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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 살인'의 마음을 묻다



책/학술

    '묻지마 살인'의 마음을 묻다

    신간 '죽음의 스펙터클: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범죄, 자살, 광기'

     

    이탈리아의 미디어 이론가이자 사회비평가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수많은 다중살인 사건들에 주목하며 그 끔찍한 광기를 이해해야만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미디어의 역할, 불안과 우울의 정치적 의미, 금융자본주의가 노동에 미치는 역할 등에 천착해온 저명한 이론가인 동시에 68혁명부터 베를루스코니의 미디어 독재에 맞선 저항에 이르기까지의 움직임에 활발하게 참여해온 활동가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사회참여적인 사상가가 범죄와 자살이라는 가장 절망적인 사건들을 들여다보았다. 비포는 자신이 왜 이런 끔찍한 사건들을 들여다보는지 끊임없이 자문하며, 지옥을 견디다 못해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과 죽음을 택한 사람들의 고통에 주목한다.

    비포는 '죽음의 스펙터클: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범죄, 자살, 광기'에서 2012년 「다크 나이트 라이즈」 상영관의 총기 난사범을 비롯해 조승희, 콜럼바인 사건의 범인들, ‘유튜브 살인마’ 페카에릭 우비넨 등 과시적인 다중살인을 저지른 총기 난사범들을 소환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어떤 측면이 이런 괴물들을 키워냈는지 파고든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병폐와 부작용은 이미 많은 책이 지적해왔다. 그러나 이 책은 체제의 그림자를 읽어내기 위해 개인들의 고통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점이 큰 차이다. 구조의 부작용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결국 스스로와 타인들을 파괴하고 만 사람들의 정신적 고통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범죄에 대한 르포르타주, 영화와 소설을 비롯한 예술작품, 역사, 철학, 정신분석학을 넘나드는 탄탄한 지적 사유와 성찰을 통해 비포는 현대 사회의 불길한 징후들로부터 바로 지금 불안과 탈진을 견뎌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이 책은 지난 수십 년간 성장, 인격 형성, 미디어 환경, 노동, 생산, 이주 등 우리의 삶과 일상을 둘러싼 모든 측면에서 일어난 총체적인 변화들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또 이런 변화들이 어떻게 우리를 분열적이고 불안정한 조건에 몰아넣었는지, 그럼으로써 살인, 범죄, 자살과 같은 끔찍한 풍경을 낳고 말았는지를 설득력 있게 분석한다.

    이 책은 인류가 발명한 ‘근대’라는 기획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가를 탁월하게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하나의 사회로서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합의했으며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보호해왔는지, 무엇이 결국 그 약속들을 파괴하고 우리를 끝없는 분열과 착취와 전쟁의 장으로 내모는지에 관해 대단히 통찰력 있고 피부에 와 닿는 설명을 제시한다. 휴머니즘의 태동에서 시작해 지난 수십 년간 벌어진 사건들을 꿰어 마침내 그 전통이 말살되기까지를 한 눈에 보여주는 저자의 내공은 놀라울 정도다. 이런 설명은 최근 브렉시트 사태에서 목격된 급격한 보수화 경향이나 일베를 위시한 인터넷상의 혐오발언 등 우리 곁에서 발견되는 징후들의 의미와 원인을 이해하는 데에 크나큰 통찰력을 제공할 것이다.

    승자독식에 설득당한 젊은이들 핀란드의 요켈라 고등학교에서 학생 아홉 명을 살해한 페카에릭 우비넨은 자기 웹사이트에 「자연선택 신봉자의 선언문」이라는 글을 올렸다.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중 하나인 에릭 해리스가 범행 당일 입은 티셔츠에도 ‘자연선택’이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비포는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시대에 자라난 이 젊은이들이 갖고 있던 승자독식이라는 생각에 주목한다. 이들이 경험한 패배의 모욕과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절망은 우리가 일터에서 매일같이 겪고 있는 성과주의와 소외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미디어의 변화와 디지털화의 영향 범죄 행위의 양상이 예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서 온다. 모두가 자기 생각을 자유로이 전파할 수 있는 유튜브와 SNS의 시대, 팔로워 수와 조회수로 평가받는 소셜미디어의 시대에는 누구라도 순식간에 유명세를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살인과 뒤따르는 자살은 일종의 자기 홍보”가 된다. 대학살을 예고하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자신의 살인 행위를 뒷받침하는 생각을 웹사이트에 게재한 다중살인자들을 통해 비포는 메시지, 미디어, 범죄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범죄의 양상을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젊은 세대의 성장과 학습 과정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쳐 인격의 형성 자체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비포는 비디오게임의 폭력적인 내용 등이 아닌 디지털 자극과 소통 자체가 “부모보다 기계로부터 더 많은 말을 배운” 젊은 세대의 정신에 미친 영향에 주목한다.

