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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킬링필드'…지워진 '학살의 역사' 직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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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판 '킬링필드'…지워진 '학살의 역사' 직시해야"

    [노컷 인터뷰] '국민보도연맹 사건' 다룬 다큐 영화 '레드툼' 구자환 감독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다큐 영화 '레드 툼' 스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그날부터 인민군이 점령한 경기·강원 지역을 제외하고 한강 이남에서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소집·구금 조치를 취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할 명목으로 조직된 관변단체였지만, 구성원 대다수는 이념과는 거리가 먼 일반 시민·농민들이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이들을 즉결처형했다. 희생자가 수십 만 명에 달했던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다.

    오는 9일 개봉하는, 보도연맹 사건을 정면에서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툼'의 연출자 구자환(49) 감독은 1일 CBS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건을 연구한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당시 최소 23만 명에서 많게는 43만 명까지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보도연맹원들을 그냥 놔두면 인민군에 동조하거나 부역할 것이라는 이승만 정권의 비뚤어진 판단 아래 자행된 집단학살이었다"고 전했다.

    ▶ 레드 툼,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 영화 만들기와 함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기자 생활을 하면서 2004년 당시 경남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에서 유골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를 갔다. 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 유골이었는데, 그때 이 사건을 처음 접했다. 사건 자체가 끔찍하고 참혹했는데, 이를 몰랐다는 게 부끄럽고 세상을 속고 살아 왔다는 생각이 들더라. 사건 당시 마을 주민들은 학살당한 이웃들을 땅에 묻는 부역까지 해야 했다.

    그 이후 주민들은 마을 밖에서 이와 관련한 얘기를 한 번도 한 적 없고, 유족들 역시 소위 '빨갱이'로 몰릴까봐 한마디 말도 못하고 지냈다고 한다. 1961년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보도연맹 전국 유족회 간부들을 군사재판에 넘겨 사형까지 시키고, 전국 각지의 유골 발굴 관련 자료도 모두 불태웠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기사뿐 아니라 카메라로 촬영을 하면서 보도연맹 사건을 알리려 애써 왔다. 유족들을 자주 만나면서 그분들의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들었다. "어떻게든 세상에 알리라"는 것이 그분들의 당부였다. 그때는 그분들께 해드릴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번에 영화를 내놓게 됐다.

    ▶ 직역하면 '빨갱이 무덤'이라는 직설적인 제목을 붙인 이유는.

    = 레드 툼은 한국전쟁 당시 빨갱이로 몰려 죽어갔던 이들의 무덤을 찾아가면서 보도연맹 사건을 알리는 영화다. 이러한 영화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전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사건의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정도만 나왔을 뿐, 집단학살이 어떤 계통을 거쳐 이뤄졌는지 등 구체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당시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단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는 단체까지 나온 지금 상황에서 "당신들이 추앙하는 그 세력이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보라"는 의미도 품고 있다.

    다큐 영화 '레드 툼'을 연출한 구자환 감독

     

    ▶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

    = 지금도 일각에서 '국부'라 칭송받는 이승만 정권이 대한민국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던 사건이다. 식민지 해방 뒤 미군정을 등에 업고 들어선 이승만 정권은 기반이 약했다. 당시 전국에서 민중봉기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한국 사회를 개조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아래, 일제강점기 사상 전향자들로 꾸려진 단체인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을 그대로 모방해 보도연맹을 만들었다.

    당시 좌익 활동을 했던 이들은 지식인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은 보도연맹 가입을 피해 달아나거나 하면서 극히 일부만 가입을 했다. 보도연맹은 1949년 전국 조직으로 확대되는데, 그러다보니 각 지역별로 인원을 할당해 채우라는 지시가 위로부터 내려온다. 농민들에게 "가입서에 도장을 찍으면 대출도 해 주고, 농기계도 빌려 준다"는 식으로 할당량을 채운 것이다. 그렇게 보도연맹의 구성원 대다수는 영문도 모르고 가입한 시민과 농민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보름 간격으로 모아서 사상전향을 명목으로 한 교육을 했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니까 정권은 보도연맹원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이대로 두면 인민군에 동조하거나 부역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이승만 정부는 인민군이 점령하기 하루 이틀 전에 교육을 받으러 오라고 소집을 해 학살했다. 그렇게 제사를 지내다가, 논밭을 매다가, 친구를 따라갔다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 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들이 이념보다 당장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민간인들이었다는 점은 몹시 충격적이다.

    = 이제 늙을 대로 늙으신 유족분들은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하신다. 몇몇 분에게 들은 당시 이야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야기를 해 주시는 분들이 다 다르고 지역도 다르지만, 10년 전에 만났던 유족들이나 최근에 만났던 분들이 모두 똑같은 참상을 말씀해 주신다.

