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 지망생에서 마임이스트 되기까지, 삶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나를 이끌었다
-춘천마임축제 '정체성과 앞날' 걱정
-기성 예술 모방에 만족하는 젊은 예술인들 안타까워
-45주년 기념공연 ‘아름다운 사람’, 4월10일~12일 춘천 봄내극장에서…
■ 방송 : 강원CBS<시사포커스 박윤경입니다>(최원순PD 13:30~14:00)
■ 진행 : 박윤경 ANN
■ 정리 : 홍수경 작가
■ 대담 : 유진규 마임이스트(전 춘천국제마임축제 예술감독)
소리가 아닌 몸으로 말하는 예술,마임 공연 한번쯤은 감상해보셨을텐데요.마임이라는 낯선 분야를 국내에 정착시키기 위해서 평생, 열정을 쏟아부은 마임이스트가 있습니다.바로 마임이스트 유진규 씬데요..시사포커스 목요초대석,오늘은 올해 마임인생 45주년을 맞아 오랜만에 춘천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유진규 씨를 초대했습니다.
다음은 유진규 마임이스트와의 일문일답.
◇박윤경>오랜만에 뵙는다.
◆유진규>이게 몇 년만인가 생각해보니, 4년만이다. 반갑다.
◇박윤경>2013년 춘천마임축제 예술감독직을 내려놓으면서 그동안 소식을 많이 듣지못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
◆유진규>집이 춘천이지만 춘천에서는 구체적인 활동 안 했다. 공연·강연·강습 이런 일들을 전국 다니며 해오고 있다.
◇박윤경>원래는 수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유진규>아주 어릴 때 꿈이 동물과 함께 사는 것이 꿈이었고, 수의학과 가면서 실현이 됐지만, 학교 연극반에 들어가는 바람에(웃음) 이 길로 가게 됐다.
강원CBS'시사포커스 박윤경입니다'에 출연한 마임이스트 유진규(사진=최원순PD)
◇박윤경>연극으로 시작을 했다.
◆유진규>연극을 열심히 했다. 학교에 가면 연극반에 가서 놀고 작품 준비하며 열심히 했다.그러다 학교를 중퇴하고 극단에 들어갔고, 마임을 거기서 만나게 됐고, 마임에 빠지게 됐다.
◇박윤경>마임에는 연극과 어떤 다른 매력이 있기에?
◆유진규>연극은 대사 중심의 표현이고, 마임은 말을 일절 쓰지 않는 몸의 표현이다. 들어갔던 극단은 가급적 대사를 빼거나 절제된 대사만 쓰고 나머지는 몸과 소리로 표현하는 전위 실험극단이었다.
◇박윤경>섬세한 동작들과 표현력이 필요한데, 평소에도 유연하셨나보다?
◆유진규>유연과 표현은 좀 다르다. 몸으로 얼마나 나의 느낌과 생각을 드러내느냐, 아니면 다른 것에 위축이 돼 있거나 거부하면서 드러내지 않느냐의 문제다. 몸이 잘 움직이는 사람이 표현 잘 되는 건 아니다. 나를 얼마만큼 드러낼 것인가라는 마음이 시작이다.
◇박윤경>춘천의 문화예술 공연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유진규 선생님의 마임 공연을 접하지 않은 분들이 없을텐데,원래 춘천에 연고가 전혀 없었던 걸로 안다.이 곳에서 마임을 선보이게 된 계기는?
◆유진규>1981년 결혼 후가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였고, 정치적 억압 상황이었다. 주위 젊은 친구들이 잡혀가고 싸우기도 했는데, 나는 시골로 떠나 다 버리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 정리하고 찾아온 곳이 춘성군 신동면 증사리 삼포마을. 시골에 묻혀 조용히 소 키우며 살았다. 시간이 흘러 다시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오고, 춘천과 마임과 내가 연결됐다.
◇박윤경>소는 잘 키웠나?
◆유진규>(웃음)동물 키우는 건 결국 애정이다. 잘 키워서 도살장으로 보내 고기로 만들어내는 것이 모순됐다는 생각도 가졌지만, 시장에서 송아지 사서 소로 키우는 과정은 생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교감하는 과정이었다.
◇박윤경>지난 1989년부터 2013년까지 25년간 춘천마임축제 예술감독을 도맡으며 세계적인 축제로 키웠다.이 축제가 선생님에게 주는 의미도 컸을 것 같은데?
