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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규 "엿장수 딸, 가발공장 직원, 미국에서 식모까지"



인물

    서진규 "엿장수 딸, 가발공장 직원, 미국에서 식모까지"

    • 2007-12-14 19:01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희망' 저자, 전 미 육군 소령·하버드대 박사 서진규<1편>

     

    경남 한 시골에서 가난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난 서진규 씨. 공부를 미치도록 하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가발 공장 직공과 식당 종업원으로 일해야 했습니다. 스물두 살. 죽음을 생각했을 정도로 힘든 시절, 그녀는 미국에서 가정부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무작정 뉴욕으로 떠납니다.

    그 후 고생스런 미국 생활 속에서 가정을 이뤘지만, 가난과 남편의 폭력 때문에 결혼 생활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서진규 씨는 힘든 결혼 생활 때문에 서른 살이 다 된 나이에, 8개월 된 딸을 둔 엄마의 몸으로 미국 육군에 자원 입대를 하는데요. 그러나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도 그녀의 꿈을 꺾진 못했습니다.

    15년 동안 여섯 군데 대학을 거쳐 학사를 마치고, 마흔 둘의 나이에 하버드대에 입학해 16년 만에 박사 학위까지 받았는데요. (희망의 증거가 된) ‘희망’의 저자, 전 미 육군 소령이자 하버드대 박사인 서진규 씨를 12월 13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가난하고 차별받던 어린 시절... 성공하고 싶은 오기가 생긴 계기

    [BestNocut_R]▶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라는 책을 쓰신 때가 박사학위 받기 전인가요?

    네. 1999년 ‘General Exam’이라고 논문 자격시험 준비하던 때에 이 책이 알려지게 된 거죠.

    ▶ 이렇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리라고 생각하셨나요?

    사실 한번쯤 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은 항상 있었어요. 제 삶을 알린다는 것보다도 제가 살아왔던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또 이룬 것이 대단한 과정이었으니까, 그래서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것이다, 언젠가는 이 스토리를 써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한국에 완전히 가정이 파탄되고, 한국이 파산 지경에 이르게 했던 IMF가 저로 하여금 제 스토리를 빨리 쓰게끔 한 거죠.

    ▶ 그 책을 읽은 독자분들에게 편지도 많이 받으셨죠?

    예. 이메일로도 많이 오고 직접 편지로 보내신 분들도 많으세요. 처음에 자서전을 쓸 때는 사실 ‘아직은 내가 때가 아닌데, 아직 나를 이렇게 세상에 드러낼 때가 아닌데...’ 하는 겸손도 있었고 좀 부끄러움도 있었는데요. 쓰고 났더니 사람들이 그 책을 보고 제 삶을 보고 자살하려던 분이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도 다시 한 번 살아 볼 겁니다.’ 하는 편지들이 오니까 ‘아, 정말 이것이 때였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요.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도 편지를 보내는데, 저한테 ‘서진규 선배님’, ‘언니’, ‘누나’ 하고 옵니다. 그러면서 가깝게 느끼고 싶어서 그렇게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자기들의 잃어버린 희망을 찾았다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참, 이것이 삶의 보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어릴 때 이야기 좀 해보죠. 경상도 어디서 태어나셨나요?

    ‘월내’라는 곳입니다. 집안 환경이 많이 어려웠는데, 그 당시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사실 태반이었죠.

    ▶ 집안이 어느 정도로 어려우셨나요?

    제가 1948년도에 태어났는데, 그 당시 아버지가 엿장수를 하셨어요. 제 위로 언니와 오빠가 있었는데, 그러니까 다섯 식구가 먹고 살기에는 굉장히 빠듯한 삶이었죠. 처음에는 그렇게 하다가 그래도 제가 태어난 뒤로는 조금 재산이 있으셔서 엿공장을 직접 하시게 되었죠.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거의 주 노동력이었고, 그렇게 엿을 만들어서 내다 파는 정도까지 발전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밥은 그렇게 뭘 먹었든 먹고는 살았던 것 같아요.

