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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왜 "삶을 기억하라"고 했을까?



책/학술

    니체는 왜 "삶을 기억하라"고 했을까?

    신간 <망각 교실:니체의 '반시대적 고찰'로 읽는 현대의 한계 논쟁>

     

    인문학자 이동용이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의 내용을 읽어가면서 함께 생각해 보고, 의문점을 풀어 가는 <망각 교실="">을 출간하였다.

    니체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대로 시선을 돌린다. 현대 속에서 고대를 동경하고 있기에 그는 자신의 고찰을 반시대적이라고, 즉 '시대와 대립'을 일삼고 있다고 고백한다.

    작은 행복이든 큰 행복이든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잊을 수 있다는 것'에 의해 실현된다. 망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과 연결된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역사는 사라지고 비역사적인 느낌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 느낌에 의해 망각은 행복의 주인이 된다.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 지고의 황홀경이라 불리는 엑스터시도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간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작동하는 이성 밖으로 나간 상태와 같다. 니체 식으로 말하면 비역사적인 상태다.

    신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중세는 추운 겨울과 같다. 살기 위해 몸을 움츠려야 하는 시대다. 하늘바라기로 일관하는 신학으로부터 삶을 보호해야 하는 시대다. 대지의 의미와 가치를 위기로부터 구해야 하는 과제를 명심해야 했던 시대다. 중세의 추운 바람에 희생이 되지 않기 위해 체온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쇼펜하우어는 그 지혜로 고독한 삶을 제시해 주었다. 많은 학자들이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연관성을 증명하려 시도했다. 그리고 너도나도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의 연결 지점을 찾기 위해 니체가 한 말을 인용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독자다." 모두가 한목소리만을 냈고 모두가 희생을 강요하는 현대 교육의 흐름 속에서 니체는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체는 결코 꾸미려 하지 않았고, 자신을 위해 글을 썼으며, '아무도 속이지 마라, 너 자신도 속이지 마라'고 말했던 쇼펜하우어를 운명처럼 만났고, 그의 독자가 되었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중세 시대에 경고조로 사용했던 말이다. 너도 죽을 테니까,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죽음을 기억하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처럼 죽음 뒤에 가게 될 지옥은 중세적 세계관의 정점이었다. 이에 반해 메멘토 비베레(Memento vivere)는 근대의 외침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인생이 대체된다. 그렇게 삶이 근대의 주제가 되고,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부르짖고, 르네상스의 예술이 꽃을 피웠지만, 당시에는 성경 속의 천사를 그렸고, 성경 속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도교의 그늘 아래 머물렀던 르네상스의 한계였다. 이런 가운데 니체는 메멘토 비베레, '삶을 기억하라'고 외치며 '미지의 세계로의 비상'을 가능하게 하는 용기로 삶에 임하라고 말한 것이다.

    흔히 허무주의라는 말에서 부정적인 느낌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다. 이를테면 청소년에게 삶의 회의나 인생무상과 같은 정서는 좋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모든 것이 끝장난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니체의 철학은 미래를 준비하는 선구자적 철학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인식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이 시작을 알렸던 부분이다. 그리고 그 극복에 대한 열망에서 허무주의가 시작되며 희망을 품고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다.

    책 속에서

    삶의 분위기 , 즉 대기를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 생철학의 목적이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아우라가 삶 전체를 감싸안을 때 모든 것은 황홀경으로 바뀔 것이다. 그때는 모두가 디오니소스가 되어 노래하고 춤을 출 것이다. 생명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울림과 움직임이 자기 자시을 지배하고 있음을 직감하면서. 최고의 순간이 정신과 육체를 영원 속으로 옮겨놓을 것이다. 순간이 영원으로.-241쪽

    "젊은이는 고향을 상실하고 모든 관심과 개념을 의심한다."
    이것이 허무주의적 의심이다. 이런 식으로 의심할 수 있는가?고향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모든 관슴과 개념을 의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관습과 개념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금 이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감이 잡히는가? 니체는 개념까지 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관념을 이루는 온갖 개념들을 포기하라! 그것이 신이 될 수도 있다.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254쪽

    니체는 메멘토 모리를 버리고, 메멘터 비베레를 선택했다.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선택했다. 영생이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니체는 잘 알고 있었다. 삶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게 인생이다. 내일을 모르는 게 산다는 것이다. '미리의 세계로의 비상'을 가능하게 하는 용기로 삶에 임하라는 것이다. 생철학자는 '새로운 식목, 대담한 시도, 자유로운 욕망'으로 살라 한다. 자유롭게 살라 한다. 자유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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