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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단편소설집 '어비'…"제대로 된 일을 해야 하건만"



책/학술

    김혜진 단편소설집 '어비'…"제대로 된 일을 해야 하건만"

     

    소설가 김혜진이 4년 동안 발표한 단편소설 9편으로 구성된 소설집 '어비'. 이 소설집은 20~30대 청춘들의 불안정하고 임시적인 삶의 절망적 현실을 다룬다.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제대로 된 일’을 해야 한다는 불안감은 소설 속 인물들의 공통된 심리 상태다. “어쨌든 더 나은 일을 구해야 했다. 저도 이제 좀 제대로 취업을 해야죠.” “이렇게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다 보면 가까워질 테고 그러면 제대로 된 업무를 할 수 있겠지. 일다운 일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식의 언급은 「어비」에서뿐만 아니라 매 작품마다 한두 구절씩 찾아낼 수 있다. 지정된 일터, 근무 시간, 보장된 정년, 안정된 임금, 사회로부터의 인정, 개인적 성취감… 무엇보다 그 일이 지금보다 나아야 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끊임없이 좀 더 나은 곳을 찾아야 하는, 하지만 그다지 나아지지도 않는 젊은 세대의 고민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표출된다.

    과거 문학에서 ‘광장’이 정치적 공간이었다면 김혜진 소설에서 광장은 누군가가 생활하는 일상의 공간이다. 작품 해설을 쓴 노태훈 평론가는 ‘광장’을 김혜진 소설의 본토라고 설명한다. “모든 것이 모여 혼잡하게 뒤섞여 있는, 이 세계의 축소판 같은 곳. 투쟁과 저항, 폭력과 억압, 열정과 욕망, 무기력과 절망, 일상과 비일상이 두서없이 출몰하는 그곳에서 김혜진 작가가 보는 곳은 뒤편이거나 구석이다. 광장에서 DVD를 판매하는 사람, 비눗방울을 부는 사람들이야말로 김혜진의 시선에 포착된 광장의 풍경이다.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것이 그곳에 늘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임을 강조한다.” 김혜진 소설에서 광장은 일상이 계속되는 터전이다. 정치적 수평이 실현되는 공간으로 상징되던 광장에서 중심과 멀어진 채 주변화된 서민들의 계층화된 일상이 벌어지는 광장의 모습은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광장의 모습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청년 세대의 풍경을 근거리에서 관찰하기 좋아하는 김혜진 소설이 세대를 넘어 사회와 공명하는 이유다.

    수록 작품 소개

    어비
    일용직을 전전하던 화자가 한때 두 곳의 회사에서 만났던 어비. 말도 없고 사람들과 관계도 맺지 않던 어비를 다시 만난 곳은 인터넷 개인방송이다. 방송을 진행하는 어비는 미련해 보이는 ‘먹방’을 진행하는가 하면 뜬금없는 곳에 찾아가며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자신의 모습을 중계하기도 한다. 시청자들에게 별풍선을 받아 내는 데 열심인 어비의 모습은 현실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풍경이다. ‘나’는 별풍선을 받아 돈을 버는 어비와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일용직 근로자 어비를 일치시키지 못한 채 그의 불분명한 실체 앞에서 아연해진다.

    아웃포커스
    20여 년을 상담원으로 근무한 회사에서 부당하게 해고당한 ‘엄마’는 손수 만든 휴대폰 모형 안에 들어가 1인 시위를 벌인다. 엄마의 시위를 돕기 위해 자리를 비운 ‘나’도 편의점에서 해고당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속도로를 내기 위해 할머니의 산소를 옮기라는 연락을 받은 식구들은 보상금을 받기 위해 묘소를 옮겨야 되는 상황에 놓인다. ‘자리’ 때문에 벌어지는 3대의 상황이 기묘하게 닮은꼴이다.

    한밤의 산행
    한밤중 재개발 지역 철거 용역 두 사람이 취업을 위해 아르바이트하는 시민운동가 학생을 ‘처리’하는 상황이 대화 중심으로 묘사된다. 폭력적 상황이 주는 위협적 긴장감이 ‘근로자’와 ‘취업 준비생’이라는 생활인의 정체성으로 인해 아이러니하게 해소된다.

    치킨 런
    생활고에 시달려 자살을 시도하는 남자와 실수로 그 남자의 집에 들른 치킨 배달원이 서로의 목적을 위해 자살에 담합하는 이야기. 남자의 자살이 한 번에 ‘성공’하면 그의 전재산 50만 원을 모두 가질 수 있다는 제안에 공조를 허락했지만 일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돈의 액수도 줄어든다. 극단적 방법으로 절망을 해결하려는 주인공들의 선택과 희극적이며 필사적인 상황이 현실의 비극을 대조적으로 보여 준다.

    쿵후하는 자세
    직업도 없고 하는 일도 없이 자전거 타고 광장 일대를 배회하며 풍경을 관찰하는 ‘나’.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의 정체를 요구하고, 그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뿐인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설명하며 점점 더 곤란한 상황으로 빠져드는데…

    광장 근처
    모두가 존경하는 그분이 광장에 나타났다. 멀리서 보이는 광장은 사랑과 평화의 가치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한 평등과 개방의 장소다. 한편 안에서 그려지는 광장은 이기심과 무시가 횡행하는, 중심과 주변, 위와 아래가 무한히 구분된 차별과 위계의 장소에 다름 아니다. 프란체스코 교황 방한의 날 광장에서 벌어지는 천태만상을 통해 광장의 본질을 묻는다.

    줄넘기
    연인으로부터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받고 방황하던 ‘나’는 공원에서 매일 줄넘기하는 노인을 만난다.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수백 번씩 줄넘기를 하고 있다는 노인이 들려주는 방법은 '나‘ 또한 줄넘기의 세계에 도전해 보게 만든다. 밑져야 본전! ’나‘는 ’반복의 세계‘를 한번 믿어 보는데…

    와와의 문
    서로 다른 나라 출신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와와’와 ‘나’는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등록한 학원에서 대화를 시작한다. 누구나 관심 가질 만한 거대한 이야기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빗겨나가 하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반면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소소하고 작은 생활 속 이야기들은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이해에 도달한다. 소통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소설.

    비눗방울맨
    ‘나’는 ‘너’의 고양이를 3개월 동안 맡아 키우고 있다. 돌려주려는 계획이 틀어지고 다시 철수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나’는 지나가던 광장에서 벌어진 시위대의 격렬하고 팽팽한 대립 때문에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그때 ‘나’의 시선에 우스꽝스러운 화장을 하고 사람들의 갈등에는 상관없다는 듯 한가롭게 비눗방울을 날리는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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