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제주 4·3을 '폭동'이라 부르는 사람들에게



제주

    제주 4·3을 '폭동'이라 부르는 사람들에게

    대흉년 등 악재 속 친일경찰 민간인 발포에 고문까지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봉기 후 군경 무리한 진압작전
    군경 학살 87% 차지…어린이·노인·여성 희생자 32%
    '폭동' 프레임…이승만 전 대통령·미군정 책임 축소
    4.3 역사 왜곡·비방행위 처벌 법안 국회서 통과돼야

    제주 4.3 당시 제주도를 찾은 이승만 전 대통령. 그는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이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진=자료사진)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고="" 기자의="" 사후담="">
    ■ 채널 : 표준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19년 4월 17일(수)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제주CBS 고상현 기자

    ◇ 류도성> 제주지역의 사건사고 뒷이야기를 들여다보고, 행정 당국의 후속 대책을 점검하는 '고 기자의 사후담'. 오늘은 어떤 주제를 들고 오셨나요.

    ◆ 고상현> 제주에서 4월은 가슴 아픈 달이죠. 바로 4.3 사건 때문인데요. 71년 전 군경이 무장대 진압 명목으로 무고한 양민 수만 명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그동안 대통령 사과가 있었고, 추념식이 열린 지난 3일에는 국방부와 경찰청 수장이 4.3에 대해 처음으로 사과했죠. 그런데도 여전히 4.3 관련 기사들에 달린 댓글을 보면 4.3을 폭동이라고 헐뜯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4.3을 폭동으로 볼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4.3을 폄훼하는 내용의 인터넷 기사 댓글들.

     

    ◇ 류도성> 저도 4.3추념식 때 나온 기사들 댓글들을 봤었는데, 4.3을 폄훼하는 댓글의 주된 내용을 보면 4.3은 남로당 무장대가 일으킨 폭동이라는 거예요.

    ◆ 고상현> 네. 사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명이 경찰지서 12곳과 우익 단체 사무실을 공격하긴 했습니다. 그렇다고 4.3을 단 하루에 주목해서 폭동이라고 말했을 때는 4.3을 굉장히 좁게 보는 것입니다. 4.3의 전개 과정은 짧게는 1년 전, 길게는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 류도성>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서도 사건의 배경이 극히 복잡해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죠.

    ◆ 고상현> 네. 그렇습니다. 먼저 해방 직후 제주 상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요. 일제강점기 때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이 귀환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직장을 얻지 못하면서 극심한 실업난에 시달렸습니다. 또 생필품 부족, 콜레라 발발, 대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습니다. 인구 급증과 대흉년이 제주 사회를 사회경제적으로 압박한 겁니다.

    ◇ 류도성> 경찰에 대한 불신과 불만도 제주 사회를 또 다른 의미로 흔들었죠?

    ◆ 고상현> 네. 해방 직후 우리나라는 미군정 하에 있었는데요. 미군정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제주에서도 일제 강점기 수탈에 앞장섰던 경찰과 관리들을 해방 뒤에도 그대로 기용했습니다. 이들의 부정부패가 심해 큰 사회 문제로 부각됐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 발포사건이 터지면서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 류도성>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힌 게 3.1 발포사건이죠.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구요.

    ◆ 고상현> 네. 바로 이 사건이 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는데요.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경찰 반대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경찰 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도 진행됐는데요. 관공서, 민간 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었습니다. 이후 서북청년단의 폭압적 행태, 경찰의 고문치사 사건도 민심에 불을 지폈습니다. 당시 이인 미군정 검찰총장이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 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고 진단할 정도였습니다.

    ◇ 류도성> 이것이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 단독선거 반대 등을 내걸고 경찰지서를 공격한 1948년 4월 3일까지의 상황이군요.

    ◆ 고상현> 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히 4월 3일을 좌익 무장 폭동이 일어난 날로만 단정지어 말하기엔 복잡하고 다양한 4.3의 원인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항쟁으로서의 성격도 무시할 수 없는데요. 친일 경찰의 민간인 총살과 고문,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 서북청년단의 횡포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4.3 사건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녹취 :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 소장] "4.3은 외적 탄압에 대한 저항이었죠. 서북청년단하고 육지경찰들이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취급하면서 깔아뭉개고 들어왔던 것에 대한 공동체적인 저항이었습니다. 또 1948년 분위기가 남북 분단이 가시화되는 상황 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 기치로 내건 민족적 통일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4.3을 항쟁으로 보는 거죠."

    ◇ 류도성> 4.3을 폄훼하는 측에서는 남로당이 4.3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고, 이 과정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를 낳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고상현> 남로당을 빼놓고는 4.3을 이야기할 순 없습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서도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제주사회 긴장 상황을 접목시켜 경찰서를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작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1948년 8월 해주대회에 참석하고, 인민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도 말합니다.

    ◇ 류도성>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건가요?

    ◆ 고상현> 아닙니다. 지금까지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장대는 김달삼 등 지도부의 해주대회 참가 등으로 조직 개편 과정을 겪었습니다. 1949년 6월 7일에는 김달삼의 자리를 이어받은 이덕구 무장대 사령관이 사살됐습니다. 그런데도 정부의 탄압은 계속됐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까지 군경 토벌대의 민간인 학살이 이어졌습니다.

