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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대 몇!’ 이 말만 들어도 금방 생각나는 분이 있죠? 재치 있고 구수한 입담으로 ‘가족오락관’을 오랜 시간 진행하고 있는 MC 허참 씨.
그는 여자 진행자가 20번이나 바뀌고,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을 25년이란 긴 시간동안, ‘가족오락관’의 터줏대감 자리를 지켜왔는데요. 그런데 ‘가족오락관’을 통해, 한결같은 모습으로 늘 건강한 웃음 주던 그가 최근 새로운 모습으로 파격 변신을 했다는데요.
허참 씨는 3월부터 시작된 ‘골든힛트쏭’이란 음악 프로그램에서 과감히 양복을 벗고 화려한 반짝이 옷을 입은 채 어깨춤까지 추며, VJ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함께 진행하는 여자 VJ가 무려 마흔 살이나 차이가 나는 가수 ‘주'씨 라죠. 허참 씨의 변신,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시죠? 3월 20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예명으로 더 유명한 ‘허참’ 이제는 VJ로[BestNocut_R]▶ <싱글벙글 쇼><젊음은 가득히><푸른 신호등><허참과 이밤을><가요운전석> 등 라디오에서 정말 많은 활약을 하셨어요?
라디오를 계속 하다가 다른 쪽으로 신경을 썼죠. 개인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생활의 활력소를 만들기 위해서 자제하고 <가족오락관>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이후 라디오 프로그램에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네요. 라디오의 매력은 무궁무진하잖아요. 얼마 전에 타방송에서도 출연해서 그런지 덜 긴장돼요. 사실 TV보다 더 긴장되는 게 라디오 프로그램이에요. 출연하게 돼서 반갑습니다.
▶ 본명인 ‘이상용’보다 ‘허참’으로 통하시는 것 같아요.
집에서는 저를 그렇게 부르죠. ‘용아’ 그러기도 하고 친구들은 ‘상용아’ 부르는데 본명이 저만치 낯선 이름이 되어버렸어요. ‘허참’으로 부르는 게 친근감이 들고 저게 내 이름이지 싶고요.
▶ VJ를 하신다는데 어떤 프로그램인가요?
프로그램에서 저를 VJ로 기용한 것에 저도 놀라고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어요. 젊은 가요 프로그램에 어떻게 60 가까이 되는 사람을 기용을 하게 되었는지, 처음 전화가 왔을 때 잘못된 거 아니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아니라고, 이렇게 파격적인 기용을 통해서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내용은 어떤 내용이냐고 했더니 영상음악 기법을 도용해서 여자 MC도 파격적으로 할 거래요.
저는 비슷한 연령의 여자 MC로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렇게 되면 M-net이 완전히 그늘지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더라고요. 마흔살 아래인 가수 ‘주’양과 같이 한대요.전 동양방송에서 정소녀 씨와 함께 <쇼쇼쇼>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당시의 옷깃이 좀 넓고 머리가 장발이고 반짝이 의상을 입고 또 그때의 무대 매너라든지 그런 게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여자 MC는 역동적이고 참신한 젊은이로 뒷받침이 되니까 관심을 끌 거라는 거죠. 그런 제의가 들어와서 좋다, 해보자고 했는데 의상이나 머리는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어요.
<가족오락관은> 그 프로그램대로 깔끔하게 입고 나가는데 여기에서는 머리를 아예 깎지 말아 달래요. 머리를 깎으면 가발을 써야 한다고요. 장발 시대니까 장발 그대로 해주시고 양복은 자기들이 가져온 깃넓은 의상, 반짝이, 스카프 등 지금까지 입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죄다 동원해서 입고 있어요.
그리고 무대도 옛날 <쇼쇼쇼>에서 꾸몄던 무대장치들로 해서 세련된 조명이 아닌 DJ의 뮤직 박스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 진행하는데 해보니까 괜찮아요. 지금 방송이 나가고 있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다 달라요. 애들처럼 그게 뭐냐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망가지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색다르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웃음) 좋은 평, 나쁜 평을 해주시는데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죠.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옛날 DJ의 뮤직 박스 안에서 사연을 읽다가 좋은 음악이 나오면 뮤직 박스 안에서 춤도 추고 그랬잖아요, 그런 스타일로 서서 하니까 좋더라고요.
