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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일반

    양희은 "노래는 숙제 같았지만, 라디오는 편안했죠"

    • 2008-03-1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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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신춘특집 라디오 스타 - 양희은 편

     

    시대를 뛰어넘어, 늘 마음속에 살아있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 양희은 씨.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던 70년대, 그녀의 노래는 젊은이들에게 혼란스럽고 힘든 시절을 버티게 한 힘이었습니다.

    올해로 데뷔 37주년을 맞은 양희은 씨는 시공을 초월해 불려지는 그 유명한 노래. ‘아침이슬’을 부른 가수이자 또, 인기 라디오 진행자로도 익숙하죠. 양희은 씨는 1970년 대 초부터 CBS 라디오에서 ‘우리들’ ‘Seventeen', 'All Night Pops', ’꿈과 음악 사이에’ 등을 진행했구요. 지금은 MBC 라디오 ‘여성시대’를 통해, 서민들의 행복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죠.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신춘특집 ‘라디오 스타’ 양희은 씨를 3월 14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방송 첫날 그만두게 된 사연. 좌충우돌 방송생활의 시작

    [BestNocut_L]▶ 처음에 방송을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그때는 '청개구리' 그룹에서 같이 노래하는 대학생 그룹들이 라디오 밤 프로에 이야기 손님으로 초대를 받아서, 노래 부르고 말 몇 마디하고 그랬거든요. 그것이 대학교 1학년 때였는데, 그것이 방송 첫 출연이었죠. '청개구리' 멤버로 통기타 1세대인 송창식, 윤형주, 김민기 씨가 있었죠.

    그때 김민기 씨는 '꿈과 음악 사이에'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세노야'라는 노래가 이미 로고송으로 쓰였었죠. 또 '친구'라는 노래는 이미 방송을 타고 있었고요. 그런 식으로 그때 당시의 모든 통기타 가수들은 보통 CBS에서 데뷔를 했어요. 그리고는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씨 등 소위 '이종환 사단'이라고 불리는 가수들이 MBC에서 데뷔를 했었습니다. 그러한 경우 외에, 나머지 분들은 CBS에서 데뷔를 했고, 거기서는 라디오 진행자로서의 기회도 주셨죠.

    ▶ 라디오 프로를 어떻게 시작하시게 된 거에요?

    70년도에 처음 종로5가 기독교방송국 A 스튜디오에서, 제가 녹음한 팝송이 처음으로 방송을 타게 되었어요. 그게 서양의 팝송, 샹송, 깐쪼네 등을 소개하던 제3세계음악방송이었어요. 그때는 재수생일 때였는데, 다음 해에 대학을 재수해 들어가서, 그해 2학기 시작되자마자 저의 음반이 세상에 나왔죠.

    그리고 그해 가을에 CBS에서 '해프닝 코너'라는 프로그램을 맡았어요. 그런데, 방송을 너무 모르는 관계로 제가 하루 만에 그만두게 되었어요.(웃음) 온 에어 사인이 들어왔는데도 제가 보고만 있어서 몇 십초를 침묵한 채로 방송이 나갔거든요. 그때 같이 있었던 임문일 씨가 그 공간을 빠르게 채워주면서 바로 다음날 그분으로 MC가 교체되었죠. 그게 첫 데뷔의 쓴맛이에요.(웃음)

    그렇게 첫 데뷔에서 뼈아픈 실수를 한 뒤로는, 다른 분들 방송하시는 것을 유심히 모니터 하면서 72년에 TBC와 CBS에서 라디오 프로를 동시에 두 개를 진행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CBS는 제게 친정 같은 곳이죠. 제가 세상에 발을 내딛은 첫 번째 디딤돌이랄까.

    ◇ 시대보다 앞서 나갔던 음악 선곡

    ▶ 방송진행자로서의 꿈이 원래부터 있으셨나요?

    당시에는 방송을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누군가 선택해주기 전까지는 방송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죠. 더구나 저는 MC나 가수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제 꿈은 라디오나 TV 프로듀서 혹은 사회부 기자였죠. 그 꿈이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긴 해요. (웃음)

    ▶ 당시 꽤 많은 프로그램을 맡으셨죠?