    ▶ 어머니는 그냥 집에서 아이들 건사하고 살림만 하시던 분이었나요?

    아니죠. 그 당시에 아버지만 일하셔서는 저희 다섯 식구가 못 먹고 살죠. 노동력을 따로 두기가 어려우니까 저희 어머님이 그 공장일을 다 하셨는데, 얼마나 억척스러우셨냐 하면 열 둘을 임신하셔서 여섯을 낳으셨대요.

    그런데 한 번은 부산에 가서 쌀 한 보따리를 가져오실 일이 있으셨나봐요. 그 때 임신중이었는데, 이것을 머리에 이고 떠나려는 기차를 타려고 급하게 달리다 보니까 뭐가 물컹하는데, 보니까 유산이 돼버린 거예요. 길거리에 그냥 버려두고 기차를 타고 떠나면서 어머니 생각에는 ‘저것도 고기라고 누가 주워다가 끓여 먹으려나...’ 하고 보면서 가셨답니다. 그런 삶을 사셨죠.

    ▶ 그런 환경에서도 어릴 때부터 공부에 대해서는 남다르셨나봐요?

    그것은 제천으로 이사가면서 부터예요. 그 어릴 때 저는 정말 바보 멍텅구리였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특히 1, 2, 3학년 때는 맨날 꼴찌에서 맴맴 돌던 아이였고, 얼마나 바보였나면 초등학교에 아침반, 오후반이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침반인 줄 알고 열심히 갔는데 우리 반은 오후반, 그래서 집에 와서 한 대 얻어맞고 오후에 또 갔는데요. 때로는 오후반인 줄 알고 갔는데 우리반은 끝나고 가고 없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학교는 남들보다 가장 많이 갔는데, 결석도 가장 많이 하고 그러다보니까 꼴찌에서 맴매 도는 것은 당연했죠.

    그런데 제천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고, 언니도 시집을 가버리고, 어머니는 술장사를 시작합니다. 두 분 다 초등학교도 못 나오시고 가난하니까 뭐든지 하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어머니가 술장사를 하고, 제가 집안일을 다 맡아서 하면서 제가 원체 게으르다 보니까 거기서 반발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분노와 반항, 차별에 대한 오기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서진규를 깨우면서 그 바보 멍텅구리를 뭔가 성공을 하고 싶다는 의욕을 주게 되고 결국은 성공하기 위해서 내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가게 되는데요.

    제가 하나님에게 가장 감사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나에게 그 역경을 주셨다는 것, 그 역경이 없었다면 서진규는 그대로 바보 멍텅구리로 살다가 바보 멍텅구리로 떠났을 겁니다. 그 역경이 서진규라는 밑바닥에서 잠자는 아이를 깨워놓은 거죠.

    ▶ 어떤 차별을 받으면서 자라신 건가요?

    아무래도 가난한 술장사의 딸이니까 사회적으로 차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가끔 말로 듣는 것이고 신체적으로 협박을 받는 것은 없는데, 우리 어머니가 또 그렇게 매를 잘 드셨어요. 또 제가 직접적으로 피부에 닿게 차별하신 분이 우리 어머니셨어요. 그래서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이 아주 눈에 보이게 혹은 안 보이게 심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언니가 거의 살림을 맡아서 했으니까 제가 그런 것을 잘 못 느끼다가 직접적으로 6학년인 저한테 엄마가 살림을 다 하라고 하니까, 또 제천의 겨울이 너무 추웠고, 서진규가 부지런한 사람이고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고맙게 여기고 잘 했을텐데 저는 너무 게을러서 겨울에 발 한 번 안 씻던 아이, 그런 아이보고 추운데 나가서 밥하고 설거지 하고 빨래하고 다 하라니까 하기 싫어서 구박덩어리가 된 거죠.

    안 하면 두들겨 맞으니까 억지로 하기는 하는데, 저한테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왜 오빠가 있는데 왜 나한테 다 시키는냐 하는 것이 불만이고, 오기를 갖게 된 것이죠.