    제도화된 범죄와 자살적 사회 비포는 ‘제도화된 범죄’라는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바라본다. 총기 난사나 묻지마 살인과 같은 극악하고 끔찍한 범죄들만이 뉴스가 되지만, 사실 금융자본주의 자체가 범죄를 새로운 정상으로 만들어버린 체제가 아닌가 묻는다. 오늘날 지배계급은 더 이상 과거의 부르주아지처럼 자신의 영토나 공동체에 책임지지 않는다. 금융경제는 오직 디지털 숫자의 형태로만 이익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부도나 파산에서 보상을 얻는 파생금융상품이 보여주었듯 월스트리트로 대표되는 약탈적 금융은 세계의 붕괴에 베팅함으로써 이득을 얻는다는 점에서 범죄적이다.

    정체성이라는 함정과 만연한 혐오 끊임없이 불안정성을 견뎌내야 하고 사회적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유일하게 안식처를 제공해주는 소속감, 즉 국가나 민족 같은 정체성에 매달리게 된다. 이 책은 전 지구적 탈영토화의 시대에 정체성이 어떻게 오인되었으며 타자에 대한 공격성과 혐오로 귀환했는지를 밝힌다. 여성혐오와 이슬람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낸 살인마 아네르스 브레이비크, 9.11 이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 유발한 IS의 발흥, 유럽의 신보수주의를 따라가는 비포의 시선은 오늘날 만연한 타자에 대한 혐오의 뿌리를 설득력 있게 밝혀낸다.

    나날이 제도화되는 범죄는 그 은밀함을 잃고 스펙터클에 접근하고자 한다. 범죄의 가시성은 권력이 가진 효율성과 설득력의 일부가 되었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정복, 속임수, 약탈이 필요하다. 희생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 역시 게임의 일부다. 정복하고 속이고 약탈할 능력이 없는 당신은 유죄다. 그러니 당신은 빚이라는 협박, 긴축이라는 압제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다. (99~100)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경제질서는 적법성과 도덕적 중립성을 상실하고 명백히 범죄적인 체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기업 총수와 행정부가 사이코패스 다중살인자들처럼 행동한다고 말하면 과장이리라. 그러나 단언컨대 이 둘은 모두 그들처럼 자살의 아우라, 그리고 니힐리즘적 시각에 흠뻑 젖어 있다. (105)

    우리가 상상한 사이버문화의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인터넷은 광신과 편협이 부활하도록 만들었다. 정치적·종교적 니치 집단은 자신의 편집증적 공포와 혐오증을 확인받고 안심하려는 의도로 온라인 공간에 들어서는 디지털 종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온라인 반향실(反響室)에서는 실제 사람들이 타자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유령으로 대체되며, 관용적이고 민주적인 토론의 가능성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진다. (148)

    자본은 이제 오랜 기간 노동자의 가용성을 착취하는 데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이제 자본은 일하는 사람의 전반적인 경제적 필요를 감당할 수 있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174

    우리는 노동에 정신 에너지와 기대를 투자한다. 우리의 지적·정서적 삶이 보잘것없으므로. 우리는 우울하고 초조하고 불안하므로. 그렇게 우리는 함정에 빠진다. 매일 같은 동작을 수없이 되풀이할 의무가 있는 산업노동자는 자신을 노동과 동일시할 까닭이 없기에 동료와 연대하는 데 심리적 에너지를 투입할 수 있었고, 따라서 노동자의 정신은 조립 라인을 마음껏 증오할 수 있었으며 매일의 노예노동과는 무관한 생각을 즐길 수도 있었다. 반대로 인지노동자는 창조성의 함정에 이끌려 들어갔다. 자신의 영혼(이들의 활동에서 언어적이며 정서적인 핵심)을 노동과 동일시해야 할 의무 탓에 그들의 기대는 생산성의 협박에 굴복했다. 사회적 갈등과 불만족은 심리적인 실패로 인식되었고, 결국 자존감의 파괴로 이어졌다. (206~207)

    이때 마거릿 대처가 나타나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각자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개인뿐이라고 선언했다. 다윈이 설명한 자연의 기능이 갑자기 정치적 어젠다로 변했다. 다윈이 묘사한 세계에서는 강한 개인이 살아남고 약한 개인이 무릎 꿇는다. 그것이 자연 진화의 잔혹한 법칙이다. 문명이라는 근대적 기획은 이 잔혹한 법칙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려 애썼던 것이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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