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 한글교실 초등반 스무명의 할머니들. 이들은 '순천시 소녀시대'로 불리운다(사진=순천시)
소녀들에겐 꿈이 있었다.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한 소녀는 배고픈 동생들 쌀까지 씹어 먹이며 키우느라 '배워야 할 때'를 놓쳤다. 또 어떤 이는 글자 한자 모르는 자신이 초라해 남몰래 울었다.
옆 집 친구의 등굣길, 나도 한번 책가방 매고 가보는 것, 상점 간판 글씨 또박또박 읽는 일. 아들에게 손 편지 한번 써 보는 일도.
7,80년 동안 간직한 이들의 꿈 이야기를 듣는데 '소녀들 꿈을 이뤘구나' 싶었다. 남들보다는 한참 늦은 나이이지만 한글을 배워, 그림까지 직접 그려 넣은 책을 펴냈으니 말이다. 여기에다 '작가님'으로 불리면서 방송 출연도 하니 이만하면 소녀들 성공했다.
여든 앞서 한글을 공부한 스무명의 할머니들, '순천시 한글교시 소녀시대' 이야기다.
이들은 2016년부터 순천시 평생 학습관에서 3년 간 한글을 공부하면서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그러면서 순천시립 그림책 도서관에서 김중석 그림책 작가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그림일기'를 완성했다.
이 그림일기에는 할머니들의 솔직하고 담담해서 더 아픈, 인생의 응어리가 담겨있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라는 그림책에는 글자를 몰라 시아버지 앞에서 창피했던 이야기, 까막눈이 들통날까봐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다녔던 서러운 이야기, 사진만 찍고 결혼해 웨딩드레스 입는게 소원이었지만 남편의 투병으로 꿈이 깨졌다는 이야기 등 수십 년의 말못할 사연들을 연필로 꾹꾹 눌러 담았다.
순천시 소녀시대가 펴낸 책(사진=순천시)
이들에게 그림 일기 작업은 한맺힌 세월을 씻어내는 작업이었다. 초라함이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황지심 할머니(68)는 "초등학교 4학년 손자가 남편이 속 썪인 이야기를 쓴 내 그림일기를 보고서 '이런 할어버지 따라 사느라 할머니 고생했네'라며 다독거렸다"며 또 한번 눈물을 글썽였다.
김영분 할머니(79)는 "남들에게 글자 모르는거 들통날까봐 사람 많은 곳은 피해다녔 다"며 "이제는 누구도 부럽지 않다"며 웃었다.
하순자 할머니(81)는 "그림 자서전이 생겼다"며 "내 평생의 처음 있는 일"이라며 기쁘다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는게 소원이었다는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운 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이제야 손주가 보낸 편지를 읽을 수도 있고 은행 업무도 혼자서 해낸다.
할머니들의 인생이 담긴 그림 일기는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으면서 출판까지 하게 됐다. 한국을 넘어 외국으로까지 진출하는데 올해 이탈리아 볼로냐 북페어, 미국 뉴욕과 워싱턴DC, 필라델피아 등에서 전시회를 앞두고 있다.
평생을 작가 선생님으로 불리며 방송에까지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며 신기해하는 할머니들, '앞으로의 꿈'을 묻자 한목소리 낸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중학교 졸업장까지는 따야 한다는 것. 그런데 순천시 한글교실 중등반의 인원이 충원 되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한다.
56세 막내부터 86세 왕언니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젊은이들 못지 않다.
장선자 할머니(73)는 "할 수 있을 때까지 배우는 것보다 더 좋은게 어디있겠냐"며 "중학교 졸업장까지 받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전했다.
이들이 최근 펴낸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출판기념회는 16일 오후2시 순천시 그림책 도서관 인형극장에서 열린다. 이 자리에서 소녀시대는 작가로서 싸인회도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