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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해방의 정치는 사건으로부터 태어난다



책/학술

    알랭 바디우, 해방의 정치는 사건으로부터 태어난다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

     

    촛불 정국에서 ‘정치권’이라 불리는 영역에서 전개된 ‘정치’는 주권자인 시민들의 삶과 의지와는 유리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그곳에 정치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주권자로서 각성하고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이 ‘정치권’의 바깥에서 또 다른 ‘정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신간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에서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정치가 바로 후자의 정치, 즉 시민의 정치이자 해방의 정치이다. 그것은 선거와 의회민주주의로 상징되는 “재현의 정치”가 아니라, 그 “재현의 정치”에 구멍을 내는 “사건의 정치”이다.

    오늘의 정치철학이 선호하는 주제는 ‘정치의 위기’라는 테제이다. 여기서 위기에 처한 정치란 선거라는, 수(數)로 관리되는 체제에 지배되는 정치, 곧 재현의 정치이다. 바디우는 이 책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에서 정치철학의 이러한 경향에 반론을 제기한다. 제도적·구조적 정치의 퇴각을 위기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회복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도적 정치의 회복과 정상화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제도적 정치의 주체성을 거부하고 그것이 가진 한계를 드러내 구멍을 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이 위기는 오히려 해방적 정치가 다시 출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정치를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정치적인 것(le politique), 즉 재현의 정치를 반박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오로지 그것이 사회적인 것의 적절한 재현이라는 점에만 의지한다. 그 때문에 정치적인 것의 이론가들(정치철학자들)에게는 좋은 국가 형태와 나쁜 국가 형태의 구분, 즉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구분만큼 값진 것은 그 무엇도 없다. 그들에게는 전체주의의 대립쌍으로서 민주주의가 갖는 이념적 우월성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만으로는 진정한 해방적 정치를 불러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정치적인 것에 관한 사유의 잔해 가운데 오늘날 크게 중시되는 것은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전체주의에 맞세우는 바람직한 전투이다. 어쨌든, 개념으로서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회적 기능의 경험적 묶음 외에 무엇이란 말인가? 정치적 사유의 세계적인 위기가 서구의 (자본주의적) 체제들이 동방의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인) 체제들보다 유연하며 합의에 적합하다는 이 진부한 사실로 귀착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는가? 정치적 사유가 소중하다면, 그런 방식으로 이해되는 민주주의적 이념은 결코 정치적인 것의 위기의 역사성을 감당할 대책이 되지 못한다. (본문 16쪽)

    “의회적 기능의 경험적 묶음”이며 “서구의 자본주의적 체제들”의 우월성만을 증명하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넘어, 바디우는 실천이라는 표지 아래서 정치의 개념을 내놓는다.
    이렇게 기존 정치철학의 지배적인 흐름에 맞선다는 의미에서, 또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해방적) 정치(la politique)를 사유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은 철학적인 책이자 정치적인 책이지만, 정치철학 책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재현의 정치에만 관련된 정치적인 것에 관한 사유는 이론에 머문다. 혹은 재현의 정치와 관계없는 익명의 일반인들에게는 다른 동네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정치란 재현에 따르거나 혹은 제도에 종속된 정치가 아닌 어떤 다른 차원에 속한 무엇이다. 이 책이 목표하는 것은 정치의 본질에 관한 논의를 경유한 (재현의) 정치에 관한 사유(정치철학)가 아니라, 정치를 하나의 경험으로, 과정으로, 나아가 일종의 물질로 놓는 사유, 어떤 사건 이후 상황 속에 나타난 사건에 충실한 주체들이 구성하는 그러한 진리로서의 정치에 관한 사유이다. 이러한 구도에서 사유는 더 이상 생각이나 공상의 범위에 머물지 않는다. 사유는 실천과 등가화되며, 따라서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적으로 ‘정치는 실천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실천의 가능성이 값없이 주어지는 그러한 정치는 재현의 정치와 대별되는 해방의 정치, 곧 진리의 정치이다. (박성훈, 「옮긴이 후기」 중에서)

    바디우는 정치의 재정초와 관련하여 재현에서 벗어난 비지배의 정치라는 가설과 이에 대한 참여를 정치의 공리로 제시한다. “정치를 하나의 경험으로, 과정으로, 나아가 일종의 물질로 놓는 사유, 어떤 사건 이후 상황 속에 나타난 사건에 충실한 주체들이 구성하는 그러한 진리로서의 정치에 관한 사유”가 필요한 것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급진적인 정치란 이런 것이다.

    근원으로 향하고 필요의 관리를 거부하며 목적을 성찰하는 정치, 정의와 평등을 유지하고 실행하는 한편 파국을 공허하게 기다리지 않고 평화의 시기를 책임지는 그러한 급진적인 정치란 어떤 것인가? 이와 동시에 무한한 과업인 급진주의란 어떤 것인가? 중요한 것은 혁명적인 정치가 본질적으로 끝없이 지속되도록 요청하는 일이다. (본문 128쪽)

    모든 진정한 (해방의) 정치는 상황 안의 특정한 어떤 것, 어떤 공백이나 무로 취급되는 무엇과 결부된 정치이며, 전체를 아울러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쳐 상황을 장악하는 폐쇄성의 정치란 있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한 변증법은 바디우의 말 그대로 실존과 존재의 변증법이다. 하나로 셈하기에 따라 상황 안에 수용되는 실존과 그 실패에 따라 수용되지 못하는 무한히 많은 존재들이 있을 때, 정치는 하나로 셈하기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수용되지 못하여 공백과 같이 취급되는 무한한 존재들을 상황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따라서 정치는 결코 끝나지 않는 무엇이다. (박성훈, 「옮긴이 후기」 중에서)

    ‘하나로 셈하기’ 안에서 권리를 가질 권리를 갖지 못한 존재들, 수용되지 못하고 공백과 같이 취급되는 존재들을 상황 안으로 받아들이는 정치. 바디우는 이 정치의 원자(原子)가 사건에 관련되는 도박적 개입이라고 말한다.

