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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과 녹차의 도시 시즈오카현을 가다

 

"이 시간 현재 시즈오카현(靜岡縣)의 방사능 수치는 38에서 39나노시버트입니다. 서울은 80에서 90나노시버트를 기록중입니다."

매일 아침 여행 안내자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시즈오카현의 방사능 수치를 알려주었다.

지난 3월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사고지역으로부터 300km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방사능 노출에 민감한 여행객들의 우려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하는 현지인들의 배려가 느껴졌다.

아무튼 서울의 수많은 빌딩숲과 차량들이 뿜어내는 방사능 보다 이곳의 방사능 수치가 낮다는 소식에 여행객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시즈오카현은 일본 열도의 중심 혼슈, 그 혼슈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은 시즈오카현은 신칸센을 타고 동쪽으로 도쿄까지 약 1시간, 서쪽 오사카까지 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어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일컬어진다.

2년 전 후지산 시즈오카 공항이 개항하면서 일본 지방 공항으로는 유일하게 아시아나 항공과 대한항공이 매일 운항하며 한국과 일본의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 있다.(쓰나미 이후 대한항공은 주3회 운항-편집자 주)  

◈후지산, 녹차의 도시 시즈오카 

시즈오카현을 대표하는 명물은 단연 일본의 최고봉 '후지산(3776m)'이다.

화산으로 생성된 후지산은 주변에 산맥이 없이 홀로 불쑥 솟은 독립봉이어서, 사방 어디에서나 후지산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육지 외에 태평양 바다 위에서 후지산의 위용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은 시즈오카현이 유일하다.

시미즈항구에서 에스파르스 드림 페리를 타고 이즈반도의 도이항구까지 가는 바다 위. 수심 2500m가 넘는 바다 위에서 해발 3700m가 넘는 후지산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는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여름철인 7~8월은 거의 눈으로 덮여 있는 후지산에 올라 100만 년전 화산 폭발로 생성된 호에이잔 화산과 화구 근처를 트래킹할 수 있는 시즌인데, 정상까지 오르는 등산로 4곳 가운데 3곳이 시즈오카현을 출발지로 한다.

후지산 못지않은 시즈오카현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녹차다.

후지산 시즈오카공항이 있는 마키노하라 대지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녹차밭을 보노라면 이곳이 일본 녹차 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으리라.

초록색 융단을 깔아 놓은듯한 '그린피아 마키노하라'에서는 차의 제조과정 견학은 물론 전통방식의 녹차 따기 체험과 녹차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집 안에 조그만 텃밭만 있어도 녹차를 손수 재배하고, 집을 방문하는 손님에게 녹차 먼저 대접한다는 이 지방 사람들의 전통은 오카베의 교쿠로노 사토(옥로차의 마을)에 있는 효게쓰테이(瓢月亭)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녹차 중에서도 최고의 상품인 옥로차를 생산하는 시즈오카현의 오카베는 교토의 우지, 후쿠오카의 야에와 함께 일본 3대 옥로차의 산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오카베의 교쿠로노 사토에 있는 효게쓰테이는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다도의 예법을 가르치고 옥로차와 가루녹차인 말차를 마셔볼 수 있는 곳이다.

효게쓰테이(瓢月亭), 즉 상서로운 기운을 뜻하는 표주박과 달의 모양을 형상화 한 장식품으로 가득한 표월정에서 전통 의상을 입고 다도를 시현하는 모습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경건해짐을 느꼈다.

이날 다도를 시현한 오오타니 선생은 "새순의 부드러움을 오래 유지하고 아미노산, 카테킨 등의 성분을 풍부하게 응축할 수 있도록 햇빛을 차단한 상태에서 새순을 더 키웠다가 수확하는 것이 옥로차"라고 했다.

아울러 "일반적으로 떫은 맛의 여느 녹차와 달리 끝맛이 달고 빛깔, 마시는 느낌에 있어서 옥로차를 따라 올 차가 없다"고 덧붙였다.