    ▶ 고등학교는 어떻게 서울에서 다니셨나요?

    제천에서는 제가 중학교까지 다녔어요. 사실 우리 부모님은 계집아이는 중학교만 나와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계셨는데, 저의 오기가 공부를 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공부가 재미있고, 목표가 있고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니까 집중이 잘 되고 성적이 올라가니까 제가 중학교 보내달라는 말 안해도 중학교를 보내 주시더라고요.

    다만 제가 제천에서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또 어머니가 술을 많이 팔려고 하다보니까 저녁이 되면 곤드레만드레 되잖아요. 어머니가 주정도 심했어요. 그 때 아버지는 철도에서 기름 받아서 기름 대주는 일을 하셨으니까 그 주정이 다 저한테 오는 거예요.

    밤마다 다가오는 악몽 같은 시간이 싫었고, 거기서 살아갈 때 언젠가는 분노, 오기, 반항으로 폭발할 수 있는 그 조건이 되어서, 내가 죽어도 고등학교는 서울로 간다고 우겨서 밥을 굶고 선생님들도 제가 공부를 잘 하니까 인정해주셔서 선생님들이 총동원해서 우리 부모님을 설득해 주셔서 고등학교는 서울 풍문여고로 가게 되었습니다.

    ▶ 어떻게 보면 지난 시절의 일들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생각도 있으실 텐데요. 너무 솔직하세요.

    제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해요. 읽으면서도 아슬아슬한, 어떻게 이런 말을 다 털어놓을까? 하는 스스로 저를 위해서 아슬아슬해지는 것이 있다는 말을 많이 해요.

    ▶ 고등학교 때 생활은 어땠나요?

    그 때 저희 작은 아버지가 한국군에서 육사8기 출신의 대령으로 근무하셨어요. 그 분이 마침 서울에서 살고 계셨어요. 그래서 잠은 그 집에서 사촌들 틈에서 자고, 쌀과 학비는 부모님이 대주시고, 나머지 생활비나 용돈은 제가 영어잡지를 팔고 가정교사를 하면서 충당했었죠.

    제천에서와는 또 다른 가난함을 느꼈죠. 서울 사람들은 제천 사람들처럼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 중에서 나만 가난하니까, 또 학교에서 친구들이 모두 나보다는 부유하니까 군것질을 해도 저는 같이 가기가 어렵잖아요. 처음에는 매번 얻어먹었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어서 친구들을 피하게 되는 열등의식, 또 다른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죠.

    ◇ 가발공장 직공, 식당 종업원... 힘든 생활 끝에 자살까지 생각

     

    ▶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셨는데 대학 진학은 못하시고, 가발공장 직공이 되셨어요.

    사실 대학을 가고 싶었죠.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우등생, 모범생에 반장까지 했는데요. 그런데 그 때 마침 우리 오빠가 폐병에 걸렸어요. 그 때 마산에 가서 여덟 명이 수술을 했는데 한 사람 살아남은 사람이 우리 오빠예요. 저는 그 때 하나님의 힘이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 번 해 본 적이 있는데요.

    왜냐하면 우리 식구가 다 불교 쪽이거나 미신 쪽인데 오빠만 유난히 중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오빠가 연애하러 다닌다고 놀리기는 했는데, 아무튼 그 오빠는 수술해서 살아남았는데, 하필이면 제가 대학을 가려할 때 우리 오빠가 대학 원서를 냅니까?

    사실 집안은 하나 대학보내기도 빠듯한 입장인데 오빠가 내니까 저는 무조건 양보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취직도 할 줄 몰라서 다른 사람들은 잘도 알아서 공무원도 되던데, 서진규는 우등생이 그것도 할 줄 몰라서 찾다찾다 결국은 시골 사촌언니가 가발공장 직공으로 일하니까 그 언니 덕에 제가 가발공장 직공이 되었어요.

