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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충칭, 동포들 듣고있나"…임시정부 라디오방송



사회 일반

    "여기는 충칭, 동포들 듣고있나"…임시정부 라디오방송

    [광복군의 함성④] 미디어 독립운동
    '중국 중앙방송국'서 단파 라디오방송 송출
    동포들에게 "일본에 굴하지 말고 힘 내라"
    일본군 징집 청년에겐 "탈출해 광복군으로"

    중국 충칭시(重庆市) 위중구(渝中区)에 있는 충칭 중앙방송국 건물. 지금은 교육센터와 계열사 사무실로 쓰인다.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자주독립을 위해서라면 군사, 외교, 문화예술, 나아가 미디어를 활용한 선전전까지 동원했다.

    특히 다수에게 빠르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당시 뉴미디어였던 라디오 방송을 주기적으로 국내외에 송출했다.

    ◇ 임시정부 독립투쟁·일본군 패전 전황 생생하게

    중국 충칭시(重庆市) 위중구(渝中区)에 있는 충칭 중앙방송국 건물. 지금은 교육센터와 계열사 사무실로 쓰인다. (사진=김광일 기자)

     

    중국 충칭시(重庆市) 위중구(渝中区) 중산3로(中山3路) 159호. 광파대하(广播大厦)라고도 불리던 충칭 중앙방송국 건물은 수십년 전 새로 건설된 뒤 현재는 계열사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옥상의 안테나와 대형 스크린만이 이곳이 한때 방송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을 만난 방송국 관계자는 "현재는 교육센터가 들어왔고 제작 기능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고 했다.

    임시정부 라디오방송의 실무를 맡았던 한국독립당 선전부장 겸 한국광복군 선전과장 故김의한 선생(사진=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1940년대 충칭 지역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단파라디오를 이용한 선전전을 펼쳤다. 방송 실무는 한국독립당 선전부장과 한국광복군 선전과장을 지냈던 故김의한 선생이 맡았다.

    그의 아들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은 "아버지가 직접 쓴 원고를 날더러 교정을 보라고 했고, 때로는 아버지가 문장을 불러 주면 받아 적기도 했다"며 "경우에 따라 이런 문장은 이렇게 고치면 어떻냐고 건의하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김 회장과 이화여대 사학과 정병준 교수 등에 따르면 방송에는 주로 임시정부 독립투쟁과 일본군 패전 전황 등이 담겼다. 독립군이 전투에서 올린 전과로 중국 장제스(蔣介石) 주석이 지원을 약속했다는 내용도 나왔다.

    지난 22일 CBS노컷뉴스 취재진과 만나 인터뷰하고 있는 故김의한 선생의 아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사진=김형준 기자)

     

    김 회장은 "중국에 임시정부가 있으니 일본에게 굴하지 말고 힘을 내라는 내용이 많았을 것"이라며 "아버지가 원고를 국내로 가져와 보관했는데, 6·25 전쟁 때 소실돼 아쉽다"고 덧붙였다.

    방송은 한 번에 30분씩 진행됐으며 초기에는 주 1차례(목)만 진행하다 이후 3차례(월·수·금)로 확대된 것으로 전해졌다.

    ◇ "학병들, 일본군 탈출해 광복군 품으로 오라"

    임시정부뿐 아니라 그 산하에 있던 한국광복군에서도 같은 곳에서 직접 방송을 진행했다. 광복군 총사령부 심리전연구실 주도로 일본 점령 지역을 상대로 하는 이른바 대적방송(對敵放送)을 한 것이다.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의 대적방송을 진행했던 故지복영 지사(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 방송은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딸이자 광복군 소속 여군이었던 故지복영 지사가 실무를 맡았다. 지 지사의 아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어머니가 굉장히 뿌듯하게 이야기를 하시는 모습을 여러 차례 봤다"고 회고했다.

    이 관장은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학병에게 군을 탈출해 광복군으로 오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라며 "음악소녀의 꿈을 갖고 있던 어머니가 우리 동포 청년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데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CBS노컷뉴스 취재진과 만나 인터뷰하고 있는 故지복영 지사의 아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사진=김형준 기자)

     

    지복영 지사의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에는 방송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진행됐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오후 3~4시쯤 원고가 오면 우리말로 번역해서 방송국으로 가 10시가 넘은 한밤중에 홀로 방송을 했다"고 적혀 있었다.

    ◇ 일제 패색 짙어지던 때 "라디오 방송이 희망을 줬다"

    방송을 통해 임시정부와 국제 정세 등에 관한 소식이 국내로 퍼지자 일제는 방송 청취를 엄격하게 단속했다.

    실제로 1942년 말부터 단파방송을 몰래 들었다는 혐의로 경성방송국(현 KBS) 직원 40여명 등 모두 150여명이 검거됐고, 관련자들은 실형 또는 벌금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병준 교수는 "국내 독립운동가들이 단파방송을 듣고 이를 대대적으로 확산시켜 일제의 후방 안정과 총동원체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줬다"며 "국내 지도자들에게 충칭 임시정부가 연합국과 연대해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고,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배가 분명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부각했다"고 밝혔다.

    이준식 관장은 "방송이 일제 말 이를 듣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남겼다는 점은 분명하다"며 "일제가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거짓 선전을 하던 시절 실제론 일본이 패망한다는 희망을 품게 했고, 때문에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 선언을 했을 때 제일 먼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부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글 싣는 순서
    ※ 총을 들었고, 정세를 읽었다. 임시정부에 모인 선열들은 목숨을 내걸고 자주독립을 그렸다. 주권회복 과정이 일제 패망이라는 외적 요인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다. CBS노컷뉴스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국 충칭과 시안을 찾아 광복군의 피와 땀을 추적한다. [편집자 주]

    ① 광복군 '국내침투' 비밀 훈련장, 절벽에 메아리가 쳤다
    ② 대륙을 흔든 독립운동, '광복군 오페라' 아리랑
    ③ 중국에 '독립 노력' 약속 받아낸 터, 최초 확인
    ④ "여기는 충칭, 동포들 듣고있나"…임시정부 라디오방송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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