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동인동에 위치한 6.25참전 소년소녀병 전우회 사무실 한 켠에 자리한 위령제 사진과 태극기. (사진=류연정 기자)
5일 대구 중구 동인동에 위치한 수십년 된 건물. 에어컨조차 없는 낡은 사무실에는 빛바랜 사진 하나가 걸려있었다.
다름 아닌 6.25 소년병 전사자 위령제 사진.
이제는 백발이 성성해진 그 옛날의 소년병, 윤한수(85) 6.25참전 소년소녀병 전우회 회장은 어렵사리 그 시절을 떠올렸다.
소년·소녀병은 18세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총대를 매고 6.25 전쟁터로 나간 이들을 일컫는다.
학도병과는 다르게 병역 의무가 없는데도 정식 군번을 받아 전쟁에 동원된 군인들로, 최소 3년 이상 군에서 복역했다.
윤 회장은 16살 때에 군에 들어가 전쟁에 투입됐다. 1950년 8월,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등 우리 군 방어선이 낙동강까지 밀렸을 때쯤이다.
군인들이 큰 길목에 서서 성인으로 보이는 남성에게 군 입대를 권유하는 이른바 가두모병이 한창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군 병력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윤 회장은 "심지어 밤에 가정집을 돌며 성인은 아니지만 신체가 건강한 18세 미만 남학생들을 강제로 잡아갔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전선이 낙동강까지 내려온 상황이어서 주로 대구·경북 소년들이 대상이었다.
윤 회장은 동네 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친구 부모님이 눈물을 쏟는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과 미안함을 느꼈고 결국 스스로 모병소를 찾았다.
지금까지 국가가 공식 파악한 소년병은 2천500여명. 실제 투입된 인원 수는 2만 9천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이 고령이어서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소년병은 2천명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대부분이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한 혈투에 젊음을 희생했다.
6.25참전소년병전우회가 출간한 '우리들의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 중 위령제 사진.
소년병은 미처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유년 시절에 잔인하고 황폐한 전쟁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6.25에 참전했던 군인이나 학도병과는 달리 불법적으로 군대에 동원됐지만 어떤 보상도 없었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것은 6.25 전쟁에 참전한 사람 누구에게나 주는 월 20여만원의 참전수당과 위령제 행사 지원비뿐.
단체 운영을 위한 외부 지원은 하나도 없다. 1년에 5만원씩 소년병 출신 일부 전우회 회원들에게 돈을 걷고 있지만 사무실 월세 내기에도 급급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우회 존폐마저 고민하게 됐다.
윤 회장은 "이제 우리가 너무 늙었고 운영비도 없어 전우회를 유지하는 것도 힘이 든 상황"이라며 "올해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겠다. 올해 말에는 전우회 존폐에 대해 이사들과 논의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소년병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은 것에 대한 정부의 사과라고 입을 모은다.
윤 회장은 "이미 보상금을 받을 시기는 지난 것 같다. 우리가 원하는 바는 어린 소년들을 불법으로 차출해 간 점을 인정하고 우리의 공로를 인정해 명예를 지켜달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로한 소년병들이 점차 세상을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전우회까지 없어지면 더 이상 소년병의 공로를 기억해 주는 이가 없을 거라는 우려가 그들에겐 한이 된 지 오래다.
그는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정부가 부모님들께 어린 자식을 잃거나 다치게 해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이미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지 오래기 때문에 당사자인 우리라도 사과를 들어야겠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소년병을 예우하기 위한 입법 움직임은 15대 국회 때부터 추진됐다. 하지만 늘 국회에서 논의만 됐지 법안 통과로 이어진 적은 없다.
지난 수 십년 동안 탄원서를 내고 국회의원을 만나 사정을 알리는 등 발로 뛰어 온 이들은 이제 80대가 훌쩍 넘어버렸다.
윤 회장은 "지금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계류 중이다. 아마 올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다면 끝이 아닐까 싶다"며 "이렇게 오랜 시간 요구했는데도 안 됐던 일을 계속 추진하면 나이 많은 어른들의 추태로 비춰질 것 같아 슬슬 마음을 접어야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대구 중구 동인동에 위치한 6.25참전 소년소녀병전우회.
6일 국토방위에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는 현충일을 맞아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늙은 소년병들은 씁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앞으로 수많은 내일이 남아 있지 않은 늙은 소년병들. 이들은 조금이나마 한을 풀어보기 위해 어떤 단체나 개인의 지원도 없이 '전우회'라는 이름으로 뭉쳐있다.
애써 희망을 버려보겠다는 윤 회장의 주름 많은 얼굴에서 소년병의 아픔과 공로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주길 기다리고 있다는 진심이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