    나름 대학물까지 먹었다는, 역사 공부를 했다는 저조차도 10여 년 전에야 보도연맹 사건을 접했다. 지금 젊은이들은 더욱 모를 것이다. 서울의 한 대학 역사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레드 툼 상영회를 한 적이 있다. 제목만 보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툼 레이더' 정도를 생각하고 왔던 학생들이 깜짝 놀라더라.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이었지만, 보도연맹 사건을 들어본 친구는 1, 2명에 불과했다.

    다큐 영화 '레드 툼' 스틸

     

    ▶ 2004년 4월에 촬영을 시작해 10여 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 제작비 문제가 가장 컸다. 이 영화만큼은 제대로 만들어 유족 할머니들 소원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팀을 꾸려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이 컸던데다, 중간에 제작비를 구하려다 실패도 맛봤다. 기자 생활까지 병행했으니 시간이 물 흐르듯이 지나가더라. 언제라도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컸다.

    그러던 중 지난 2012년 김두관 경남도지사 시절 보도연맹 사건이 지역 사회에서 이슈가 됐던 적이 있다. 그때 도에서 예산을 들여 한국전쟁 당시 학살 매장지를 찾아다녔는데, 조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영화 작업이 더 늦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족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면서 이 사건을 증언할 분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다. 너무 놀랐고 그때부터 '큰일 났다' 싶어 뛰어다녔다. 제작비도 없는 상태에서 차에 기름만 있으면 유족들이 계신 곳으로 갔다.

    ▶ 영화의 초점이 인물보다는 사건에 맞춰져 있는 모습이다.

    = 촬영을 하면서 이 영화의 방향을 어떻게 가져갈까 고민이 많았다. 처음에는 인물 중심으로 기획했다가 바꿨다. 발굴된 유해와 함께 '퇴임'이라 쓰인 도장이 하나 나왔는데, 그분의 유족을 찾아다니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족 할머니 두 분이 영화에 나오는데, 그분들이 연세가 많으시다보니 이동에 어려움이 컸다.

    더욱이 많은 유족분들이 겁을 내시고 자신을 피해자라고 드러내지 못하셔서 인물 중심으로 가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2005년 진실화해위가 만들어진 뒤 꽤 많은 유족들이 존재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녀들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걱정해 밝히지 않는 분들이 훨씬 많다.

    ▶ 당시 민간인 학살은 전국적으로 벌어진 일인데, 영화의 배경을 경남 지역에 한정한 이유는.

    = 물론 처음 기획할 때는 전국을 배경으로 하려 했다. 대전 이남의 모든 지역에는 학살지가 있었으니까. 초반 전국을 돌면서 자료를 모으다보니 제작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촬영을 하면서 경비를 마련했으니 밥 먹을 돈으로 차에 기름을 넣어 유족분들을 찾아다니는 게 일이었다. 그분들이 차려 주시는 밥상이 아니었다면 굶고 다녔을 것이다. 이 영화는 경남 지역에 한정돼 있지만, 결국 전국에서 벌어진 참극에 대한 함축성을 지닌 것이다.

    ▶ 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가 최소 23만 명에서 많게는 43만 명에 달한다고 이 영화는 전하고 있다.

    =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보도연맹이라는 이름만 꺼내도 빨갱이로 낙인을 찍었다. 정확한 진상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매장지가 168곳으로 추정되는데, 진실화해위원회가 5년간 활동하면서 찾아낸 게 13곳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 사건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따를 수밖에 없다. 희생자를 가장 적게 잡는 학자가 23만 명, 많이 잡는 이가 43만 명이다. 사건 이후 빨갱이로 낙인 찍혀 죽을 것을 두려워해 호적을 버리고 몸을 숨긴 집안도 많다. 유족회에서 판단하기로는 피해 신고를 한 유족은 전체의 10%도 안 된다.

     

    ▶ 영화 매체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 저는 영화 전공자가 아니다. 제가 의경 출신인데, 1987년 민주화항쟁 때 진압단으로 투입됐었다. 사회·정치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진압을 다니던 중 당시 대구역 앞 중앙파출소에서 시민·학생들에게 포위된 적이 있다. 시위는 데모꾼들이나 하는 거라 여기던 때였으니, 일반 시민들이 나섰다는 데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의경 출신이 경찰 조직에 들어가기가 쉬웠다. 하지만 뿌리치고 나와서 '도대체 이 세상이 뭐가 잘못됐는지' 책을 뒤져 현대사를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학생운동을 했고 구속까지 돼 취직이 쉽지 않았다. 10년 동안 돈을 벌어보겠다며 영업 일을 했지만 1998년 외환위기를 이겨내지 못했다.

    너무도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인생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에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마음을 먹고 영상 작업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색깔론'은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레드 툼을 내놓으면서 감회도 남다를 듯한데.

    = 제가 경남 창원에 산다. 제작비 마련이 어려웠던 데는 관의 지원이 빠진 것도 컸다. 정치인들 역시 빨갱이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해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사건을 알려야 하는 제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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