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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시내의 '열애',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김종찬의 ‘당신도 울고 있네요’ 등 80~90년대 주옥같은 히트곡으로 가수와 대중의 사랑을 받은 작곡가 최종혁 씨.
그가 대중음악계를 떠나 뮤지컬 시장에 뛰어들어 1993년 뮤지컬 '동숭동 연가'를 시작으로 1997년 '빅토르 최'로 뮤지컬 대상 음악상을 수상했고 '정글북' '한여름 밤의 꿈' '어린왕자' '헤라클라스' 등 10여 년간 수십 편의 작품을 통해 뮤지컬계의 거목으로 우뚝 섰는데요. 또, 아이들을 좋아해서 ‘내 동생 곱슬머리’ 등 동요도 많이 만들었죠.
최근에는 경기도 광주 작은 시골로 들어가서, 한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즐거운 노래로 쉽게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열심이라고 합니다.
그가 한글사랑에 빠진 이유는 뭔지, 시골 생활의 기쁨은 어떤 것인지 4월 16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도시가 싫어 6년 전 시골로 들어가[BestNocut_R]▶ 경기도 광주에는 언제 들어가신 거예요?
6년 전입니다. 분당에 살다가 조금 더 구석으로 들어갔죠.
▶ 왜 들어가시게 된 것입니까?
전원이 참 좋고요. 평생을 도심의 북적북적한 곳에 살다보니까 시골이 그리웠었는데 지금 만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요새는 그쪽도 파헤치고 있어서 더 깊이 들어갈까 생각중입니다.(웃음)
▶ 심심하지는 않으세요?
처음에는 좀 심심하더라고요. 술집도 없고. 그래도 요새는 외진 것 좋아하는 분들이 찾아주셔서 그리 심심치 않게 지내고 있습니다. 또 요새 편리해진 것이, 작업은 그쪽에서 해도 인터넷이 좋아서 전혀 불편이 없어요. 제대로 재택근무를 하고 있습니다.(웃음)
◇ 아직도 명절에 인사하는 가수 윤시내▶ ‘히트곡 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인데요, 그간의 히트곡이 무엇무엇 있습니까?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사실 데뷔곡입니다. 그 다음에 <열애>가 나왔는데 오히려 더 대표곡인 것처럼 되더라고요. 히트한 것이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웃음) 장재남 씨의 <빈 의자>도 있고. 곡을 그리 많이는 안 줬는데 한 곡 준 것 가지고 자기 이름을 얻는 다랄까 그런 상황이 있어서, 보람이 있습니다. 유열 씨도 그렇고.
▶ 작곡하신 노래들을 보면 가수의 개성에 맞춰서 그런지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예. 그런 편입니다. 사실 가수마다 약점이 있어요. 물론 장점도 있지만. 그래서 그런 것을 될 수 있으면 감추고 가장 좋은 것으로 보완하면서 맞춰주는 편입니다.
▶ 윤시내 씨는 아직도 명절 때 찾아뵙는다던데요.
정말 고마운 것이 세월이 이만큼 가면 소홀해지기 마련이잖습니까. 하지만 지금도 유일하게 명절을 꼭 챙겨요. 참 대단합니다. 고마운 생각이 들어요.
▶ 윤시내 씨에게 <열애>란 곡은 참 의미 있었을 텐데요. 당시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그렇게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프러포즈해서 윤시내를 데려왔어요. 대개는 가수가 하는데, 거꾸로였죠. 그룹사운드에 있는 것을 보고 제가 반해서 데려왔어요. 그 후에 그 곡을 리메이크해서 다른 분이 부른 것도 들어봤는데, 그 맛이 안 나더라고요.
◇ 어린 시절 유성기로 클래식 들으며 자라▶ 그 시대의 가요는 폐부를 찌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 시대의 문학이었죠. 요즘은 수용층이 젊은이다보니까, 아무래도 음악도 같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 지난 2월 나온 윤시내 씨 음반에 참여하셨죠?
오랜만에 <포옹> 등 몇 곡을 줬습니다. 요새 젊은 기분을 내가 맞출 수는 없다. 그러지 않고 내 색깔대로 하려면 한번 해보자해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 작곡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교회 때문입니다. 전 사실 그림을 좋아해서 화가가 되려고 했어요. 근데 교회를 처음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성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세계가 있는가 싶고. 그래서 그때 ‘음악 해야지’ 하고 생각을 하게 되고 다행히 일이 쉽게 쉽게 잘 풀리더라고요.