    예. 'Seventeen', 'All Night Pops' ,'영840' ,'꿈과 음악 사이에' 등을 했어요. 그때 당시에 통기타 가수들이 전부 그렇게 여러 프로를 했어요. 제가 첫 방송을 하루 만에 물러서고 나서, 절치부심해서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가 기회가 다시 주어져서, 70년대 계속 방송을 하게 되었죠. 그때 당시에, CBS방송국에서는 남다른 게 있었어요. 다른 방송국에서 잘 안트는 노래들을 많이 선곡하는 등 음악적 취향이 앞서나갔었죠. 이를 테면, 청취자에게 끌려가는 게 아니라 끌고 가는 방송이랄까?

    ▶ 당시에 CBS는 청취범위가 그렇게 넓지 않았을 텐데요?

    당시 오재경 이사장께서 젊은 시절 미국에서 공부하시면서 습득한 열린 안목이 있으셨어요. 당시, 방송국에도 없던 최신 음반을 비치하고 있던 명동의 유명한 심지다방에서 DJ를 직접 섭외하기도 하고. 또, 거리 곳곳을 다니시면서 재주 있는 사람을 모아오시기도 하시고. 누구한테라도 노래할 수 있는 기회도 주셨고요. 그런 분들의 노력으로 타 방송과 차별되는 뭔가가 있었어요.

    ▶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신청곡은 어떻게 받았었나요?

    70년대에는 관제엽서의 시대였죠. 아니면 스프링달린 대학노트를 찢어 듣고 싶은 곡을 빼곡히 적어 보내주시기도 하고. 팩스만 해도 한참 뒤에 사용되었고요. 그렇게 신청곡을 받아서 틀었었죠. 선곡은 물론 담당PD의 소관이지만 , 제가 음악을 틀면서 그 음악의 흐름 같은 것을 몸으로 익히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 그때가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의 태동시기 였던것 같은데요?

    그때 밤12~4시까지 통금이 있던 시기여서, 보통 심야 방송으로 편성이 되었었죠.그런데, CBS에서는 오후 7시인가? 7시 반인가? 'seventeen'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저녁 먹고 난 후에 청소년들의 이야기만 하던 방송이 있었어요. 그만큼 젊은이들을 향해서 매우 열려있었고, 기독교 방송이라고 특별히 차별화 되어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 일찍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와의 추억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저의 아버지가 이북에서 월남을 하셔서, 49년에 미국유학을 다녀오시는 등 일찍부터 깨어 계셨거든요. 당시 헐리웃에서 찍은 흑백사진이 지금도 있을 정도에요. 젊은 시절에는 서북청년단 활동을 하시다가,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셨어요. 그러다가 군인이 적성에 안 맞으셨는지 군복을 벗으셨죠. 이후, 사촌 매형이 운영하던 밀가루 회사에 취직하셔서 인천에서 제분 공장 상무로 계시다가, 우리나라 나이로 39세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디자이너셨어요. 그때는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던 시기였잖아요. 기성품이 없던 시기였어요. 저희 어머니도 딸이 셋이니까 뭐든지 만들어서 입혀 주셨어요. 그 시대에 6촌 언니, 오빠들에게 물려받은 청바지를 리폼을 해서 입혀 주셨죠. 그것이 눈에 띄어 사람들에게 주목도 받고 그랬어요.

    ▶ 방송에서 솔직, 과감한 것은 부모님의 영향인가요?

    제 동생 양희경이 6촌 언니와 소꿉장난을 할 때, 저는 사촌오빠와 총싸움을 하면서 자랐어요. 저희 어머니가 또 그것을 말리지도 않으셨어요. 야단을 치는 것보다 일단 해보라고 하셨죠. 자식들이 무엇을 한다고 했을 때 거절을 하신 적이 없으셨어요. 또, 제가 딸 셋 중 맏딸이라 오빠나 남동생과 비교되는 성차별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제게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셔서, 선머슴같이 놀면서 자랐죠.

    초등학교 때 정말 말괄량이였어요. 아버지가 또 그것을 참 좋아하셨고요. 사춘기 때도 속옷은 아버지가 사주실 정도였고, 자식들 발을 일일이 씻겨주실 만큼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그렇게 자라서 제가 70년대 방송을 시작하니까, 다른 여성MC분들과는 다르게 좀 튀는 것이 있었죠.