    ◇ 류도성> 무장대 규모도 희생자 수에 비하면 매우 적지 않았나요?

    ◆ 고상현> 네. <진상조사 보고서="">는 4.3 전 기간에 걸쳐 무장 세력은 500명 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썼습니다. 4.3 희생자는 최소 1만 4000여 명에서 최대 3만여 명에 달합니다. 당시 제주도민 10분의 1에 가깝습니다. 만약 남로당이 처음부터 끝까지 4.3사건을 주도했다면 이 많은 희생자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4.3 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묘지에서 한 유족이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자료사진)

     

    ◇ 류도성> 그렇군요. 무장대가 민간인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희생자가 발생하긴 했습니다만, 군경 토벌대의 무리한 진압으로 희생자 규모가 더 커졌습니다.

    ◆ 고상현> 네. <진상조사 보고서="">에 나온 가해별 통계를 봐도 군경 토벌대가 86.1%, 무장대가 13.9%입니다. 희생자 중에는 무장대 활동과 전혀 상관없는 여성, 어린이, 노인 희생자가 많습니다. 여성이 21.3%, 10살 이하 어린이가 5.8%, 노인이 6.1%를 차지합니다.

    ◇ 류도성>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이 이뤄졌네요.

    ◆고상현> 학살 이유도 터무니없습니다. 단지 젊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서북청년단과 경찰에 밉보였다는 이유 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습니다. 이유조차 모르고 희생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4.3 당시 8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된 김평우 씨는 왜 아버지가 죽었는지 7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잘 모르겠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녹취 : 서귀포시 토산리 주민 김평우(79)씨] "아버지는 단지 18세~40세의 남자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군경에게 끌려가 총살됐어요. 무장대 사람이 포섭을 위해 임의로 작성한 명단을 토대로 무고한 사람들을 무장대로 몰아서 죽였어요. 그때 젖먹이 애기도 총살한 걸 보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학살이 이뤄졌는지 알 수 있어요."

    ◇ 류도성> 최근 법원의 공소기각 판결로 사실상 무죄 선고를 받은 4.3수형인 18명의 사례도 보면 당시 정부가 얼마나 무리하게 양민을 탄압했는지 알 수 있었어요.

    지난 1월 17일 법원이 4.3수형인에 대해 사실상 무죄 선고를 한 직후 수형인들이 기뻐하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 고상현> 네. 지난 1월 제주지방법원은 생존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재심사건 재판을 통해 공소 기각 판결을 내렸는데요. 4.3 당시 군사재판 과정에서 수형인들이 변호인의 조력이나 사전에 공소장도 받지 못한 채 진행된 것으로 보고 재판의 불법성을 인정한 겁니다. 두 차례에 걸친 4.3 군법회의로 육지 형무소에서 장기간 수형 생활을 하거나 사형 선고를 받는 등 피해자만 2530명에 달합니다. 수형 생활 중에 총살돼 암매장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 류도성> 그렇다면 학살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요?

    ◆ 고상현> 4.3 당시 미군 보고서 내용을 보면 제9연대는 모든 주민이 게릴라에 도움과 편의를 주고 있다는 가정 아래 민간인 대량학살 계획을 채택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말도 이와 일치합니다. 이 전 대통령은 1948년 10월 23일 남녀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해 반역적 사상이 만연하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습니다. 직후인 11월 제주도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이듬해 봄까지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이 시작됐죠. 이 기간 가장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 류도성> 경고문이 현실이 됐네요.

    ◆ 고상현> 네. 이 때문에 학살을 직접 지휘한 송요찬 등 연대장과 미군정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4.3의 최종책임자로 보는 겁니다.

    ◇ 류도성> 4.3을 폭동이라고 했을 때, 대규모 양민 학살을 자행한 국가와 미군정의 책임이 축소되는 거군요. 그래서 그동안 빨갱이 프레임이 씌워졌던 거고요.

    ◆ 고상현> 네. 잘 지적해주셨습니다. 4.3을 폭동이라 했을 때 군경의 무리한 진압이 정당화 되는 겁니다. 그래서 4.3 직후부터 오랜 군사정권 기간 4.3은 폭동이라는 프레임이 지배했습니다. 이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할 경우 탄압받았죠. 1978년 북촌 양민 학살을 그린 <순이삼촌>을 발표한 현기영 작가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게 대표적인 사례고요. 피해자들과 희생자 유가족은 한을 가슴 속에 오랜 세월 묻어둬야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4.3 70주년 추념식이 열린 4.3평화공원을 찾아 묵념하고 있다. (사진=자료사진)

     

    ◇ 류도성> 지금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방부, 경찰청 사과도 이뤄졌습니다. 또 4.3유족회와 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하기도 했고요.

    ◆ 고상현> 네. 이제 4.3은 폭동이 아니라 엄연히 국가폭력에 의한 양민 학살인 겁니다. 더 나아가 친일 경찰의 횡포 등 불의에 맞선 측면도 있어 항쟁으로도 볼 수도 있고요. 더는 4.3을 폄훼하는 말로 피해자와 유가족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최근 4·3의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거나 비방하는 행위를 강력히 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됐는데요. 이 부분도 국회에서 하루빨리 통과돼야 하겠습니다.

    ◇ 류도성> 지금까지 고상현 기자였습니다.

     

    이 시각 주요뉴스


    Daum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오늘의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댓글

    투데이 핫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