▶ 화가가 되려고 했다면, 어쨌든 문화 예술적 감성이 남다르셨네요.
아버님이 엔지니어셨는데도 가벼운 클래식, 이를테면 요한 스트라우스 같은 그런 음악들 즐겨 들으셨어요. 그 당시에 유성기가 있을 정도였으니 좀 살았던 모양이에요, 그 다음에 폭삭 가라앉았지만. 아주 어릴 때 유성기를 짓궂게 돌려 판을 깨먹은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은연중에 몸에 배지 않았나 싶습니다.
▶ 유년시절 들었던 음악이 기억이 나세요?
가벼운 클래식이었어요. 주로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 등과 관현악적인 것, ‘천국과 지옥’ 같은 것들. 아버님이 아주 즐겨듣는 클래식이 몇 개 있으셨어요. 요만한 아기가 뭘 알겠어요. 하지만 본인이 좋아서 요한 스트라우스의 생애를 막 이야기 해주기도 하셨어요. 알지도 못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죠.
◇ 군 제대 후 서른 살에 작곡가로 데뷔▶ 고향이 어디십니까?
태어나기는 이북에서 태어났어요. 황해도였는데 피난 때 내려와 그쪽은 잘 기억 안 나고요. 피난 후 전전하다가 지금 양평동에서 꽤 오래 살았죠.
▶ 그 시대는 참 가난하던 시대였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이런 일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잖아요. 그래서 힘들었는데도 고집스럽게 끌고 나가 오늘날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아버지 생전에는 나름대로 유복했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면서 몰락했어요. 그러다보니 제대로 음악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죠. 그때는 제대로 순수음악 하고 싶었는데 못하면서 대중음악 쪽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 고등학교는 어디를 나오셨습니까?
용산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다리가 없어서 을지로로 해서 한바퀴 빙 돌아 학교를 갔었죠. 그때 당시에는 우리 동네가 전부 배추밭인 시골이었어요.그 후에는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았어요. 그래서 클래식을 하고 싶었던 제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잘 되기도 한 것이고요.(웃음)
▶ 대중음악과 본격적으로 만나신 것이 언제입니까?
군대를 제가 조금 늦게 갔다 왔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디스크 하나 내놓고 군대갔다 왔긴 했는데, 본격적으로는 군대 다녀와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알려지게 되었죠. 그게 첫 번째 히트곡입니다.
▶ 그렇다면 데뷔가 좀 늦은 편 아닙니까?
서른 살 무렵이니까, 어떻게 보면 작곡가로서는 그리 늦지는 않았어요. 요새는 젊은이들도 작곡가로 데뷔하고 그러는데, 그때만 해도 작곡자는 어느 정도 늙었고, 가수는 젊고 그런 시대였었죠.
◇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때도 내 재능을 믿어▶ 곡을 들어보면, 개인적인 사연이 많았을 것 같은데. 여자들 많이 울리셨나요?(웃음)
곡을 낭만적으로 쓰다보니까 작곡자까지 멋있게 상상을 해주세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가수들이 멋있지 작곡자들은 그리 별로...
▶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아주 일찍 했습니다.(웃음) 군대 가기 전에 하고 갔어요. 사연이 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요. 이것은 편집해주세요.(웃음)
▶ 군대 다녀와서도 취업이 안 되면 참 불안하잖습니까?
그렇죠. 그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밤에 나가 연주를 한다든지 아주 아픈 기억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골로 더 가고 싶었는지 몰라요. 도시의 그 휘청거리는 불빛이 싫어서 말입니다. 그때 아주 고생 많이 했습니다.
▶ 그때는 직업이 일정하지 않았을 텐데 생활을 어떻게 하셨어요?
성격 자체는 낙천적인가 봐요. 하루 벌어 하루 먹는데도 그냥 콧노래 부르면서 왔다 갔다 했어요. 물론 집에서 고생했겠죠. 제가 철이 없어요. 우리 쪽 사람들이 단순합니다. 자기일밖에 몰라요. 물론 집에서는 말도 못하게 고생했겠죠. 하지만 막연하게 ‘나는 재능이 있으니 언젠가는 뜰 거야’ 그런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 상황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고, 때가 오겠지 싶었습니다. 참 이기적이었죠.
