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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진짜인가 가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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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학술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진짜인가 가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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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기상의 역사산책 122] 조국해방을 위해 투쟁한 독재자의 젊은 시절

    북한의 화가 정관철이 1948년에 그린 <보천보의 횃불>. 보천보 마을을 습격한 김일성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김일성의 신격화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탕! 탕! 탕! 탕!"

    1937년 6월 4일 밤 10시,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 대원 90명이 압록강변에 있는 보천보 마을을 습격했다. 이들은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를 향해 기관총 2정으로 총격을 가했다. 놀란 일본 경찰 5명은 제각기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김일성 부대원들은 주재소의 무기고에서 경기관총 한 자루와 소총 6자루, 권총 2자루, 탄약 수백 발을 탈취하고 불을 질렀다. 다른 부대는 농사시험장과 소방서,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했다. 또, 여러 점포와 잘 사는 집에 침입해 현금과 물자를 빼돌렸다.

    이들은 "우리는 만주에서 온 동북항일연군 대원들인데 여러분을 위해 조선독립운동에 분주한 사람들이니 군자금을 내라"고 요구했다. 부대원들은 2시간 동안 마을을 장악한 후 전단을 뿌리고 철수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보천보 전투'이다.

    북한 역사교과서는 당시 김일성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보천보의 횃불>그림처럼 일장 연설을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의 일급 참모이자 같은 부대원이었던 최현(1907~1982)은 세월이 지난후 "도망가기도 바빴는데 무슨 대중연설을 해"라고 부인했다고 한다.

    1998년 10월 동아일보 취재단이 방북했다. 김병관 당시 동아일보 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준 선물. '보천보 전투'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판(1937년)을 순금 인쇄판으로 제작했다. 이 순금판은 현재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 남한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전투 소식은 6월 5일 저녁부터 두 번이나 발행된 동아일보 호외를 통해 조선은 물론 중국 전역에도 알려졌다.

    호외 1호는 <함남 보천보 습격·200여 명 돌연 내습>이란 제목으로 "4일 오후 11시 30분경 함남 국경 보천보에 200여 명이 내습해 우편소를 방화하고 면사무소, 보통학교, 소방사무소를 습격·방화했다"고 보도했다.

    호외 2호는 <보천보 습격 속보-추격 경관과 충돌·양방 사상 70명>이란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호외는 "5일 오후 1시경 압록강 건너 13km 지점에서 오카와 부대 30여 명의 경관과 김일성 일파 200여 명이 충돌했는데, 경관 측에서는 즉사 4명, 부상 12명, 김일성 부대에서는 즉사 25명, 부상 30명을 내고 격전 중"이라고 보도했다.

    과장이 있었겠지만 김일성 부대도 철수하는 과정에서 전투를 벌이다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보도로 인해 25살에 불과한 김일성이란 독립군 부대 지휘관의 이름은 조선인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이 된다.

    ◇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떠돌고 있는 '김일성 가짜설'

    북한 노동신문은 김일성 별세 20주년이 되는 2014년 7월 8일을 앞두고 김일성의 젊은 시절 사진을 공개했다. 해방 직후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그는 33살의 젊은 청년이었다. (사진=노동신문)
    저명한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란 칼럼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1987년 6월항쟁 이후 현대사 강의를 많이 다녔는데, 무슨 얘기를 하든 첫 번째 질문은 신기하게 똑같았다. '김일성, 진짜인가요? 가짜인가요?'. 그러다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김일성 가짜설' 같은 천박한 이야기를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일이 적어졌다."

    '김일성 가짜설'이 유포된 것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서 시작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을 기대했던 군중들에게 뒷머리를 바짝 치켜 깎은 '시골뜨기 청년'의 모습을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 이때부터 '가짜설'이 급격하게 번져나간 것이다.

    중국의 상하이나 미국과는 달리 만주벌판은 젊은이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한 중국인이나 조선인 모두 10대 말에서 30대 초반이었다. 그나마 항일무장투쟁을 이끈 지도자들 가운데 김일성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살되거나 투항해버렸다.

    그러면 김일성은 언제부터 항일투쟁에 몸담았을까. 모든 문헌과 증언을 종합하면 김일성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만 20살이 되는 1932년 만주 안투현의 오지에서 3~4명의 동지들과 유격대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여러 독립군을 전전하다 중국공산당이 만주의 중국인과 조선인을 연합해 조직한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한다. 여기서 무훈을 세운 김일성은 1936년 가을이 되면 간도의 장백산 일대에서 제2군 제6사장 자격으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다. 이때부터 소련으로 퇴각하는 1941년까지가 독립군 김일성의 전성시대가 된다.