◆유진규>축제가 시작될 당시가 89년. 마임을 하는 사람이 5명이었다. 주위에서 마임을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 안 할 때인데, 어떻게 하면 마임을 널리 알리며 예술 장르로써의 예술적 자존심을 당당히 내세울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페스티벌을 하자’라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국마임페스티벌이 춘천마임축제로 전환됐다. 목적은 금방 이뤘다. 사회적 지위도 얻고, 연극영화과 교수도 되고.그 다음 고민이 시작됐다. 춘천이라는 곳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과연 축제가 뭘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축제 전반을 공부했다.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군사정권을 거치며 축제를 즐길 수 없는 민족이 되었더라. 축제가 없는 나라가 된 거였다.다시 현대적으로 재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도깨비난장’, ‘아수라장’, ‘미친 금요일’을 하면서 마임과 축제를 현대적으로 살려냈다. 나의 삶과 하나가 돼 큰 그림에서 많은 것들을 이뤄냈다고 생각한다.
◇박윤경>매 축제를 준비할 때마다 에너지를 다 쏟아 부으셨을 것 같다.
◆유진규>손을 놓기 전까지 내 삶이 마임과 마임 축제 자체였다.
대한민국 1세대 마임이스트 유진규(사진=유진규)
◇박윤경>그런 삶이었던 감독직은 왜 갑자기 그만두셨나?
◆유진규>시간 지난 후 돌이켜보면서 결정적 원인은 뭐였을까라고 생각했다. 그 시작은 예술 표현의 자유였다. 요즘도 블랙리스트로 표현의 자유가 많이 거론되는데.그 당시 미친 금요일에 참여하기로 한 작가가 5월말이 축젠데 3월에 박정희 생가에 가서 박정희, 육영수의 기념 촬영 공간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일베들과 조중동이 난리가 났다. 오키드레드라는 여자화가인데, 이 작가가 그 때 분명히 얘기했다. “두 분을 모독하는 게 아니라 이 두 사람을 신격화하는 사람에게 날린 것”이라고. 조중동도 그 자체를 받아들이며 마무리됐다.문제는 그 작가가 미친 금요일 참여 일주일 전에 SNS에 게시물을 또 올린 거다. 미친 금요일을 보러오라고. 호시탐탐 감시하던 일베들이 다시 난리가 났다. 마임 축제와 시청 홈피에 이런 작가를 불러올 수 있느냐고.
나는 ‘뭐가 문제냐?’라고 했다. 미친금요일은 예술 표현 자체를 100% 인정하고 그래서 19금이기도 한데 뭐가 문제냐고 했다. 그런데 당시 축제 이사장이었던 김진태 국회의원과 운영위원들도 작가를 불러오지 말라고 결의했고 시청에서도 공문이 날아왔다. 지금도 얘기하지만 나는 예술감독으로서 예술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지 다른 걸로 예술을 막거나 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표현의 자유는 이미 헌법에 보장돼 있고, 프로그램 자체가 그 자유를 보장하려는 의도로 만들었는데, 그들 말을 수용한다는 건 춘천마임축제의 생명과 프로그램의 생명, 유진규라는 예술감독의 생명을 자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축제를 강행했고, 아무문제 없이 끝났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문제가 여러 각도로 터지기 시작했다. 당시 새누리당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쪽 사람들이 다른 부분들을 건드렸다. 예산남용이라든가. 그런 과정 속에서 더 이상 남아야 하는가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그만두면서 지금 있는 사람도 동반으로 물러나야 마임축제가 새롭게 살아나지 않을까라는 판단이 들어 전격 사퇴했고, 김진태 이사장도 사퇴했다.
너무 성급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있다. 성급했던 것도 사실인데 버텨도 더러운 일로, 예를 들어 횡령이나 사생활로 넘어가는 분위기를 예감했기에 나름 판단을 했던 거다.
◇박윤경>어려운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감독직 내려놓으면서 마임 축제도 전반적으로 위축된다는 평가가 있다. 어떤가?
◆유진규>물론 내가 25년을 해왔고 단계적으로 연착륙이랄까. 이런 상황에서 이뤄질 수 있었으면 이런 문제 안 생길텐데 갑자기 나가고 급조된 팀이 일을 하다보니 (그런 문제가 생긴 듯하다). 춘천마임축제는 행사성 축제가 아니라 예술 축제다. 예술 축제에는 예술이 하나의 중심이 돼 비전을 제시하고 예술적 감각과 가치나 목표를 가지고 이뤄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공백이 온 거다. 매년 행사로써, 행사성 축제로 치러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박윤경>지금은? 몇 해 흘렀는데?
◆유진규>작년 11월에 예술 감독이 그만두고 지금은 사무국장이 대행한다. 이게 일반 행사성 축제라면 괜찮은데, 예술 축제가 예술 감독 없이 치러진다는 건 예술로서 이 축제에 승부를 가리겠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집행부나 이사회가 이 부분에 별로 관심이 없고 행사처럼 잘 치러지면 문제없다는 생각인 것 같아 앞날이 걱정이다.
◇박윤경>강원대 인근에서 ‘빨’이라는 공연장 운영하지 않았나?