    그런데 제가 소질이 좋았다면 가발공장에 계속 남아 있었을 텐데, 나는 어릴 때 성공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공부를 했었고, 성공하기 위해서 박사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어릴 때 별명이 ‘서박사’였는데, 그런데 가발공장에서 가발을 만들고 있으니까 여기하고 박사하고는 너무 멀잖아요. 그래서 막 울고 하느라고 메는 것마다 퇴짜를 맞고 많이 굶었어요. 그런데 식당에서 일하면 밥을 안 굶겠다는 생각에 관악산 골프장 식당 종업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죠.

    ▶ 얼마나 힘드셨으면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이셨나요?

    죽음은 어릴 때부터도 너무 힘들 때 죽음을 많이 생각했었고, 하나의 피신처로 생각했었죠. 하지만 마지막 용기가 없어서 죽지 못했던 것이고, 그래도 학생 시절에는 희망이 있었고 내가 시간을 투자해서 노력하면 선적이 올라가는 성취가 있었는데, 사회에 나와서는 아니었거든요.

    가발을 붙들고 앉아서 만들 때의 그 좌절, 배도 고픈데다가 마음이 고프고 희망이 고파서 결국은 끝이 암흑으로만 보여서 결국은 ‘죽자’하는 생각이 자주 떠올랐죠. 그러다가 식당에서 일하면서 배는 고프지 않았는데 거기서 또 다른 열등의식이 느껴졌어요. 가발공장에는 주변이 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서 나는 그래도 고등학교까지 나온 사람이어서 그런 데서 오는 미안함이 있었는데, 관악산 골프장에서 일할 때는 골프장에 오는 손님들이 다 사회에서 한가닥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들 사이에서 서진규는 서빙을 하면서 완전히 밑바닥 같은 느낌, 또 다른 분노와 좌절과 반항이 생기고, 저같은 사람을 무시하는 나쁜 사람도 많거든요. 그럴 때는 ‘정말 세상 뭐하러 사나, 죽고싶다’하는 생각이 많았지만 마지막에 용기는 없었어요. 그러다가 진짜 죽기로 결심하는 것은 바로 첫사랑에 완전히 빠졌다가 거기서 실연을 당했을 때, 그 때는 진짜 죽으려고 한강까지 간 적이 있었습니다.

    ▶ 첫사랑은 몇 살 때였나요?

    그 때 관악산에서 일하다가 만났으니까 열아홉 살 때였습니다.

    ▶ 어려운 환경에서 그래도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 당시에는 제가 하나님을 모를 때니까 아마도 저에게 제일 힘을 주었던 것은 바로 제 자신이었던 것 같아요. 제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제 자신이 저를 찾아와서 ‘남들이 너를 버려도, 남들이 너를 힘들게 해도, 나만은 네 곁에 있으마. 나만은 너를 지켜주마. 그리고 너는 이 세상에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너야말로 큰 일을 할 사람이고, 지금 겪는 것은 다 그 일을 위한 준비다’라고 제 스스로에게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어 죽으려 할 때 마다 ‘아직은 아니다, 이것이 하나의 과정이다. 너는 위대하게 되어서 너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이 모든 사람위에 군림할 날이 꼭 온다. 그러니까 희망을 가지고 또 다시 내일을 향해서 가자’하고 저를 이끌어주었어요. 그래서 그것이 아마 가장 큰 버팀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많이 울기도 하셨죠?

    많이 울었죠.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구하기 위해서 활용했던 것이 쓰러질 때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의 그림을 그려주면서 그 분노와 반항, 오기를 일깨워 줍니다. 그러면서 ‘두고봐라. 나는 큰 인물이 되겠다. 그 때 가서 한 번 보여주마.’하는 것을 자꾸 일깨워주고, 한때는 정의의 사도가 되고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그렇게 가난한 것은 제 죄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그렇게 버림을 받아야 했고 그런 삶을 살아야 했던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나는 암행어사가 되어서 그런 폭군들, 탐관오리들을 물리치고 쓰러져 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들을 일으켜주고 잡아주는 그런 상상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저는 도피처로 찾아간 것이 상상이었는데, 지나고 나니까 위대한 리더들, 그 사람들이 가르침을 줄 때 항상 ‘당신의 비전을 생생하게 그려보고 느껴봐라. 그러면 그것이 바로 힘이 되어서 너를 그리로 인도한다.’라는 말을 가르치잖아요. 그것을 서진규는 살아남기 위해서 찾아 낸 거죠.