좋은 녹차의 생산도 중요하지만 차를 우려내는 수질과 시간, 물의 온도, 물의 양에 따라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녹차의 맛을 낸다고 하니 그 과정 하나하나가 득도의 과정이요 진리를 깨우치는 여정이다.  

 

◈열차를 타고 산 속을 달리다 

시즈오카현에서 증기기관차를 타고 깊은 산림으로 떠나는 기차여행은 색다른 즐거움을 만끽하는 여행 속 여행이다.

Steam Locomotive의 머릿글자를 따서 SL이라 불리는 이 증기기관차들은 제작된지 60년이 넘어 움직이는게 신기할 정도지만 시즈오카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SL은 가나야~센즈구간(39.5km)과 센즈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미나미 알프스를 관통해 이카와역에 도착하는(25.5km) 2개의 구간을 매일 정기적으로 운행한다.시속 30km 내외의 속도로 달리는 기차의 차창 너머로 울창한 산림과 녹차밭 등이 빚어내는 바깥풍경에 여행자들은 비로소 여유를 찾는다.

출발지 역에서 구입한 도시락을 흔들거리는 기차 안에서 먹는 재미도 남다르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무인 간이역들, 열차 안 천정에 붙어 있는 선풍기와 좌석 옆 벽면의 붙박이 재털이(지금은 모든 객차가 금연석이다-편집자 주), 위 아래로 여닫을 수 있는 창문.

여행객들은 추억에 젖고 향수에 취한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오쿠오이코조역에서 잠시 내려 레인보우 브릿지를 따라 호수 위를 걷다보면 실패한 첫사랑의 추억이 떠오르고, 이에야마역에서는 하얀 눈과 한 중년의 철도원(일본 영화 '철도원'의 촬영지가 이에야마역이다-편집자 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 철도원이 전하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여기가 아닐까.  

 

◈문학 속 여행지 이즈반도

시미즈항에서 페리를 타고 스루가만을 가로질러 도착한 이즈반도는 일본 문학의 숨결을 느낄수 있는 곳이다.

일본 문단에서 가장 일본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의 무대가 이즈반도 가와즈시에 있는 일곱개의 폭포, 가와즈 나나다루이기 때문이다.

이즈반도는 예로부터 온천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시즈오카현에서도 동쪽, 그러니까 동경과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대도시의 귀족과 부자들이 이즈반도의 온천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특히 이곳의 온천은 대부분 바닷가 부근에 위치해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즐기는 온천욕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가와즈시를 비롯해 아타미, 도가시마 온천, 작은 교토를 느낄 수 있는 1200년 역사의 온천 슈젠지 등 이즈반도 곳곳이 유명 온천지로 가득하다.

이즈반도의 서쪽 도가시마 섬은 '이즈의 송도'로 불릴만큼 절경을 자랑하는데, 특히 해질녘 저녁 노을의 풍광이 일품이다.

또한 슬픈 사랑의 전설이 전해진다는 산시로지마 섬은 간조 때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바닷길이 열리는 톰보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후지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후지노미야시에서 맛본 후지노미야 야끼소바는 시즈오카현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듯 했다.1930,40년대 일본 동북지방에서 이곳에 일하러 온 노동자들이 야식으로 즐겨 먹었다는 후지노미야 야끼소바는 오랜 보관이 용이하도록 면을 쪄서 만든다.

가난한 노동자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고기나 계란 대신 양배추와 멸치가루, 돼지고기 찌꺼기 등 싼 값의 식자재를 쓰지만 그 뛰어난 맛 때문에 지금은 이 지방을 대표하는 최고 관광상품으로 인기를 모은다.

평범하면서 서민적이고 소박하면서도 결코 멋을 부리지 않는 후지노미야 야끼소바의 그것은 시즈오카현의 매력과 매우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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