▶ 나이 드는 것에 대한 생각은 어떠세요?
사물을 보는 것도 자기 위주에서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또 남도 좀 보이고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자기밖에 몰랐거든요. 그러면서 성숙해지는 것이 바로 나이 든다는 것 같습니다.
◇ 음악의 흐름이 변함을 피부로 느껴. 서태지가 그 경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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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하나>는 김태화, 정훈희 부부에 맞춰 곡을 쓰셨나요?
그 노래가 조용호 씨 작사를 하였는데요, 그때 당시 조용호 씨가 그 커플을 보고 작사를 했다고 해요.
▶ 서태지 씨가 등장하면서 이제 내 시대는 갔다고 느끼시게 된 것입니까?
지금 굳이 서태지를 거론했지만, 그때 당시 음악의 흐름이 있잖아요. 유행가라고 하는데, 그게 무얼까 생각했어요. 우리들은 유행을 못 따라가면 물러나야 해요. 그게 대중가요의 속성입니다. 점점 그런 것 느꼈어요. 음악이 점점 바뀌면서 내 자리가 좀 줄어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경계가 서태지였습니다.당시에 그것을 누구나 다 느꼈을 것이에요. 이쪽 일이 유행을 못 따라가면 빨리 명퇴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신 것은 아니십니까?
그런 것이 피부로 다가왔어요. 일단은 제작을 하려고 안했어요. 제작을 해야 매스컴 홍보도 하는데 제작을 안 하니 난감하죠. 그런 것에서부터 변화가 왔습니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이야기 안하려고 했는데.(웃음) 저뿐만 아니라 우리 또래라면 그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누구나 느꼈을 거예요.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어요. 상업음악이라고도 이야기하잖아요. 시장이 좁으니까 어쩔 수 없이 잘 팔리는 것에 몰릴 수밖에 없죠. 안되면 도태되는 것이고.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냥 시대의 흐름 같은 것입니다.
◇ 우리의 것을 추구하는 뮤지컬 하고 싶어▶ 그럼 돌파구로 뮤지컬을 하게 되신 거예요?
그렇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순수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대중음악을 하지 않았습니까? 뮤지컬은 장르가 더 넓어서 그 안에 많은 음악이 필요해요. 가요는 트로트이면 트로트, 이런데 뮤지컬은 클래식에서부터 여러 장르를 다 담아야 해요. 일단 그게 적성에 맞았고, 그렇게 음악 하는 즐거움을 찾았어요.또 제가 얼마 전에 돌아가신 뮤지컬계의 대부 최창곤 선생님의 영향을 크게 받았어요. ‘정말 멋있다, 나도 언젠가는 뮤지컬을 해야지’ 했는데, 때가 이때다 싶어서 그쪽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죠.
▶ 최 선생님이 추구하는 뮤지컬은 무엇입니까?
저희 것을 하고 싶어요. 뮤지컬은 어차피 서양의 것이지만, 정서적인 것을 포함해서 우리만의 것들이 있거든요. 다만 걔네들의 물량공세, 자본, 볼거리 등을 우리가 못 따라가는 것이죠. 그 점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감성을 건드리는 창작뮤지컬을 만들고 싶어요. 우리의 것을 만들자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흥행과도 연결돼야 하는 등 어렵긴 하죠. 우리 관객들의 수준은 높아지는데, 상황은 열악하고. 그래서 더 힘든 것 같습니다.
▶ 세익스피어 작품 <한 여름밤의 꿈>이란 뮤지컬도 같은 맥락인가요?
우리의 멜로디로 새로이 작곡을 했습니다.
◇ 가요계에 있을 때보다 어린이 뮤지컬 하는 요즘에 보람도 커▶ 그 외 어떤 작품들이 있습니까?
‘어린왕자’, ‘말괄량이 삐삐’, ‘동화세탁소’, ‘공룡대모험’, ‘헤라클레스’, ‘박달나무 정원’, ‘꽃잎’, ‘광개토왕’ 같은 대개 어린이 뮤지컬이 많습니다.
▶ 보람도 크시겠어요?
제가 철이 없어서 그런지 애들이 좋아하니 저도 좋습니다. 애들이 이런 문화를 접함으로써 거기서 작곡가도 나오는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주 보람 있습니다. 오히려 가요계에 있었던 때보다 더 재미있고 보람이 있어요.