    ▶ 미국으로 가는 것을 생각한 것은 어떤 계기였고, 몇 살 때였나요?

    그런데 사실 어릴 때부터 나는 언젠가는 미국을 간다는 생각이 항상 머리 뒤에 있었어요. 왜 그런지는 저도 이해를 못해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제가 갈 길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미국가정에서 식모를 구한다는 신문광고를 봤을 때, 이것이 길이 아닌가 하고 제가 수속을 시작하게 되는 용기는 바로 위기가 기회다, 실연의 밑바닥에서 버둥거릴 때 용기가 없어 자살도 못하고 했을 때 이 신문광고가 눈에 띄었기 때문에, ‘한번 해보자, 어차피 나는 죽으려 했던 목숨이고, 부딪쳐 보고 죽자’고 생각한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제 첫사랑이 저를 버리고 떠난 것이 너무 고마운 계기가 되는 거죠.

    ▶ 누가 찬 건가요?

    제가 차였죠.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아주 부잣집 외동아들이었으니까 관악산 식당 종업원과는 어울릴 수 없는 시대였죠.

    ▶ 1971년에 뉴욕에 도착하셨는데요. 이 때는 미국 가기도 힘들 때 아니었나요?

    그렇죠. 힘들죠. 그 당시 수속을 시작할 때 제가 스무 살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애들을 데려다가 매춘으로 팔아먹던 조직들이 허다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솔직히 저도 ‘이것이 매춘일 수도 있다.’하는 각오를 하고 떠난 거죠. 그래서 만약 그 경우면 거기 가서 죽자는 결심으로 떠났는데 다행히 진짜 미국 가정의 식모를 구하는 케이스였어요.

    ▶ 영어는 가능하셨나요?

    그 당시에는 화장실 겨우 찾아갈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이었고, 제 손에는 아버지가 쥐어주신 100불, 원웨이 티켓, 나는 거기서 버려지면 돌아갈 비행기표도 없는 그런 신세였죠.

    ▶ 미국 가는 것은 혼자서 결정하셨나요? 누구 의지하거나 상담할 분이 계셨나요?

    친척들은 제가 물어보지도 않는데도 무조건 안 된다고 하고, 우리 부모님에게도 “얘는 미국가면 창녀가 될테니까. 보시오, 내 손에 장을 지집니다.”하는 분들도 있을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상담을 하기가 싫죠. 하면 다 반대를 하니까요. 그런데 서진규가 다시 자신에게 ‘가라, 미국으로 가라. 너한테는 죽음의 비상구가 있는데 무엇이 두려우냐?’하면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밥을 굶어가면서 설득을 하면서 결국은 미국에 도착하게 되었죠.

    ▶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는 어떠셨어요?

    그래도 두려움과 동시에 흥분이 있었죠. ‘여기가 정말 미국이구나, 나는 결국 미국에 도착했다’ 하는, 그리고 왠지 크게 성공할 것 같은 느낌, 그러면서도 한편 ‘저 사람이 너를 팔아먹으려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같이 공존했죠. 그 때 남자분이 데리러 나왔는데, 저는 그런 혼돈 속에서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의심스러워 보였죠. 제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는 스물 두 살이었는데, 그 눈에는 진짜 다 도둑까지 보였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저를 진짜로 가정집에 소개해준 사람이었죠.

    ◇ ‘가정부’ 구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무작정 미국행

    ▶ 그래서 가정부 생활이 시작되신 건가요?