    ◇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노래

     

    ▶ 통기타 가수가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저는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당시 어머니는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셔서 어떻게 하다보니 재산도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죠. 그리고 혼자서 딸 셋을 먹여 살리시느라고 고생하셨어요. 그때부터 제가 가난을 알게 되었어요.

    대학 입학 후에 두 달 있다가 송창식 선배의 소개로 이종환 씨 오디션에 합격을 하고, 그 이후에 71년5월에 처음으로 통기타 가수로써 월급을 받은 것이 그 시작이에요. 당시, 아무도 통기타를 갖고 있지 않을 시절인데 제가 고2때 어머니가 기타를 사주셨어요. 그런데 그게 저를 이 길로 가게 할 줄은 몰랐죠. 그때는 동생들 등록금도 벌어야 했고, 집안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 당시 통기타는 청년문화의 상징이었죠?

    예. 그렇지만, 당시 통기타 가수들은 주류가 아니었어요. 비주류에 속해있었죠. 요즘 연예인들과는 달랐어요. 당시에는 금지곡도 많았고. 제재도 많았습니다. 그냥 라디오 방송국 월급으로 살았어요. 당시에 음반으로 돈을 번다고 생각을 못했었어요. 통기타 가수들이 노래할 수 있는 통기타 살롱은 유일하게 한 곳만 있었죠.

    연예 활동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여전히 삶이 고달프고 고단했어요. 등록금이 없어서 휴학을 자주하다보니, 자퇴까지 하게 되었고요. 다시 재입학을 하면서, 늦깎이 졸업을 했죠. 그래서 졸업하는데 8년이 걸렸어요. 장학금이라도 신청하면 가수라고 허락을 안 해주셨어요.

    70년대에는 '스타'라는 말이 없었을 때였거든요. 그때 제 별명이 '라면과 회수권'이었어요. (웃음) 저랑 눈만 마주치면 '라면 사달라', '회수권 달라'등 이런 말을 달고 다녔거든요. 그때 당시에는 밥 먹을 시간도 없고, 물론 돈도 없었고요. 30대 접어들면서 암 수술 받고, 석 달밖에 못산다는 선고를 받았을 때, 저는 못 먹어서 생긴 병이라고 했을 정도로 늘 배가 고팠었어요.

    그때 등록금이 7000원이었을 때였었죠. 당시는 운동화 밑바닥에 구멍이 나서 비가 오면 발이 시린데, 운동화 살 돈이 없어서 고무신을 신고 다녔었어요. 데뷔도 친구가 준 청바지를 입고했었죠. 그래서 가수 생활을 하면서도 전성기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언제나 배가 고프고 힘이 들었죠.

    ◇ 본격적으로 통기타 가수의 길로

    ▶ 그런 삶의 고비를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굉장히 부유하게 살다가 몰락을 하고 나니까, 삶이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죠. 늘 배가 고프고, 동생들은 자주 아픈데 치료비는 없고 그랬어요. 그때는 사는 것이 참 희망이 없었어요.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이 되는 것 같아요. 세월이 지나고, 빚도 다 갚아갈 무렵에 제가 노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죠. 노래에 타성이 붙어서 감동이 없어지는 거에요. 사람이 망가지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가수들은 밤무대를 해야 생활에 여유가 있었지만, 저는 이제부터는 라디오 진행만 하기로 결심을 했죠.

    ▶ 음반은 어떻게 내시게 되었나요?

    당시 제가 다니던 서강대학교에 외국인들이 참 많았어요. 50년대에 이미 한국에 들어오신 신부님들도 계시고 그랬는데, 그때 그 외국인 신부님 중에 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노래하는 것을 보고 제 사정을 친구에게 물어보셨나봐요. 그리고는 저를 모르는 상태에서 제게 집안의 빚 갚을 돈을 건네 주셨어요.

    그때 그 신부님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었어요. 제가 노래를 하면서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라는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너와 같은 환경에 있는 젊은이를 만나면 도와주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그래서 그것이 계기가 돼서, 제가 그 이후 바로 레코드 회사에 직접 찾아가서 정식 계약을 했죠.