    개입과 함께 이전에는 상황 안에 갇혀 있던 진리가 사건의 형상 속에서 순환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일체화하고 동일시해버리는 ‘하나로 셈하기’라는 지배적 정치 질서에 균열을 내는 개입이 공백을 드러내고, 그 공백의 가장자리는 사건의 자리가 된다. 그리고 거기서 정치가 시작된다.

    정치의 본질은 재현을 배제하고, 강령적인 인식을 결코 외형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전적으로 개입의 그물망으로 물질화하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에 있다. (본문 99쪽)

    직접적인 투사적 형상은 이와 같이 실행 또는 참여의 처지로 끌어내어진다. 투사적 형상은 그 자체로 정치적 실존에 관한 내재적 개념이다. 그 형상은 정치의 비강령적 본질에서 집요하게 추출된다. 누구건 행동하지 않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문 100쪽)

    이 인용문들은 공히 개입으로서의 정치, 참여와 실천으로서의 정치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월호의 정치, 촛불의 정치와 맥이 닿는다.
    정치는 재현이 아니라 주체의 개입을 통해 진리를 생산한다. 바디우가 말하는바 결코 재현될 수 없는 실재가 존재하는데, 파스칼에게 결코 재현될 수 없는 신, 루소에게 위임이나 재현이 불가능한 개개인의 의지, 말라르메에게 시인이나 세계로 재현될 수 없는 시, 라캉에게는 결코 기표로 재현될 수 없는 주체가 바로 그런 실재인 것과 마찬가지다. 국회와 국가기구가 독점하는 재현의 정치가 아니라, 사건의 정치 즉 광장의 정치에서 진리가 생산되는 것이다.

    이 책은 1985년 장-뤼크 낭시(Jean-Luc Nancy) 등이 주도해 개최한 두 차례의 강연회에서 바디우가 발표한 글을 정리한 결과물로, 현실 사회주의의 국가 기구와 공산주의 이념의 스탈린주의적 변질과 왜곡에 직면하여, 진정으로 해방적이고 공동체적인 정치를 향한 보편적 요구는 어떻게 계속 유지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그리고 그 해방적·공동체적 정치의 재구성은 역사적 붕괴의 단계에 이른 마르크스주의의 폐허 위에서 모색된다. 근대 정치적 기획에서 해방의 정치를 표방하는 가장 전범적인 예시가 바로 마르크스주의 정치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재현의 정치와 해방의 정치의 구분이다. 마르크스주의 정치 내에도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그런 만큼이나 분명하게 국가와 제도적 수단으로서의 당에 따른 정치와 이에서 벗어나는 비지배의 정치 사이의 구분이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다른 형태의 재현의 체계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 문제였던 것이다. 바디우에게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완결과 시효만료를 의미하며, 이러한 실패의 형상을 파괴하고, 이 파괴로부터 마르크스주의 정치를, 좀 더 분명하게 말해서 마르크스주의의 외부로서 도래하는 해방의 정치를 수행해야 할 계기가 된다.

    정치는 사건으로부터 태어난다. 여기서 사건이란 지배적 정치 질서와 그 단일성에 균열을 내는 갑작스러운 출현을 의미한다. 갑작스러운 출현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도박을 하는 것과 같으며, 매번 위험천만한 계산이다. 요컨대, 정치는 현실의 탈유대가 실재의 지점을 제시할 때, 그때에만 존재한다. 바디우는 마르크스가 정치의 현실에 실재가 틈입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정치적인 것 안에서 사유를 계속했다는 사실이 갖는 효과에 주목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붕괴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는 사건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한 재구성을 시도한다. 이는 비지배자들이 어떤 명령 없이도 그들의 현존을 발언했으며 또한 그러한 발언이 또 나오리라고 내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 공백, 하나로 셈하기, 상황의 구조, 전정치적 상황(공백의 가장자리 또는 사건의 장소), 사건, 개입 등 이 책에서 제시된 개념들은, 바디우의 주저 '존재와 사건'에서 전개될 사유의 구성요소들을 예고한다. 파스칼, 루소, 말라르메, 라캉 또한 '존재와 사건'이 소개하는 중심인물들이다. 또한 아직 다수의 진리에 관한 구상을 볼 수는 없으나, 정치를 이후에 네 가지 유적인 절차 중 하나로 받아들이기 위한 예비적 사유의 전개를 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초기의 마오주의적 헌신에서 정치 조직(L’Organisation Politique)을 거쳐 최근의 ‘당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arty)에 대한 정교화에 이르기까지 바디우의 정치적 사유가 진화해 온 과정의 한 단계를 볼 수 있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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