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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국면을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비춰본다면?



책/학술

    사드 국면을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비춰본다면?

    신간 '전쟁론', 국내 최초 독일어 원전 초판 완역

     

    사드와 '전쟁론'

    올 여름 '사드 논란'이 한반도를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한국의 안보를 위해 사드를 경북 성주에 배치해야 한다는 박근혜 정부와 사드의 한국 배치를 반대하는 국민 사이의 전쟁. 그렇다, 그것은 '전쟁'이다.

    '전쟁론'에서 클라우제비츠는 말했다. '전쟁은 우리의 의지를 실현하려고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 행동'이라고.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는 자기 나라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미국의 의지를 한국 땅에 실현하고 관철하려고 미국을 대신하여 자국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언급했듯이, 한국의 안전 보장은 미국의 사드 배치 목적에 들어있지 않다. 또한 사드 배치 비용의 상당 부분은 한국 국민이 세금으로 부담하게 될 것이다. 사드 배치에 대해 북한은 남한을 강력하게 위협하고 중국은 남한에 보복을 예고하고 실행하고 있으니 한국의 안보는 오히려 더 불안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사드 전쟁'의 승리자는 손 안 대고 코 푸는(한국 주둔 미군과 미군 시설의 안전을 약간 높이고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 2차 승리자는 안보 불안을 조성하여 다음 대선에서 유리한 구도를 만들려는 박근혜 정부, 1차 패배자는 북한과 중국, 최종 패배자는 한국 국민이 될 것이다. 한국 국민은 사드 관련 비용을 부담하고, 레이더 전자파에 노출되고, 안보 불안을 감당해야 한다. (결국 사드는 미국과 한국의 '국내용'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데도 박근혜 정부가 사드의 한국 배치를 관철하려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무력에서 나온다. 경찰과 검찰의 공권력에서, 물대포나 최루탄의 힘에서, 최악의 경우에는 군대의 총부리에서, 즉 폭력에서 나온다. '자기의 의지를 실현하려고 상대에게 굴복하는 폭력 행동'을 하는 것이 전쟁이니 박근혜 정부는 자국 국민에게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국민이 갖고 있는 힘은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와 시위인데, 박근혜 정부는 이를 '불순세력'과 '불법'으로 규정한다. 즉 국민의 힘이 정부의 힘보다 약하기 때문에 정부의 힘이 국민의 힘을 누르고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정부의 의지(미국의 의지)를 '안보'라는 이름으로 왜곡하여 한국 땅에 사드를 배치하는 것이다.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다(클라우제비츠), 정치는 전쟁의 수단이다(푸코)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정치의 수단'이라고 했고, 클라우제비츠를 전복한 미셸 푸코는 '정치를 전쟁의 수단'이라고 했다. 이들의 인식으로 이제 우리는 정치는 전쟁이고, 전쟁은 정치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전쟁은 국가와 국가 사이뿐만 아니라 국가 내에서도 일어난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의 강대국은 과거에 약한 나라를 상대로 (제국주의) 전쟁을 했다. 그런데 칠레(피노체트), 캄보디아(폴포트), 한국(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의 약한 나라들은 자기 나라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 사드는? 박근혜 정부가 자기 나라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자기 나라 국민을 상대로 치르는 '전쟁'이다.

    '전쟁'에 관심이 없는가? 전쟁이 정치고 정치가 전쟁이라면 우리 주변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는 일이 '전쟁'이고, 그래서 정치다. 물론 박근혜 정부만 국민에게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도 다른 종류의 전쟁을 하고 있다. 출산 거부, 그래서 세계 최저의 출산율은 지금 대다수 국민(이른바 '개, 돼지'들)이 '헬조선'에서 수행하고 있는 '전쟁'이다. 헬조선은 매일 매일의 전쟁에서 패배한 '개, 돼지'들이 부르는 '한국'의 다른 이름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기를 바라는가? 상대가 내 뜻대로 행동하게 하고 싶은가?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정치다. 그리고 정치는 곧 전쟁이다.

