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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 한 톨이라도 남기거나 버려선 안 된다. 벌 받는다’는 어르신들이 하는 말씀은 이제는 틀렸다.
우리의 역사요, 문화이다시피 한 쌀을 이제 버려야만 할 지경에 처했다. 밥알 몇 톨을 설거지통에 버리는 게 아니라 수만 톤 또는 수십만 톤의 쌀을 바다에 쏟아버리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한 농촌지역 국회의원은 27일 국회에서 “묵은 쌀을 바다에 수장하는 방법은 어떠냐”고 농림부 장관에게 물었다.
쌀이 권력이고 돈이던 시대, 금쪽 같이 여기던 시대를 부지불식간에 지나 이제는 쌀이 돌처럼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현재 묵은 쌀 재고량은 무려 85만톤이나 된다. 쌀 재고량은 지난 2013년 21만톤이었으나 지난해 풍작을 이루는 바람에 54만톤이나 추가되면서 급격히 증가했다. 쌀 재고량이 늘어나는 이유는 WTO 협정에 따른 쌀 의무수입량(40만 8천톤)과 풍년이 계속된데 따른 것이기도 하다. 이런 쌀 재고량이 올해 말쯤에는 100만톤이 넘어서게 된다. 대풍의 결과다. ‘풍년의 저주’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쌀값 폭락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자 정부가 20만톤을 수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농심은 타들어간다. 이 정도 규모로는 쌀 값 하락을 막을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농민단체 회원들은 27일 오후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정부의 쌀 대책에 항의하며 벼 낱알들을 길바닥에 뿌리기까지 했다.
농민들의 항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쌀 보관 비용이 만만치 않다. 쌀 재고 10만톤을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연간 316억원으로 추산된다. 올해 기준으로 쌀 보관 비용만 2,686억원에 달하며 2016년엔 3,000억원에 육박한다. 쌀 보관 창고가 부족할 정도다.
정부가 사들인 묵은 쌀은 가공용과 주정용, 사회복지용, 해외원조용, 교도소 급식용 등으로 쓰인다. 이런 데 사용하더라도 쌀 소비가 줄면서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 벼 가마니는 매년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990년 이후 쌀 재배 면적은 줄고 있으나(년간 1.8%씩) 1인당 쌀 소비량은 2.5%씩 감소했다.
정부가 쌀 관세 유예조건 철회 방침을 세웠더라도 쌀 재고량은 줄어들 가망이 별로 없다. 5~6년 흉년이 들면 모를까…
묵은 쌀 재고량을 줄일 다양한 대책들이 제기된다. “쌀을 바다에 던져버리자”라거나, “해외원조용으로 쓰자”, 또는 “가축 사료용으로 허용하자”라는 등 백가쟁명식 방안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반대 여론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쌀을 수장시킨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고, 가축용 사료 제안도 영글지 않은 아이디어다.
쌀과 역사를 함께 해온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조상들로부터 욕먹지 않으면서도, 더욱이 민족의 미래를 위한 방안이 무엇일까? 묵은 쌀을 북한에 보내는 것이다.
북한에 쌀을 주면 군사용으로 쓰인다거나 김정은 집권 세력이 쌀을 권력의 유지 수단으로 악용한다는 등의 논란이 있다. 특히 보수 세력은 퍼주기라며 대북 쌀 지원을 반대하고 있다. 극악무도한 전체주의 국가·정권에 쌀을 준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는 세간의 주장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천안함 폭침 이후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정부의 입장도 일리가 있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북한에 흉년이 들었거나 수재를 당했을 때 인도주의적 대북 지원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해 대북 쌀 지원을 결정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들어 대북지원이 끊겼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조차 이런저런 조건을 붙여 대북지원을 했다. 쌀을 때론 대북 협상용으로 활용했다.
작금의 경우는 과거와 좀 다르다. 남아도는 쌀이 골칫덩어리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농업을 포기할 수 없다. 쌀을 포기해선 안 되는 이유로 ‘식량 위기의 가능성’과 함께 환경보전 차원이다. 세계적으로 곡물 소비량은 연간 2%씩 늘어나는 데 비해 곡물 생산량은 0.7% 성장을 보이고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20년 후에 심각한 식량위기가 닥칠 전망이다. 따라서 농업을 시장경쟁에 방치하는 정부는 지구상에 없다. 쌀 농사를 짓는 중소농가를 보호하는 정책을 펴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