▶ 망가진다는 게 숨은 재능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말의 기법이나 억양도 다른 곳과는 다르게 해야죠. 빠르게 진행을 하다 보니까 헛기침도 나와요. 노홍철 씨 스타일로 빠르게 말을 할 수도 없고, 제가 젊었을 때 별명이 촉새였거든요. 박상규 씨가 지어줬어요. 그때 그 기분을 살려서 말을 빨리 하면서 소개하는 어투를 쓰죠. 마음만 10대라고 신나는 춤을 추는데 영 관광버스 춤만 나와요. 젊은 애들 춤 몇 가지 배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해서 배워봤는데 춤추다 보면 다시 옛날 춤으로 돌아가더라고요.(웃음)
◇ 타고난 말솜씨 “말로 먹고 살 놈이군”▶ 천부적인 말솜씨나 재능을 어머니께 물려받으셨다고요?
옛날에 만화가 허모 씨께서 제 고향에서부터 데뷔까지 일대기를 그려놓은 게 있거든요. 그때 어머니 이야기가 만화에 실린 적이 있어요. 옛날에는 커다란 양철통 대야에 애들을 목욕도 시키고 일할 때는 못 넘어오게 거기에 앉혀놔요. 대야에 앉아서 물장구 치고 그게 놀이터죠. 어느 날 스님이 지나가다가 저를 보시고 “이놈, 말로 먹고 살 놈이군.” 하셨대요. 아버님이 법조계 말단 직원이셨는데 그 말을 들으시고는 변호사 정도는 하겠구나 싶으셨나 봐요. 그때는 부모님들이 변호사, 판검사를 무척 좋아하셨거든요.
그래서 제대로 시켜보자 했는데 공부는 죽어라 하지 않았어요.(웃음) 고등학교 때 <조침문>에서 유기현 선생님의 ‘전설 따라 삼천리~’ 흉내 내고 친구가 녹음기를 가져와서 녹음해달라고 하면 거기에 <삼국지>도 녹음해줬어요. 그렇게 해주면 자기 집에 갖고 가서 부모님께 들려주기도 하나 봐요. 그 덕에 자장면도 많이 얻어먹었죠. 변호사는 물 건너 간 거예요.(웃음)
그러다가 우연히 이 직업이 나왔는데 지금에사 팔순 되신 어머님이 변호사는 안 됐지만 말로 먹고 사는 직업으로 장남으로 집에 도움을 주는구나 하시더라고요.
▶ 군대에서 문선대에서 활동하셨다고요?
그것도 우연하게 들어갔어요. 사단에서 주최하는 각 예하부대의 문선대 경연대회가 있어요. 문선대를 조직할 때 처음으로 대회를 열어서 1등한 팀을 사단문선대로 발족시키려고 한 거예요. 거기서 제가 원고 쓰고 사회에서 그쪽으로 취미 있는 몇 사람을 뽑아서 대회에 나갔는데 1등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군악대 소속이 됐어요. 거기서 생활하다가 방송실이 있었는데 고참이 곧 제대인데 후임자를 뽑아야 하는 거예요. 문선대보다는 방송이 편할 것 같고 어차피 말로 먹고 살 거라는 스님의 계시도 있고 해서 저랑 또 한명이 지원했는데 고참이 그 친구를 선택하더라고요.
그런데 이 친구가 월남에 가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자동으로 그 자리로 가게 됐죠. 그때부터 군 방송을 시작하게 됐어요. 문선대 활동 없을 때는 군 방송실에 있었고 문선대 행사 있을 때는 쌀 싣고 부식찬거리 준비하고 각 예하부대 다니면서 공연 때 사회보고 그랬어요. 육군 대위가 앙코르를 요청했는데 거기에 반항해서 군화로 조인트를 까이기도 하고 그러고서 절룩거리면서 앙코르 받아주곤 했어요. 앙코르를 받아주는 것도 재미있어요.
그 부대에 가수가 없으니까 가수를 조달하려면 군 예산 가지고는 부족해요. 부대 앞에 다방이 있었는데 종업원이 곧잘 노래를 한대요. 종업원을 가수로 데뷔시켜서 데리고 가는 거예요.(웃음) 방금 필리핀에서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루나 킴’ 이러면 박수와 함성이 터져야 하는데 장병들이 우~~그래요. 다방 종업원이라는 걸 아는 거죠. 들어보니 노래도 영 아니에요.
어쨌든 장병들의 야유와 함께 한 곡 끝났는데 S라인의 춤솜씨는 좋더라고요. 그랬더니 앙코르가 쏟아지는 거예요. 제가 차마 앙코르를 받을 수가 없어서 다음 가수, 이러니까 부대 인솔하시는 분이 왜 앙코르를 안 받느냐고 하면서 그렇게 된 거죠. 나중에 제대하고 만났는데 호탕하신 분이더라고요.