    '전쟁론'은 '전쟁'의 관점에서 한국의 정치와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치에 관한 이해의 수준을 높일 것이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안 읽는 책, 읽기는 하지만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 그래서 여전히 이해의 미스테리 영역으로 남아 있던 '전쟁론'이 이번에 출간된 '전쟁론' 번역의 전면개정완역판과 '전쟁론 강의'를 통해 비로소 이해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제까지 우리말로 된 '전쟁론' 번역서(12권)는 모두 일어판이나 영어판의 중역이거나 독어판의 초역으로서 원전 완역이 없는 실정입니다. 또한 모든 번역서들이 공통적으로 어렵습니다. 글이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는 비단 저만의 불평이 아니며, '전쟁론' 번역서를 읽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입니다."- 옮긴이 김만수

    '전쟁론'의 역사적 배경 (발리바르, 「전쟁으로서의 정치, 정치로서의 전쟁」, '전쟁론 강의' 4장, 546~547쪽에서 발췌)"

    "18세기 절대 왕정 시기에 정부 간의 전쟁(Kabinettskriege)은 군사 카스트 [특권 계급]의 지휘 하에 용병, 직업 군인, [모병된] 신병에 의해 강압적으로 수행되었고, 그것의 목적은 이른바 ‘유럽의 균형’ 내부에서 세력 균형을 바꾸고 적대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동반하더라도 정의상 제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함께 개시된 ‘새로운 전쟁’(Volkskriege)은 절대 전쟁이었고, 규모와 폭력의 측면에서 극단으로의 상승을 동반했다. 새로운 전쟁은 인민 봉기에서 처음 나타난 ‘민족의 무장’을 동반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대륙의 헤게모니를 위한 제국주의 도구로 변형했다. 그 후 무장한 민족들은 서로 경쟁하고 싸웠으며, 각자는 민족주의적 비책을 계발했으며, 그들은 자신의 실존이라고 믿는 것을 위하여 싸웠다. 이러한 전개는 전쟁의 세계사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비범한 설명이 담겨 있는 8편에 약술되어 있고, 이것은 뒤따른 시도들의 모형이 되었다. …… 그리고 클라우제비츠의 질문은 명백하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이러한 전개가 비가역적이고 역사는 ‘전쟁의 절대화’를 향한 방향으로 전개한다고 믿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떤 가능성에 의거해 이러한 경향에 저항해야만 하는가? 이런 경향은 민족과 국가의 실존을 위태롭게 하고, 모든 정치적 문제들 중에서 전쟁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게 하며, 결국 정치의 도구인 전쟁에 대한 정치의 최우선권을 파기한다. 여기에서 클라우제비츠 개인이 누구였는지 회고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그는 불안한 귀족 가문 출신의 프로이센 장교로서 (주로 칸트적인) 철학 교육을 받았고, 대적(大敵) 프랑스와 계속 싸우기 위하여 자신의 나라를 떠나는 위험을 무릅썼고 직접적인 외교적 조정보다는 애국적인 관심을 우선시했다. 그는 인민 징병제에 기초해서 19~20세기에 이르러 거대한 군대로 발전할 것을 창안함으로써 프로이센 군대가 민족 군대로 변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개가 군사 카스트와 국가 관료로부터 정치적 결정의 완전한 독점권을 박탈할 가능성에 대해 그가 우려한 것은 분명하다. (나아가 빨치산이나 게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궁극적인 무기이지만, 그들을 활용할 때 사회적 위험성이 동반된다는 점을 우려했던 것도 명백하다.)"

