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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동지애 사라지고 구타·왕따 日잔재 횡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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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외교

    광복군 동지애 사라지고 구타·왕따 日잔재 횡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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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완의 해방, 끊긴 광복군脈] ②자발적 의지로 대일항전, 中과도 통수권 투쟁

    광복 70주년인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이던 한국광복군 창설 75주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광복군은 구한말 의병과 만주 독립군의 역사를 이어받은 대일 무장항쟁의 주역이었다. CBS는 3회에 걸쳐, 자랑찬 광복군의 명맥이 국군에 제대로 계승됐는지 점검하고 대안을 모색한다.[편집자 주]

    지난해 6월 21일 강원도 동부전선 GOP서 총기난사 후 도주해 구속된 임 병장이 현장검증을 받고 있는 모습.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지난해 2월 윤모 일병이 군내 가혹행위로 숨졌다. 넉 달 뒤인 6월에는 임모 병장이 집단 따돌림 등에 앙심을 품고 동료 부대원들에게 총기를 난사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참으면 윤 일병, 터지면 임 병장'이란 말이 회자되며 폭압적 병영문화가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실제로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새정치민주연합 임내현 의원)를 보더라도 최근 5년간 육군내 폭행 및 가혹행위, 폭언 사건은 연간 200~400여건씩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폭행사건은 2010년 292건, 2011년 423건, 2012년 305건, 2013년 301건 등이며 가혹행위는 같은 기간에 3건, 20건, 16건, 7건 등을 기록했다.

    군내 폭력의 원인과 배경은 다양하다.

    징병제 자체의 강제적 특성이 밑바탕을 이룬 가운데 첨예한 군사 대치 상황에서 오는 병영 스트레스와 병역자원 부족으로 인한 문제 사병의 입대 가능성까지 다각도로 거론된다.

    하지만 폭압적 병영 문화를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로 연결 짓는 시각은 별로 없었다.

    물론 구한말이나 그 이전 시대의 우리 군대도 이런 면에선 결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동료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 만큼 비인간적인 가혹행위를 하고, 일본말인 '이지메'로 더 먼저 알려진 왕따(집단 따돌림)까지 하는 악습은 일본군의 유산임이 분명하다.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은 "식민지 청년들을 동원하고 다루기 쉽게 하기 위해 폭력적 방식이 사용된 것"이라며 "그 잔재가 일본군 장교 출신자들을 통해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와 그 하수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센징(조선인)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세뇌전략도 여기서 기인한다.

    피 끓는 조선 청년이 일제의 강압에 쉽게 굴복할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이를 살짝 비틀어 조선인은 본디부터 말이 통하지 않는 족속 취급하고 열등감을 심어주려는 간교한 책략이다.

    일본인 장병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천황을 위해 죽으라는 일제 군대 자체가 폭압 덩어리였다.

    다만 조선인 청년들을 폭압 구조의 맨 밑에 집어넣음으로써 자국 병사들의 불만과 스트레스를 잠재우려 했을 뿐이다.

    ◇ "천황 위해 죽어라" 일본군 폐습이 친일세력 통해 유전

    이 같은 일본군 폐습은 해방 후에도 친일세력이 국군 주도권을 잡으면서 청산되지 않았고, 오랜 군사정권까지 거치면서 마치 우리 군의 유전자인 것처럼 들러붙게 됐다.

    일본 육사나 그 괴뢰국인 만주국 육사 출신에다 심지어 독립군 소탕에 앞장섰던 민족 반역자들, 또는 군사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은 정통성 없는 인물들이 군을 통수하기 위해선 마찬가지로 폭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천황을 위해 죽기를 강요받았던 것처럼 이번엔 독재자에 대한 무조건 충성이 요구되면서 자국민에게 총을 겨누는 광주항쟁 같은 비극도 벌어졌다.

    표명렬 전 육군정훈감은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책에서 국군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를 '간부 위주, 생명 경시, 사병인권 무시'라고 지적했다.

    군내 폭력은 전투력 면에서도 마이너스 요인이다. 겉으로만 복종할 뿐 실제 전투에선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알 수 없다.

    때문에 미군을 비롯한 선진 군대는 오히려 장병들의 인권을 철저히 보장함으로써 실전적 전력 향상을 꾀한다.

    중동의 군사강국이자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이스라엘군의 '후츠파' 정신은 유명하다. 획일적 사고나 절대적 복종보다는 창의적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미군 역시 '명분 없는 전쟁'인 베트남전에서 '아군 살해'(fragging)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겪은 바 있다.

    한국군의 많은 예비역 병사들이 "훈련보다 내무반 생활이 더 힘들었다"고 회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 중 일부는 "실제 전쟁이 나면 아군 손에 죽을 사람도 많을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군내 폭력에 따른 증오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 광복군은 자발적 결사체…사병제일주의 전통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의 후예인 광복군. 김구 주석(첫줄 왼쪽에서 8번째)의 왼쪽이 지청천, 그 왼쪽이 김학규 장군이다. (사진=사진작가 권태균 제공)
    그렇다면 국군이 뿌리를 두고 있는 광복군의 병영 문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불행히도 이에 대한 객관적 기록 등은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다만 전문가들은 광복군이 자발적 결사체임을 감안할 때 수평적 연대감이 강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단국대 한시준 교수는 "광복군은 일본 육사 출신도 있고 중국 군관학교 출신, 신흥군사학교 출신, 장준하 같은 학병 출신 탈출병까지 모여 의무가 아닌 자발성에 근거한 조직이었다"고 말했다.

    백범 김구의 비서였던 김우전 광복군동지회장도 "나도 일본 군대에 있어봐서 아는데 (구타나 가혹행위는) 일본 군대의 악습이다. 광복군은 그렇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광복군 참모장과 초대 국방장관을 역임한 철기 이범석 등은 해방후 창군 초기에만 해도 '사병제일주의'에 입각한 정병 양성을 강조했다.

    ◇ 광복군, 中의 견제와도 투쟁…3년 교섭 끝에 군사주권 쟁취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 물려받아야 할 광복군의 위대한 유산은 따로 있다.

    광복군은 암울한 식민지 시기인 1940년 9월17일 중국에서 창군됐지만 철저히 자주성을 지켰다.

    창군 비용도 외국에 손을 벌리지 않고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의 애국헌금 4만원을 사용했다.

    물론 남의 나라 땅에서 군사활동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비록 대일항쟁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는 있었지만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군대는 끊임없는 견제와 통제를 가했다.

    결국 광복군은 무기 조달과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 중국군에 통수권이 예속되는 '광복군 9개항 행동준승'을 불가피하게 체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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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임시정부는 중국과 3년 가까이 집요하게 협상을 벌여 행동준승을 폐기하고 군사주권을 되찾았다.

    광복군이 1943년 영국군과 합동으로 버마 임팔전선에 참전한 것이나 1944년 미군과 합작해 한반도 상륙 침투를 위한 OSS 특수훈련을 받은 사실 등은 이런 피맺힌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시준 교수는 "중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인데도 임시정부 요인들은 독립성과 자주성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쟁취해냈다"며 "지금은 엄연히 자주 독립 국가인데도 (전시)작전권을 갖고있지 못하다는 것은 임정과 상당히 비교가 된다"고 말했다.

    언필칭 세계 10위권 국가로 성장했다고 큰 소리 치면서도 군사주권의 핵심인 전시작전권 반환은 미루고 또 미루는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것이 광복군 정신을 계승하는 첫 단추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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