◇ 음악다방 DJ 시절, 불철주야로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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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하고 나신 이후에는 어떻게 되셨어요?
취직하게 된 경위를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1970년도에 종로 쉘부르 음악다방에서 DJ 구함이라고 써 있더라고요. 친구하고 취직자리 알아보러 털레털레 다니는데 배도 고프고, 배운 거라고는 군대에서 사회보고 공연하고 말하는 거니까 DJ 자리를 찾아다닌 거예요. 음악다방이라면 명동 쪽에 안 다녀본 곳이 없어요. 종로 2가 보신각 앞에 DJ 구함이라고 있기에 들어갔어요. DJ 응시는 처음이었죠.
내 친구가 나보다는 돈 좀 있어서 데리고 들어가서 분위기 파악하려고 손님으로 앉아있었어요. 음료수 시음하고 티켓 받아서 들어갔는데 스튜디오 안에 조그마한 무대가 있더라고요.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뮤직 박스가 있고 그때 무대에서 통기타 가수들이 노래를 했는데 기억나는 분들이 장현, 송창식, 김세환, 윤형주 씨 등이었죠.
무대가 끝나면 2층에서 손님들의 신청 곡을 틀어줘요. 마침 무대가 진행될 때 <쉐그린>의 전언수, 이태원이 탁구공을 가지고 행운의 추첨을 하는 거예요. 손님들이 들어오면서 받은 티켓에 번호가 있어요. 번호를 넣은 광주리에 담아서 탁구공을 뽑는데 제 번호가 뽑혔어요.잠깐 나오라고 해서 얼결에 나갔어요. 뭘 주는 지도 모르고 감사하다고 했더니 성함이 어떻게 되느냐고 해요.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고 했더니 “허참, 나~”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허참입니다.” 그 자리에서 허참이 됐죠.
군대에서 말솜씨 부린 걸 가지고 웃겼거든요. 그게 이종환 씨와 쉐그린 눈에 띄어서 끝나고 나서 보자고 하더라고요. 뭘 하고 있느냐고 묻기에 군대 제대하고 취직하러 왔다고 했더니, 해볼 생각 있냐고 하니까 당연히 합시다, 그렇게 된 거죠. 일단 ‘감사합니다’ 하고 시작은 했는데 이종환 씨의 팝에 대한 해박한 지식, 정보, 말투 등 유명했잖아요. 다른 사람 잠 잘 때 연습을 하는데 11시에 무대 다 끝나고 청소하고 나면 나 혼자 DJ박스 안에 들어가서 음악 틀면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밑에서 ‘잠 좀 자자’ 라고 했는데 그게 <어니언스>였어요. 이수영 씨와 임창제 씨였죠.
거기서 다들 먹고 자고 연습할 때니까 이 사람들은 일 끝나고 자야 하지만 저는 연습을 해야 하니까요. “손님 여러분, 오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그러면 밑에서 “잠 좀 자자!!”(웃음) 그런데 오랫동안 연습을 하니까 나중에 지적도 해주더라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니언스가 <편지>로 완전히 떴어요. 이수영 씨가 잠 잘 때 사용하던 슬리핑백을 놓고 가서 저건 내거다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홑이불 덮고 자는데 저는 그걸 덮고 생활했어요.
거기서 통기타 가수들 30여 명을 소개하며 하루 종일 사회보고 무대 박스에 올라가서 음악 좀 틀어주면서 개그 리사이틀도 했어요. 손님들이 미어터질 지경이었어요. 그러다가 MBC 박원웅 씨에게 스카우트가 돼서 <청춘은 즐거워>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어요.
▶ 현업 DJ하던 때와 방송은 다를 텐데, 적응이 잘 되시던가요?
군 3년 생활과 제대해서 전문가를 흉내 낸 것이 헛된 일은 아니구나, 학습이라는 걸 알았어요. 저 나름대로 발음교정도 해가면서 했어요. 손님 다 가면 끝나고 종업원들과 청소도 하고 바닥부터 쌓은 수업 내공이 저한테는 필요했었던 거죠. 방송 첫 날 시작하는데 저한테는 그렇게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는 않더라고요.
