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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업고 대한민국 군대를 갖고 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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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을 업고 대한민국 군대를 갖고 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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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기상의 역사산책 99 ]'빨갱이' 소탕한다며 추잡한 공작을 벌인 김창룡

     



    “탕~탕~탕~탕~탕~탕”

    1956년 1월 30일 아침 7시 30분,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21번지 자혜병원 앞. 출근길에 갑자기 6발의 총성이 울렸다. 괴한 2명이 김창룡 육군 특무부대장(소장)이 탄 지프 문을 열고 권총을 난사했다. 3발의 총탄 중 2발은 김 소장의 가슴을 관통하고 1발은 턱에 명중했다. 다른 2발은 운전사 박 중사를 맞췄다. 김 소장은 즉시 적십자병원을 거쳐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

    국군의 실세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있는 김창룡의 암살소식은 세상을 발칵 뒤집었다. 놀란 이승만은 소식을 접하자마자 적십자병원으로 달려와 유해를 살펴본 뒤 그 날짜로 김창룡을 중장으로 추서했다. 이어 담화를 통해 애도의 뜻을 표한 후 빠른 시일 안에 범인을 체포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군은 전국에 비상계엄망을 펴고 수사에 착수했다. 또 전군 장병의 휴가와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전쟁이나 내란 상태도 아닌데 이런 조치가 내려진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범인은 한달 후 검거되었다. 김창룡 밑에서 특무부대에 근무했던 허태영 대령의 지시로 특무부대에서 일하는 민간인 송용고와 신초식이 결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허태영은 검거되는 순간 “내가 했다. 하나에서 백까지 모두 내 책임이다. 송용고와 신초식은 상관인 내 명령에 따랐을 뿐이므로 그들을 닦달하지 말라”고 외쳤다. 허태영은 재판 내내 정치군인. 친일군인을 처단한 것은 명예로운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창룡(오른쪽). 이승만은 모든 정치공작의 하수인으로 김창룡을 부려먹었다.

     

    재판 도중에 이 사건의 배후 인물로 공국진 준장과 강문봉 중장이 체포돼 구속 기소되었다. 재판정에서 허태영은 김창룡의 악행을 이렇게 고발했다.

    “김창룡은 일제시대 북만주에서 악질 일본헌병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애국독립투사를 투옥했다. 중국에서 연합국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할 때는 포로를 학대한 친일전범이다. 그는 월남한 후 공산당을 쫒는 군 정보기관에서 근무한 것을 계기로 개인적 영달을 위해 혈안이 되어 행동했다. 그는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숙청을 되풀이하여 공산당원 1에 대해서 양민 10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혔다. 김창룡이 취급한 사건 전부가 허위날조했거나 침소봉대한 것이다.”

    강문봉 중장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김창룡은 직속 상관인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을 무시하고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따위의 월권을 자행했다. 비위사실의 보고 내용도 사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김은 정보를 군사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세력 확장에 이용했다. 또 지휘관 사이를 이간시켜 장성들을 분열시켰다. 특무대는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지휘관들을 감시하는데 열중했다. 특무대는 육군의 암적인 존재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김창룡은 대한민국이 세워지면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인간 쓰레기'일 뿐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허태영은 교도소에서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사형수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홍섭 판사를 만나게 된 데서 시작되었다.

    대자의 무덤을 찾아가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는 김홍섭 판사의 생전의 모습

     

    김 판사에 대한 평화신문의 보도를 읽어보자.

    “감옥에 갇힌 수인들에 대한 김홍섭의 전교활동은 1956년 10월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김홍섭은 우연히 담당하던 재판의 참고인으로 허태영 대령을 만나게 되었다. 허태영은 ‘김창룡 암살사건’의 주범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갇혀 있었다. 그해 1월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김창룡 소장이 출근길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허태영 대령과 그의 부하들이 주모자로 잡혔다. ‘정의를 위해 거사했다’는 허태영은 중죄인답지 않은 의연함을 보였다. 그런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김홍섭은 그를 찾아가 가톨릭 신앙을 권했다. 당시 36살이던 허태영은 죽기 전 천주 알기를 진정으로 원하여 몇 번의 만남 끝에 스스로 마태오라는 본명을 정하고 영세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신자로서 형장에 선 허태영은 당당하고 깨끗하게 최후를 맞아들이며 대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 군부내 공산주의자를 소탕하면서 이승만의 눈에 들다

    제일 오른쪽 끝이 김창룡. 그 왼쪽이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 장군.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으로 올라서는 이후락이다.