    첫 계약으로 받은 돈으로 신부님 빚도 갚았어요. 그 이후부터 저의 30대까지의 모든 노래가 그 회사에서 나왔어요. '들길 따라서'', 네 꿈을 펼쳐라''내 님의 사랑은' 같은 노래가 계속 나왔지만, 계약금 외에 저는 돈을 한 푼도 못 받았어요. 그렇지만, 언제나 그 신부님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노래할 때마다 웃었죠. 지금도 그 신부님이 한국에 나오실 때마다 만납니다.

    ▶ 통기타 가수로서 칭송을 많이 받으셨는데요?

    김민기 씨와의 만남이 중요했죠. CBS의 '꿈과 음악 사이에서'라는 방송에서 처음으로 김민기 씨 목소리를 들었어요. 그러다가 서로 알게 된 후, 김민기 씨가 작곡한 주옥같은 노래들을 제가 부를 수 있었죠. 그 만남이 저의 통기타 가수로써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것 같습니다.

    ▶ 데뷔 37주년을 맞으셨는데요, 기억에 남는 팬들은?

    공연장에 오셔서 우시는 분들도 많으세요. 모든 가수들은 또래 집단 팬 분들의 격려와 사랑을 먹으면서 함께 자라가는 것 같아요. 세월을 같이 살아온 동년배들의 응원 속에 가수 생활을 하는 것이죠. 우리 세대는, 일회용 휴지보다는 손수건 세대잖아요.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닌….

    ▶ 양희은 씨의 당당하고 진솔한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저의 체구에서 나오지 않을까요.(웃음) 키도 167cm나 되고, 덩치도 있고. 또 목소리가 기차 화통 소리가 나기 때문에.(웃음) 거기에서 사람들이 받는 인상이 당당하고 거리낌 없어 보이는 것 아닐까요? 또, 어렸을 때 아버지가 손님이 오면 희경이와 저한테 노래를 시켰어요.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서서 노래하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어있긴 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도 교단에 올라가서 애국가나 교가를 부르기도 하고 그랬죠.

    ◇ 4시간 동안 연속 생방송해도 힘든 줄 몰라

    ▶ 양희은 씨에게 라디오는 어떤 의미인가요?

    노래는 언제나 힘겨운 숙제 같고 피하고만 싶은데, 라디오 방송은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할 정도로 편안했어요. 그때 2~4시까지 동양방송에서 라디오 프로를 진행했었고, 4~6시까지 CBS에서 방송이 있고. 그렇게 4시간이 붙어있었어요. 당시 편성국장님들의 배려로 그 사이에 30분정도의 시간이 났었어요. 그럼 그 사이 전철을 타고 막 뛰는 거에요. 지금은 유명한 드라마 작가가 되신 당시 홍승현 작가가, 전철표 두 장과 함께 마지막 클로징 멘트를 건네주면, 저는 서서 마지막 멘트를 하고 뛰어서 기독교 방송국까지 오는 거에요. (웃음) 그것을 2년을 했어요. 그때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웃음)

    ▶ 라디오 스타로서의 삶은 어떠세요?

    저는 애초에 라디오로 출발을 해서 그런지, 카메라 앞에 서면 시선을 어디로 둬야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보면 카메라 공포증이 있는 것도 같아요. 또 저의 노래가 금지곡이 많이 되면서 어쩌면 제 자신이 라디오로 숨어들어간 것 같아요. 라디오를 통해서 노래는 할 수 없었지만, 애청자들과의 소통이 오랜 세월 저를 지탱해준 것 같습니다. 아마 제가 TV에서 자주 보였다면, 지루해하셨을 지도 모르겠어요. TV보다 솔직한 매체인 라디오에서 많은 세월을 보낸 덕에, 제가 가수로서의 긴 세월을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라디오는 살아온 인생역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매체라고 생각해요. 저희 같은 전후세대는, 마을마다 한 두 집 라디오가 있는 집에 가서 '현해탄은 알고 있다.',' 청실 홍실'같은 프로를 듣고 자랐거든요. 그래서 라디오가 꿈이었죠. 지난 세월을 보면, 노래를 하는 양희은이, 라디오 진행을 했던 양희은만큼의 마음을 쏟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노래는 항상 부담이 컸지만, 라디오는 편안했죠.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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