◆유진규>마임축제 그만둔 후 춘천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젊은 예술활동을 부추기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강원대 후문 앞 거리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술집 거리인데 문화가 하나도 없다. 홍대, 대학로도 술집 많지만 문화예술이 있다. 여기를 문화예술이 함께하는 거리로 만들자라고 생각해 복합문화공간 ‘빨’을 만들었다. 온통 새빨간 공간으로 만들어 2년간 운영했다.
◇박윤경>왜 접으셨나. 혹시 망한 건가.
◆유진규>쫄딱 망했다. 대학문화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술집이나 노래방은 운영이 된다. 술 마시고 노래하면서 스트레스는 푼다. 그런데, 그 속에 문화나 예술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문화 예술 안 즐기면?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스펙 쌓기에 몰두하더라. (젊은이들이) 문화 예술이 자기 삶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안 갖고 있다. 많은 젊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끌어들이며 얘기 나눈 후 내린 결론이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기성 예술과는 다른 활동을 부추기려 했는데, 기성예술을 뒤따라가는데 목표를 두더라. 자기 작품 만드는 게 아니라 모방 자체를 예술 행위로 생각하는 거다.어쨌든 요즘 대학교가 취직을 대비한 시스템으로 바뀐 게 핵심이다.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 자유롭게 즐기는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렵다.‘빨’도 결국 실패가 됐다.
◇박윤경>그 ‘한’ 때문에 오늘도 빨간 니트를?
◆유진규>속마음에 그런 게 있을지도(웃음).
◇박윤경>자, 마임인생 45년을 기념하는 공연,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얘기도 나눠보자. 다음 주에 열린다고?
4월10일부터 사흘간 춘천에서 열리는 마임이스트 유진규 공연 '아름다운 사람'(사진=유진규)
◆유진규>다음 주 월화수 10일~12일 사흘간 춘천 봄내극장에서.
◇박윤경>이번 공연을 통해서 그간 해 오셨던 작품들을 연대별로 볼 수 있는 건가?
◆유진규>월화수가 연대순은 아니지만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중 7작품 간추렸다. 3일간 매일 다른 작품을 보여드릴 것.
◇박윤경>공연을 준비하면서 45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것 같다. 어떤 마음이었나.
◆유진규>자료도 보고 그 때 사진도 보고 메모했던 것, 그때 쓴 작품들 보면서 45년의 시간이 어제 같더라. 아까 CBS에 들어오면서 4년 만에 봤는데, 금방 본 것 같다는 생각 든 것처럼. 아이러니하게 그 때 생각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지금까지 생생히 살아 연결이 되고 있다.결국 내가 초연한 72년, 스무살에 했던 삶에 대한 고민과 이상이 지금과 거의 다를 게 없다.삶이란 게 뭐냐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며 그때로 돌아갔다. 지금 내 나이가 예순 다섯인데 스무살 때로 순간 이동한 것 같이 그때 몸의 감각과 열정이 그대로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박윤경>지금도 마임에 대한 심장의 두근거림이 살아있다는 것 같다.유진규 선생님에게 ‘마임’이란 어떤 건가?
◆유진규>다시 20대로 넘어가보면 삶의 방황, 그 당시 이러한 삶을 계속 지속시킬 것인가 끝낼 것인가? 그럴 때 만난 게 연극이다. 내 삶을 연극에 걸어보자. 삶을 선택하며 삶 자체가 연극이 되고 그 삶이 마임으로 전환된 거다. 마임에 내 삶을 걸어보자. 마임이 뭐길래? 내 몸을 통해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 존재의 뭘 드러내? 누구나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삶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들, 고민들, 꿈들 이런 것들을 내 몸으로 드러내는, 역으로 내 삶 자체가 마임인.
◇박윤경>나흘 후면, 무대 위에서 춘천 관객들을 만난다.이제 다시 춘천에서 공연하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 건가?
◆유진규>그건 저도 잘 모르겠다. 하고 싶어서 할 때도 있지만 찾아주어야 공연이 이뤄지니까. 4년 만에 춘천시민과 함께 하는 자리 만들게 돼서 고맙게 생각한다.
◇박윤경>많은 분들이 ‘아름다운 사람’ 공연을 찾아주셨으면 좋겠는데, 초대의 말씀도 해주신다면?
◆유진규>(웃음) 이럴 때 마임으로 보여드리면 끝나는데.유진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삶의 과정 중에 제대로 길을 찾아 잘 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는 자리 마련했습니다.다음 주 월화수, 봄내극장에서 만나 뵙길 바랍니다.
◇박윤경>오랜만의 만남 즐거웠습니다.지금까지 마임인생 45년을 맞는 유진규 전 춘천마임축제예술감독을 만나봤습니다.시사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