    '전쟁론' 각 부분의 핵심 내용 요약

    '전쟁론'의 방대한 분량에서 전쟁의 본질, 절대 전쟁과 현실 전쟁, 전쟁과 정치의 관계에 주로 관심이 있다면, 제1권 제1편과 제3권 제8편을 먼저 읽을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이론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의 이론이 그전의 이론과 어떻게 다른지, 그의 이론이 왜 혁명적인지 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제1권 제1편~제3편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과 전투에서 인간의 정신적인 요소를 강조했는데, 이는 제1권의 제1편과 제3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와 19세기의 전쟁,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 시대의 전투의 모습, 즉 전쟁의 역사적인 측면에 관심이 있다면, 주로 제1권 제4편과 제2권 제5편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물론 이 외에도 '전쟁론'의 모든 곳에서 그 당시의 전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공격과 방어의 본질, 방어가 공격보다 우세하다는 (역설처럼 보이는) 명제에 대해서는 제2권 제6편의 앞부분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그리고 특히 제6편 뒷부분에서 모택동의 대장정과 베트남 전쟁에 관한 이론적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공격과 방어의 본질과 차이에 대해서는 제2권 제6편의 앞부분과 제3권 제7편이 많은 시사점을 준다.

    미셸 푸코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전복하여 정치를 전쟁의 수단이라고 했는데, '전쟁론'에서 오늘날의 전쟁과 정치를 통찰할 수 있는 실마리는 주로 제1권 제1편과 제3권 제8편에서, 그리고 '전쟁론'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촌철살인의 풍자, 비유, 유머, 지혜에서, 그리고 이를 이해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독자의 역량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

    전쟁은 말 그대로 카멜레온과 같다. …… 삼중성은 다음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로 증오와 적대감이라는 원시적인 폭력성인데, 이것은 맹목적인 본능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개연성과 우연의 도박인데, 이것은 전쟁을 자유로운 정신 활동으로 만든다. 셋째로 정치의 수단이라는 종속적인 성질인데, 이 때문에 전쟁은 순수한 지성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 제1권 제1편 제1장 「전쟁이란 무엇인가?」, 83쪽

    오늘날의 전쟁술에서 사영은 또다시 없어서는 안 되게 되었다. 천막도 완벽한 수송 부대도 군대의 자유로운 이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 1812년의 러시아 원정은 군대가 매우 험한 기후에도 6개월에 걸친 전 행군 동안에 사영을 전혀 하지 않은 드문 예에 속한다. 하지만 그 고통의 결과가 어떤 것이었다고 해도 그런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모하다는 말은 그런 행동을 계획한 정치적인 의도에 훨씬 잘 어울릴 것이다.
    ― 제2권 제5편 제13장 「사영」, 501쪽
    (행군, 야영과 함께 사영이 등장하는데, 사영에 대한 해설이 없는데다 국어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사이트에서도 이 단어의 해설을 찾 을 수 없어 아쉽다.)

    보나파르트의 행동에는 때로 미치광이 같은 극단적인 모험을 하는 열광적인 도박꾼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것도 말할 수 있다. 즉 그와 그에 앞선 프랑스 혁명 전쟁 때의 최고 지휘관들은 식량 조달과 관련된 문제에서 거대한 편견을 깨뜨렸고, 식량 조달은 단지 하나의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목적이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 제2권 제5편 제14장 「식량 조달」, 526쪽

    정치는 전쟁을 수단으로 쓴다. 그래서 정치는 전쟁의 성질에서 나오는 모든 엄밀한 결론에서 벗어나고, 전쟁이 끝난 먼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해 별로 묻지 않고, 단지 바로 다음에 일어나는 것의 개연성을 충실히 따른다. 이 때문에 모든 행동에 심한 불확실성이 생긴다. 그래서 전쟁이 일종의 도박이 되면, 모든 정부의 정치는 이 도박에서 노련함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적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 제3권 제8편 제6장 B.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다」, 995~996쪽

    카알 폰 클라우제비츠 지음 | 김만수 옮김 | 갈무리 | 1128쪽 | 5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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