    할 뻔 했는데, 제가 수속해서 미국에 도착하기 까지 2년이 걸렸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남미 애가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저는 갈 곳이 없어진 정말 길잃은 철새가 되었죠.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자기 책임의식이 대단하거든요. 그 집 주인이 미국 할머니였는데, 그 분이 “네가 2년 동안 안 와서 우리가 남미 아이를 썼지만, 우리는 너의 스폰서니까 네가 여기 있겠다고 하면 이 아이를 딴 집을 찾아주고, 네가 밖에서 다른 일을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도 좋다.”면서, 할머니가 결정하기 전에 저를 소개해준 미스터 박과 상의를 하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연락했더니 “미스 서는 행운아입니다.

    이민으로 이미 도착했는데, 다른 일을 해도 된다하니 밖에 나가면 이 정도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오십시오.”해서 그 분이 한국에서 온 다른 분들을 소개해줘서 거기서 같이 얹혀서 살다가 나중에 한국 식당에 취직을 하게 되었죠.

    ▶ 아버지 빚을 다 갚아주실 정도로 일을 많이 하셨어요?

    식당의 웨이트레스 일인데요. 미국 식당의 일은 사실 한국의 식당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고급 식당이다 보니까 팁이 많거든요. 또 제가 관악산 골프장 식당에서 일했던 경력을 인정받아서, 1971년에 제 한 달 수입이 1천불이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는 1만원 받던 월급이었는데, 1천불을 받으니까 엄청난 돈이죠.

    그 때 제천에서 도시계획으로 집을 옮기는데 한 3천불이 드는데 제가 부족한 1천2백 불도 꿔드리고, 전에 비행기표값, 수수료도 다 아버지가 빚을 내서 해주셨거든요. 그래서 그것 다 갚고, 또 부모님한테 안 받고 자란 아이들은 부모님한테 인정을 받고 싶어서 뭐든지 더 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그 심리가 작용을 해서 용돈을 많이 보내드렸죠. 저한테는 별로 큰 돈이 아니었는데 제천에 가면 엄청나게 큰 돈이어서, 제천에서 아주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죠.

    ▶ 어떻게 보면 미국생활이 편해질 만도 한데, 만족하지 않으시고 늘 새로운 목표 설정을 하셨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항상 상상 속에서 박사가 되는 꿈을 꾸었거든요. 'Power of Dream'이라고 할까요? 저한테 항상 그런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을 갔던 것도 물로 살아남는 것 외에도 제가 꿈을 이뤄서 ‘두고보자. 언젠가는 보여주리라.’하는 꿈, 상상, 비전 속에서 봤던 그 멋진 꿈을 성취를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먹고 사는 것이 급했지만, 이제는 먹고 사는 것도 되고, 돈도 되니까 그 이듬해부터 학교를 찾아서 유학생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죠.

    ▶ 역시 꿈이 생활 속에서 하나의 키워드가 되신 거군요.

    그것이 하나의 구심점, 원동력, 에너지가 되었죠.

    ▶ 미국생활 얼마 만에 대학을 진학하게 되신 건가요?

    1년 만에 했습니다. 1971년에 가서 1972년부터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죠.

    ▶ 강의 쫓아가는데 어렵지 않을 정도의 영어실력은 되신 건가요?

    영어실력이 훌훌 날기는 커녕 발발 기었습니다.(웃음) 그리고 같이 공부를 해봤지만 사실 유학 온 사람 중에 영어를 아주 잘 하는 사람은 거의 못 봤습니다. 그래서 저도 시간 들여서 열심히 외우고 공부하고, 또 제가 TV를 많이 봤습니다. 밤에 잘 때마다 귀신나올까봐 무서워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밤새 TV를 보던 것이 영어실력 늘리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요.

    나중에는 영화같은 것을 봤을 때 거기서 나오는 장면이 일상생활에서 비슷한 장면으로 나타나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영화에서 봤던 어떤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경우도 생기고요. 그래서 저는 영어회화는 TV가 저를 가르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어요.

    ▶ 하버드 대학으로 바로 들어가신 건가요?

    어이쿠, 그렇게 될 자격까지는 없죠. 그건 완전히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서 보내면 모를까, 일반인의 힘으로는 될 수 없다고 저는 봅니다.

