군은 결코 죽지 않고 조국과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도 "제가 어렸을 땐 독립이 우리 손으로 이룬 게 아니라 남이 선물로 갖다 줬다고 배웠다"면서 "하지만 선물은 받을 만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강제병합 전부터 해방되는 그날까지 피 흘리며 싸운 독립운동의 역사를 가볍게 평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이날 서면 축사를 통해 "우리 군은 광복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광복군의 위대한 정신을 계승하고, 6.25 전쟁 당시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다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희생과 헌신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도록 본연의 임무와 역할에 더욱 전념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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