    ◇ 동지의 변절과 굶주림, 추위에 시달리다

    1930년대 앳된 소년 같은 동북항일연군 북만 지역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당시 항일연군 지휘관들은 20대 청년들이었다. (사진=재중동포작가 김혁 블로그)
    1940년 3월 25일 김일성 부대는 만주의 안투현 대마록구 서쪽의 고지에서 추격하는 마에다 중대를 공격해 이 부대를 전멸시켰다. 120명이 사살되고 20명이 겨우 살아남아 도망갔다. 마에다 부대의 현충비를 읽어보자.

    "조각난 비적들이 산야에 잔존해 있지만 일거에 그들의 목을 잘라 그 피를 묘앞에 붓겠다. 살아있는 우리들은 맹세코 그대들의 복수에 나서겠다."

    김일성 부대를 죽이는 일이 일본제국의 공통된 목표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동북항일연군 전체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 김일성이 두려워한 것은 일본군이 아니었다. 더 무서운 것은 굶주림과 추위와 동지들의 배신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일성 부대는 살아남았다.

    그러면 김일성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부하에 대한 장악력과 통솔력이었다. 일본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가 저술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을 들여다보자.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김일성 부대에 잠입한 밀정 지순옥은 이렇게 군에게 보고했다.

    "이 부대가 사기왕성하고 단결력이 있는 것은 군지휘 김일성이 맹렬한 민족적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고, 또 완건과 통솔의 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부 파괴에는 김일성을 재기불능하게 만드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긴요하다."

    완건(頑健)이란 젊다는 것과 뛰어난 육체적 힘을 말하는 것이다.

    ◇ 일본군의 토벌작전에 쫒겨 소련으로 피신하다

    1943년 10월 5일 소련군 88여단의 야전연습북야영에서 촬영한 대원들. 맨 아래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일성이다.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토벌작전에 들어가자 김일성 부대는 소련으로 퇴각했다. 적시에 퇴각한다는 것은 유격대 지휘관의 중요한 능력이다. 이들 부하들은 해방 후 지금까지 김일성의 소중한 지지기반이었다.

    소련은 1940년대 들어 만주에서 들어오는 중국인과 조선인 유격대원을 환영했다. 이들을 곧 시작될 일본과의 전쟁에서 써먹을 생각이었다(1941년 소련은 동북항일연군을 주축으로 한 88독립보병여단을 창설한다. 소련은 이 부대를 국제홍군 제88특별여단으로, 중국은 교도려(敎導旅)로 불렀다. 전체 600여명 중 조선인은 150여명이었다 -편집자 주).

    연해주에서 김일성 부대는 훈련만 받고 제대로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지 못했다. 소련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과의 전쟁에 휘말린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을 두려워했다. 결국 김일성 부대는 그저 소련과 일본과의 전쟁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1945년 8월 7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스탈린은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린다. 이틀 후인 8월 9일 국경을 넘은 소련군이 만주 하얼빈에 입성했다. T-34 탱크에 오른 소련군을 만주인들이 환영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 부대는 소련측의 반대로 끝내 만주나 조선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구경만 해야 했다.
    마침내 소련군이 1945년 8월 9일 새벽에 만주와 조선, 사할린을 침공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김일성 부대를 전투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이 전쟁의 주역은 소련군이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과 평양 주둔 제25군 북조선 정치사령관 레베데프(Nikolai Lebedev, 1901~1992)소장과의 대화가 재미있다. 생전에 레베데프 소장이 중앙일보 취재팀에게 밝힌 대화내용을 들어보자.

    "김일성: (레베데프)장군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빨치산 부대도 일본과의 해방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해주십시오. 우리는 여러번 이 전쟁에 참전할 수 있도록 하바로프스크 사령부에 건의했으나 번번이 좌절됐습니다.

    레베데프: 그게 무슨 말인가? 조선을 해방시킨 것은 소련의 제25군과 태평양함대 뿐이다. 제88정찰여단 빨치산 부대의 단 한 명도 대일본전에 참전하지 않았고 총 한 번 쏘지 않았다. 절대로 역사를 바꿀 수 없다."

    천연덕스럽게 '역사를 조작하자'고 건의한 33살의 소련군 소속 조선인 대위가 앞으로 어떻게 한반도 역사를 바꿀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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