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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시비 옆 한국인 칭송비, 주인공 김가기를 아시나요?



아시아/호주

    두보 시비 옆 한국인 칭송비, 주인공 김가기를 아시나요?

    산시성 시안시 중난산 쯔우골짜기에 있는 '금선관' (사진=인민화보)

     

    당나라는 신라와 문화 교류가 매우 활발했다. 때문에 당나라 유학생 중에는 신라인이 가장 많았다. 당나라의 국교는 도교로 고관대작과 귀족, 관리와 문인들은 도교를 숭배했고,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신라 학생들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가기다.

    9세기 중엽 태어난 김가기는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유학했고 당나라 과거에 급제해 '빈공진사(賓貢進士)'라는 벼슬도 받았다.

    그러나 도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는 관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도교 성지인 종남산(終南山) 자오골(子午谷)로 들어가 수도의 길을 택했다.

    오대십국 시기(AD 907-979년) 남당의 <속선전(續仙傳)>에 김가기 관련 기록이 있다. 김가기는 성격이 조용하고 사치를 싫어했으며 낙관적이고 총명하며 '아름다운 용모'의 미남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는 종남산 자오골에 거주하면서 향을 피우고 도를 닦으며 도교 경전을 공부하는 한편, 진귀한 화초와 과수 재배에도 관심이 많았다.

    3년 뒤 향수에 젖은 그는 조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당나라의 유명 시인 장효표(章孝標)는 친구 김가기를 떠나보내는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시 제목은 <송김가기귀신라(送金可記歸新羅)>로 시에는 '교실(鲛室)' '신루(蜃樓)' '비어(飛魚)' '반도(蟠桃)' 같은 도교의 신화적인 이미지가 가득하다. 얼마 뒤 김가기는 다시 자오골로 돌아와 도를 계속 닦았고, 858년 자오골에서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

    김가기가 세상을 떠난 뒤 사람들은 그의 전기를 두보의 시와 함께 자오골에 있는 큰 바위에 새겼다. 학계는 이 석각의 연대를 북송이나 당나라 말기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석각은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시 창안(長安)구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석각의 정중앙은 너비 1.9m, 높이 2m이고, 제목을 포함해 총 16행이며, 매 행에 19-20자가 새겨져 있다.

    석각의 주요 내용은 김가기의 전기로, 기본적으로 <속선전> 내용이라 <속선전·김가기전>의 개요라고 할 수 있다.

    이 석비는 1987년 시베이(西北)대학교 리즈친(李之勤) 교수가 처음 발견했다. 이후 석비는 중·한 학자들에게 큰 관심을 받았고, 자오골에 있는 '금선관(金仙觀)' 유적지를 찾는 한국 도교계 인사들이 늘어났다.

    2002년 산시성은 '중·일·한 도교학술회'를 개최하고 '김가기 선인(仙人) 기념비'를 세웠다. 2008년 중·한 양측은 김가기를 기념하기 위해 역사 기록에 따라 자오골에 '금선관'을 재건했다.

    이 도교사원에는 최병주 세계금선학회 회장이 쓴 '한국도교조정(韓國道教祖庭)'이 새겨진 새로운 석비가 놓여져 있다. 김가기는 자기가 도를 닦았던 조용한 곳에서 1000년 뒤 중·한 양국이 우호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 기사는 중국 인민화보사에서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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