▶ 최 선생님의 아이들은 어떻게 키우셨어요?
그 부분에서는 할 이야기가 없어요. 더 반성이 되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쪽으로는 아주 부족한 아빠예요.(웃음)한번 그런 적은 있습니다. ‘너희들 학교 가지 마’했죠. 그때 강남에 살 때인데 부모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고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러 간 적이 있었어요. 내 생각에는 학교 공부보다 더 괜찮은 것이라고 여겨서 그랬는데, 아빠가 할 짓은 아니죠.(웃음) 그때 자기네 친구들에게는 굉장히 이상한 사건이었대요. 그때 내가 좀 심했나 싶기는 하죠.
▶ 자녀들 중에 작곡하는 자녀가 있나요?
한 명은 그렇습니다. 부모가 볼 때는 항상 안쓰럽죠. 힘들고 어려우니까요.
◇ 노래를 붙여 한글을 쉽게 배워보자고 시작한 뮤지컬▶ 노래로 한글 보급에 어떻게 나서게 된 겁니까? 같이 작업하는 분들 중에 이응률 씨라고 희극작가이면서, 애들 연극도 하고 초등학교 교사도 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한글을 가지고 애들 뮤지컬을 해볼까 하다가 이걸 제대로 해보자 해서 이게 커진 것이에요.의외로 한국말이 배우기 참 어렵다고 해요. 그래서 좀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 없겠느냐 하다가 세종대왕의 얼에 노래를 붙여 쉽게 배우자 해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쉽게 배우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 대상이 어린이입니까? 외국인입니까?
사이트<안고업고 한글배움터>를 열어놓았는데 의외로 그렇게 호응이 많을지 몰랐어요. 주로 엄마들, 외국인들, 외국에 사는 2세들이었죠. 그래서 이걸 꼭 제대로 한번 해야겠구나 싶었고 그래서 여기 방송에 소개까지 나오면서 거창해진 것 같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실 예정이세요?
아직 창단식은 못했지만 우선 시골 학교들, 작은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해서 시작을 하려고 합니다. 요즈음에 특성화 교육이라고 있더라고요. 거기 애들을 보니까 결손, 조손 가정이 많더라고요. 또 조금 있으면 폐교될지 모르는 작은 학교에 찾아가려고 합니다. 지금 합창단을 만들어 신곡을 연습시키고 있어요. 그렇게 불꽃을 한번 키워보려고 합니다.
▶ 그 일은 계속하실 예정이세요?
다행히 이응률 선생이 애를 많이 쓰면서 후원 받을 데를 찾고 있고요. 나는 돈 안 들어도 되는 일이니까 기꺼이 하려고 합니다.
◇ 돈에 욕심은 없어. 이제는 나누어야 할 때▶ 인기나 상업적인 것보다는 사회에 기여하는 쪽으로 가시려고요?
처음부터도 돈에 욕심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볼 것 다 해보았으니 이제는 나눔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나이가 들어 그런지 그런 생각이 드네요.
▶ <내 동생 곱슬머리>이런 유명 동요도 작곡하셨고,
에 쓰이는 동요도 꽤 많이 작업하셨죠. 동요를 요새는 많이 안 듣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교육적인 차원에서 돼야 하는데, 안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또 다르게 보면 너무 재미없게 만드니 안 듣는 것 아닌가 자책도 들고. 동요가 없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 더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으세요?
지금 하는 일이 잘 풀렸으면 합니다. 특별히 다른 계획이 있다기보다 그 일이 순조롭게 되었으면 합니다.
▶ 낙향해서 사는 삶이 어떠세요?
사는 방법과 즐거움을 찾는 방법이 다 다를 텐데요. 나름대로 그 동네에 술친구도 확보해놓고 그래서 일 없을 때는 산을 보면서 유유자적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 내가 작곡했지만, 언제 들어도 참 좋다는 곡을 두 곡만 정해 주신다면요.
이동원의 ‘이별 노래’가 있어요. 못 부르는 노래지만 노래방 가서 저도 부르는 곡입니다.그리고 제일 나중에 만든 곡으로 김종찬의 ‘당신도 울고 있네요’가 있어요. 그 곡은 어떻게 보면 제 곡 같지 않다고 해요. 너무 쉽고 그렇다고. 그래도 나이가 들으니까 편안해지는 것이, 그게 인생인 것 같습니다.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 김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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