저 혼자 진행을 하는데 편하게 지도를 잘 해주셨어요. 그렇게 지내다가 DJ는 서서히 끝나가는 거죠. 방송이 바빠지면서 쉘부르에서 나오게 되고 방송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젊음은 가득히>라고 박상규 씨가 메인MC이고 뽀빠이 이상용 씨하고 제가 보조MC를 번갈아서 했어요. 그때 TBC <7대 가수쇼>라는 프로에서 신광철 씨가 저를 픽업해서 그 큰 프로를 맡겨주시더라고요. 거기서부터 보조MC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어요. 고려진 아나운서하고 할 때니까 1972년도일 거예요.
◇ 허참의 상징 <가족오락관> 한 번도 펑크 낸 적 없어▶ 당시에 활동하던 MC는 누가 있었어요?
후라이보이 곽규석 씨는 대한민국 국보MC로 날릴 때였어요. 코미디언 배삼룡, 구봉서, 서영춘 선생님, 대단했던 분들이에요. 젊은 MC로 제가 상종가를 치면서 나중에는 <쇼쇼쇼>를 맡게 되더라고요. 4,5년 간 진행했는데 언론통폐합이 되면서 없어지게 되죠.
그러다가 바로 KBS에서 <라디오 동서남북>이라는 프로를 맡게 되었고 계속 허참 타이틀로 TV에서도 <쇼특급>을 하다가 1984년 4월에 <가족오락관>을 하게 되었어요. 83년도에 파일럿 프로그램을 했었는데 괜찮다고 평이 좋아서 본격적인 가족프로그램이 탄생하게 되었죠. 그러고 나서 25년 동안 진행한 거예요.
▶ <가족오락관>은 허참 씨의 상징과도 같은데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앞만 보고 끝은 생각하지 않고 달려온 것 같아요. 처음 시작할 때 긴장했던 것, 방송하고 나서 식은땀 흘렸던 것, 집사람과 모니터하던 것들. 제가 1회 때부터 녹화테이프를 다 갖고 있어요. 그래서 특집 때 KBS에서 제 걸 다 가져가서 했어요. 모니터를 하면서 이게 정말 내 적성에 맞다, 다른 거 이것저것 할 게 아니라 하나라도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했는데 마침 조의진 PD가 저를 믿고 정말 편안하게 진행하도록 내버려 두었어요. 그래서 프로그램에 모든 역량을 다 쏟아부었고 혼신의 힘을 다했기 때문에 끝나고 나면 기진맥진했어요.
하지만 언제 이 방송이 끝났나 할 정도로 재미 하나는 똑 부러지게 했구나 싶어요. 지금까지도 재미 하나로 즐거운 마음 하나로 진행했는데 다른 분들이 그렇게나 오래? 이런 얘기를 들으면 청춘이 다 갔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도 나를 필요로 하는 이상에는 계속 달려가야겠다고 생각해요.
▶ 요즘은 대중들의 취향이나 트렌드가 빨리 바뀌는 시대라, 시청률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요.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게 MC인데 가족오락관을 진행하시면서 이런 문제는 없으셨어요?
왜 없었겠어요? 프로그램이 막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싶을 때도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여러 PD들이 폐지시키면 안 된다고 건의해서 기사회생한 경우도 있었죠. 요일이나 날짜를 변경해서 방송하니까 다시 시청률이 살아나기도 하더라고요.
▶ 녹화할 때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아요.
많이 웃다 보면 MC가 주책없이 퍼질러 앉아서 웃을 때도 있어요. 여자 MC였던 정소녀 씨가 한참 하다가 두리번거리기에 뭘 하느냐고 했더니 너무 웃다가 눈물이 나서 마스카라가 떨어진 거예요. 그거 찾는다고 NG나고 또 코너 변경할 때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급하게 들어가야 된다고 해서 바로 들어갔는데 남대문이 열린 채였어요. 주부들은 들어올 때 벌써 빨간 팬티를 본 모양이에요. 그래서 한바탕 웃은 적도 있고요. 주부들에게 고마운 게 아이를 데리고 왔었는데 그 아이가 엄마가 돼서 방청객으로 오고 참 고맙더라고요.
▶ 전설적인 얘기인데 한 번도 펑크를 내지 않으셨어요?
누구라도 주어진 방송이 있는데 펑크 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냥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죠.
◇ ‘왜 몰라주나’로 음반취입, 노래 정말 몰라줘▶ 가수생활을 하신 적도 있으시다고요?
1980년대인데 지금과 똑같아요. 인기가 좀 있으면 기획사에서 와서 노래 한 번 해 볼 생각 없냐고, 판을 팔아서 돈을 좀 벌자고 하더라고요. 노래는 쉘부르에 있으면서 기타치고 생활했으니까 많이 불렀어요. 노래는 많이 부르면 자연히 자신에게 큰 공부가 되잖아요. 마침 그런 제의가 들어와서 인기 있을 때 노래 한 번 취입하자고 하기에 나도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제대로 해보자 해서 <왜 몰라주나>로 취입을 하게 됐죠.
