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소녀' 최윤태 감독 (사진=한국영화아카데미 제공)
"전 해보지도 않고 포기 안 해요."
주수인(이주영)은 포기하지 않는다. 고교 야구팀의 유일한 여자 선수가 되기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내가 가고자 하는 미래를 향했다. 이제는 프로야구선수다. 그런데 다들 "안 된다"고만 한다. '여자'라서 안 된단다. 수인은 그런 남들을 이해할 수 없다. 야구는 국가도, 인종도, 세대도 불문하는 스포츠라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포기? 모른다. 미래? 모른다. 수인이 아는 건 나의 꿈 '프로야구선수'다. 이를 위해 해야 하는 것도 안다. 도전하는 거다. 그러한 수인의 도전은 주변을 변화시킨다.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걸 쏟는다. 이게 주수인의 삶이고, 이게 주수인이다.
수인이를 그려낸 최윤태 감독은 영화 개봉 이후 "수인이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다"고 말했다. 지난 24일 오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최 감독을 만나 '야구소녀' 탄생 과정을 들어봤다. 듣다 보니 그가 '현실의 주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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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소녀'를 만들기로 하자 부정의 언어가 쏟아졌다미국 프로농구 드래프트(신인 선수를 선발하는 일) 시즌이 한창이던 어느 날 최 감독의 아내가 야구하는 소녀에 관해 이야기했다. 여자는 프로선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내에게 그 소녀도 프로선수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줬더니 깜짝 놀랐다. 아내와의 대화에서 '여고생 야구선수가 프로선수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야구소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최 감독은 '야구소녀'를 위해 야구 관련 논문을 많이 읽었다. 고등학교 야구선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더 이상 야구를 하지 않는 선수, 화려한 프로 시절을 보낸 후 은퇴한 선수, 초등학교 때까지 야구를 하다가 인프라가 없어 그만두게 된 여자 야구선수, 여자 야구 국가대표 선수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 인상 깊은 건 여자 야구선수들이다. 그들은 야구가 정말 재밌고 야구를 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 에너지가 정말 좋았다. 지금도 가끔 그 기운과 에너지가 생각난다"며 "여자 국가대표 선수들이 출연한 신이 있었는데 영화 리듬에 맞지 않아 최종 편집에서는 삭제했다. 관객들께도 그 에너지를 전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좋은 에너지를 받기도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적도 많았다.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 심지어 여성이 야구를 하면서 프로선수가 되겠다고 하는 스포츠 영화다. 프로선수가 되겠다는 수인을 향해 주변에서 그랬듯이 최 감독에게도 "안 된다"는 부정의 언어가 쏟아졌다.
"상업영화 쪽에서는 여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만들 수 없다고 했죠. 독립영화 쪽에서는 적은 예산으로 스포츠 영화는 무리라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어떻게든 완성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포기하지 않고 완성했죠.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수인이가 프로에 도전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찍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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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 시작까지의 어려움, 캐스팅으로 보상받다제작을 시작하기까지 첩첩이 쌓인 한계와 고정관념을 하나씩 돌파해나갔다. 이를 보답받기라도 하듯이 캐스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최 감독은 "신인 감독이고 장편 경험이 없어서 이런 내 약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배우들과 작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다행히 모두 흔쾌히 한 번에 승낙해 주셨다.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주영, 이준혁, 염혜란, 송영규, 곽동연, 주해은 등 독립영화지만 캐스팅만 놓고 보면 상업영화 부럽지 않게 탄탄하다.
특히 주수인 역의 이주영은 훈련을 통해 최 감독을 비롯한 모두가 놀랄 정도로 수준급의 투구폼을 완성했다. 처음에는 대역을 쓸 생각을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최 감독은 "이주영 배우가 매우 잘해줘서 걱정과 달리 쉽게 갔다. 기본적으로 운동 신경이 좋고 몸을 잘 쓰는 배우였지만, 노력을 정말 많이 해줬다"며 거듭 고마움을 전했다.
그렇게 완성된 '야구선수'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후, 올해 6월 18일 관객들과 정식으로 만났다. 그 사이 배우들은 부지런히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며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배우가 됐다. 최 감독은 "촬영할 때도 많이 의지하면서 했는데 개봉 후에도 많이 의지하고 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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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과 우리의 역할, 그리고 연대의 힘을 말하다'야구소녀'는 주수인의 이야기다. 수인이가 앞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도 성장한다. 양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최 감독은 "주수인이라는 캐릭터를 좀 더 돋보이게 해주고 싶었다"며 "주수인이 성장하는 게 아니라 주수인으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이 성장하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 속 눈여겨볼 지점 중 하나는 감독이 영화 속 여성과 남성 캐릭터를 설정한 방식이다. 최 감독은 시대의 여성상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10대는 주수인, 수인이를 응원하는 진보적인 2030세대는 여자 야구 국가대표이자 일본어 교사인 김 선생님(이채은), 보수적인 4050세대는 수인이의 프로 도전을 반대하는 수인의 엄마(염혜란)다. 최 감독은 "시대의 피해자이기도 한 각 시대 여성을 담고 싶어서 캐릭터를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진태(이준혁), 이정호(곽동연), 수인 아빠(송영규), 박 감독(김종수), 트라이아웃(tryout·연습 경기를 통해 선수의 기량을 직접 확인하고 영입하는 제도) 당시 더그아웃(야구장의 1루와 3루 쪽 선수 대기석)에 있던 남자 선수들 등 수인의 주변 남성들은 결과적으로 수인의 꿈을 응원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감독은 "영화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큰 축 중 하나가 그거였다. 우리의 역할과 연대의 힘"이라며 "흔히 말해 기성세대들이 해야 하는 역할과 약자들의 연대를 성장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야구소녀' 최윤태 감독 (사진=한국영화아카데미 제공)
◇ 보이지 않는 장점을 키우며 편견을 돌파해 나가는 주수인'야구소녀'는 야구를 소재로 하는 성장 영화지만 어떤 성공적인 결과물을 내면서 끝맺음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희망의 끈도 놓지 않는 엔딩이다. 최 감독은 "원래 오프닝과 엔딩을 먼저 써놓고 이야기를 만드는데 '야구소녀'는 엔딩을 정하지 않았다"며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게 수인이에게 좋을지를 모르겠더라"고 밝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라면 수인이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엔딩을 쓴 후 주변에서 말이 많았어요. 그때마다 전 왜 안 된다고 생각하냐고 말하며 확신이 생겼죠. 그러면서도 열린 결말로 간 건, 모든 연출자가 그러겠지만 관객이 극장을 빠져나갈 때 어떤 감정을 가지고 가게 할 것이냐를 고민하거든요. 열린 결말로 해야 관객들께서 현실을 한 번 더 돌아보고, 현실에 사는 주수인들을 응원해 줄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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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수인을 통해 타인이 정해놓은 틀 밖에 있는 것도 장점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그는 "사람들은 다 눈에 보이는 구속만 장점이라고 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볼의 회전력도 장점이 될 수 있다"며 "수인이가 여성이기 때문에 약점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수인은 운동선수로서 자신의 한계에 다가간 것뿐"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건 '편견'이라는 틀을 벗어나는 것이다.
최 감독은 영화 밖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주수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저는 각자가 다 주수인의 열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본인이든 주변 사람이든 주수인의 열정을 가진 모든 이를 응원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어떤 일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말고, 자신이 채워놓은 기준 안에서 최선을 다했으면 해요.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면 좋잖아요."(웃음)<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