     

    한국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1951년 5월 초, 이승만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김창룡 대령 알잖소. 여러분들~ 김 대령을 자식처럼 사랑해주세요. 그는 정말 애국자요. 그가 어제 지리산 공비들이 부산에 들어와 무기를 사가지고 관에다 넣고는 상복까지 업고 상여처럼 매고 위장한 채 지리산으로 가는 걸 붙잡았소. 이 얼마나 애국자요.”

    이승만은 흐믓한 미소를 짓더니 김창룡 일행을 들여보내라고 했다. 일개 대령을 국무회의 석상에 부른다는 건 온당치 않다고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만류했지만 김창룡 일행은 이미 우르르 몰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들은 국무회의실 바닥에 압수했다는 무기들을 늘어 놓았는데, 도무지 살상용으로 쓰일 것 같지 않은 고물들이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모든 게 조작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는 이 사건은 기다리던 ‘물건’이었다. 그는 부산에 빨치산들이 출몰했다는 급보를 발표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는 헌병대를 동원해 국회의원들을 버스채 납치해서 그가 원하는 직선제 개헌안을 강요한다.

    40여명의 국회의원이 탑승한 통근버스가 검문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헌병대로 연행되고 있다. 헌병대에 끌려간 국회의원들은 ‘국제공산당 사건’이란 해괴한 간첩사건을 들이미는 수사관들에게 시달린다.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국회의원 서민호가 훗날 증언했다.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은 대구형무소의 중형수들을 빼내 공비로 위장시켜 부산의 금정산에 나타나도록 쇼를 벌이고 이들을 사살했다. 이승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부산지역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이승만이 ‘이론’을 제공하면 김창룡은 이를 ‘실천’했다. 김창룡이 이승만의 눈에 들게 되는 ‘군부내 공산주의자 숙청’만 해도 그렇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터지자 김창룡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숙군 작업이 벌어졌다. 얼마나 무자비한 수사였는지 미래의 대통령이 될 박정희를 포함한 4,000여 명의 장교와 사병들이 처벌을 받았다.

    당시 전체 군 병력의 5%에 달하는 규모이다. 문제는 김창룡의 수사 방식이 자신이 속했던 일본군 헌병대가 써먹은 방식, 즉 고문에 의존하는 수법이어서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낸 것이다. 고문의 고통을 못이긴 장병이 친구들 이름을 대면 그 친구들이 끌려와 또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국방부가 발행한 <한국전쟁사>1편을 읽어보자.

    “조사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고, 신문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의 결과 동기생이나 또는 술친구들의 자백에 말려 끌려 들어간 무고한 장병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사례가 많았다. 사형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만세를 부르다가 총살을 당했다.”

    김창룡 덕분에 6.25가 터지자 북한에 동조한 국군이 한 명도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당연한 결과이다. 김창룡을 사살한 허태영 대령 말대로 “공산당 1명 죽이려고 불쌍한 양민 10명을 죽였으니….” 김창룡이 저지른 조작사건을 열거하려해도 너무 많아 쓰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1950년 4월 14일 공산당이란 이유로 경기도 수색 화전 사형장에서 총살되기 직전의 국군 장병들

     

    . 그의 수사 스타일을 알 수 있는 한 예를 들어보자. 헌병사령관을 지낸 신상철의 회고이다

    “한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 법무관이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왔다. 알아 봤더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인민군 노래가 흘러 나와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이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사양하면서 그러더라는 것이다. ‘아는 노래라고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하니, ‘그거라도 해라’고 해서 생긴 소동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치다보니 부대원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다.”

    이런 인물이 부하들한테 사살돼 아직까지 국립묘지에 묻혀 있으니 참 서글픈 일이다. 김창룡이 묻힌 곳은 국립대전현충원에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씨와 백범의 장남 김인씨의 묘와 마주보는 곳이다. 김창룡은 백범의 암살과도 어떻게든 관련된 인물이다.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는 언제나 해결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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