청계천에 밑에는 술집이고 위는 모텔이었어요. 모텔 하나 얻어서 연습실 삼아 하는데 밑에는 술집인데 제대로 되겠어요? 조금 하다가 한 잔 하고 하자고 해서 밑에 내려가고 술 취하면 내일하자고 하고 그 다음 날은 방송이 있으니까 우물우물 날짜는 넘어가고 한 달 정도 됐는데 노래는 안 되고 기획사에서는 성질나죠.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돈이 자꾸 새나가거든요.
어느 날 녹음실에 가서 녹음 한 번 해보자고 해요. 자기 딴에는 됐다고 생각했는지 돈이 아까워서 그랬는지 가자고 하더라고요. 어쨌거나 녹음실에 가서 한 곡인가 두 곡을 오래 불렀어요. 목이 메어서 한 잔 하고 하자고, 그러다 보니 내일 하자고 하고, 스케줄 때문에 다음 주에 하자고 하고, 연습 한 번씩 하고 몇 주를 쉬는 거예요.
그런데 지방에 공연을 갔다가 오니까 음악이 레코드로 나왔어요. 편집을 막 해서 나왔다면서 축하한대요. 완곡으로 다 부른 것도 아닌데 이게 어떻게 나왔느냐고 했더니 돈도 안 받쳐주고 사정이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제목은 뭐냐고 했더니 <왜 몰라주나>래요. 진짜 몰라주더군요. 그게 될 일이 있겠어요? 정말 첫 번째 노래는 몰라주고 집에만 판하나 보관하고 있습니다. <왜 진작 안 나왔나> 이렇게 냈으면 됐을지도 몰라요.(웃음)
▶ 가수 조용필 씨, 그리고 최헌 씨하고 친하시다고요?
톱가수들의 리싸이틀이라고 하죠? 요즘은 디너쇼라고 하지만 극장을 빌려놓고 하면 MC는 제가 도맡아서 했어요. 혜은이, 박상규 씨의 사회를 보기도 했고요. 나이도 동갑이고 술도 자주 마시고 음악 이야기도 하니까 자연히 어울리게 됐죠. 혜은이 씨 리싸이틀을 서울에서 하다가 지방에도 내려간다고 사회를 봐 달래요.
제가 스케줄 때문에 안 된다고 했더니 누구 없냐고 해서 이덕화 씨가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덕화 씨에게 바통을 넘겨줬는데 그때부터 이덕화 씨가 MC의 길로 나가게 된 거예요.
◇ 시청자의 사랑에 보답하는 ‘흐르는 물’ 되고 싶어 ▶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셨는데 본인은 외롭다든지 혼자만의 고독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세요?
저도 있죠. 혼자 고독하고 외롭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을 때 그런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이직도 생각하고 그러다가 술이 깨면 아니야, 다짐하고 방송국에서 부르면 달려가고 그러다 보면 또 까맣게 잊고 계속 되풀이 되는 것 같아요.
▶ 이직도 생각해 보셨어요?
젊었을 때는 몇 번 있었죠. 이번 개편 때 쉬셔야겠는데... 그러면 어린 자식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이럴 때 포장마차에서 술 한 잔 먹고 하는데 그때마다 용케 다음 프로가 들어오더라고요. 내가 잘해서 된 게 아니라 처자식이 먹을 복은 갖고 태어났나 봐요.
▶ MC로서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일까요?
때로는 자만하기도 하고 교만했던 때도 있었어요. 이 정도만 하면 됐지, 이렇게 나가면 되는 거 아냐?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자만과 교만, 그리고 나태, 슬럼프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나를 되돌아보고 방송사의 배려도 중요하지만 시청자들의 기대와 사랑이 나에게 무척 크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언젠가는 바다로 가겠지만 흘러가는 물도 중요하다, 나는 지금 흘러가는 물이니까 다른 것 생각하지 말자, 굽이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큰물에 나갈 때 조용히 가자고 생각하고 열심히 할 겁니다.
▶ 남양주에 어머니를 위해서 집을 마련하셨다면서요?
아버님과 같이 사시다가 돌아가셔서 지금은 어머니 혼자 사세요. 자유직업은 저뿐이니까 자주 들어가서 찾아뵙고 거기서 어머니 팔베개도 해드리고 자기도 합니다.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