    ▶ 그럼 어느 대학에 들어가셨나요?

    ‘버룩 칼리지’라고 미국 뉴욕에서 회계학으로 유명한 곳에 입학하게 되었죠. 그리고 하버드는 나중에 군에 있으면서 하버드를 들어가게 되었죠.

    ◇ 매 맞고 살던 불행한 결혼 생활... 도피처로 떠난 군대

    ▶ 그 사이에 결혼도 하신 거예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저녁에는 식당에서 계속 일을 하다가 한국에서 갓 온 합기도 검은 띠 7단, ‘부르스 리’ 같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사랑에 빠지고, 모두가 반대하는데 제가 'Yes'하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사실 저도 꽤 인기가 있어서 외교관들의 청혼도 들어오고, 재벌 아들, 유학 오는 사람들한테 청혼이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있었는데, 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진짜 한국에서 돈 한 푼 안가지고 온 사람한테 빠져서 제가 결혼을 하게 됩니다.

    ▶ 더구나 기혼자였던 분이었나요?

    기혼은 아니었는데, 결혼 전에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 이런 얘기 하는 것은 왠지 안 했으면 하는 표정인 것 같아요.

    아니요. 저는 이미 자기 스스로에게 어려운 사람들 구제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어릴 때부터 자신을 부추기면서 왔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다 털어놓는 이유가 그런 힘을 안 가지고 힘들게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지 않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나도 당신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는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매 맞았던 것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매 맞는 것이 왜 부끄러운 일입니까? 내가 자초를 한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었던 희생자인데, 그걸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죠. 때리는 사람이 부끄러워해야죠.

    ▶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 남편분과는 어떻게 하신 건가요?

    그 당시에 사실 분노와 반항이 생겼어요. 엄마한테 맞는 것과 남편한테 맞는 것은 느낌이 또 다르거든요. 거기서는 진짜로 이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너무 강하게 일어나서 이러다가는 언젠가 나는 이 사람을 찌를 것이라는 두려움에 나중에는 제가 더 두렵더라고요. 우리 인간은 다 살인마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뿐이죠. 저도 그런 가능성이 두려워서 그런 가능성으로부터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제가 찾아가게 된 것이 미군에 입대를 하게 되죠.

    ▶ 이혼을 하고 가신 건가요?

    이혼을 못 하고 갔죠. 이혼을 하려고 했는데, 증오와 사랑과 외로움이 같이 공존하고 있다 보니까 매 맞을 때는 미워서 죽일 생각도 하고 헤어지려고 몇 번 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아직 결혼한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사랑이 아직 식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또 다시 나를 설득해서 다시 합치게 되고 하는 것이 중복이 되는 과정에서 이러다가는 결국 언젠가 내가 이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군대에 가면 몇 개월간 떨어져 지내니까 내가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입대를 하게 되었죠.

    그런데 입대하기 얼마 전에 유산을 하게 되어서 완전히 만신창이의 몸으로 피신처로 군대를 갔었죠. 또 훈련이 시작되면 6개월간 집에 못 가요. 그러니까 딸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서 아는 사람을 통해서 제천의 부모님께로 태어난 지 8개월 된 아이를 보냈습니다.

    ▶ 왜 또 그렇게 인생이 기구해진 걸까요?

    아마 크게 이루라고 그런 것 같아요. 지금도 매 맞고 사는 분들이 많잖아요. 남자분들 중에도 10%가 매 맞고 산다고 들었는데요. 그들까지도 아마 제가 도움을 주라는 메시지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런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지금 현실이 끝이 아니다, 이것을 현명하게 이기고 나가면 그야말로 다른 사람의 삶까지 살려주는 엄청난 이룸이 가능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마 그것을 해달라고 저를 그런 인생 가운데 둔 것 같아요.

    ▶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로 가신 것이 잘한 선택인 것 같으세요?

    그럼요. 군대를 들어갈 때는 어딘지도 모르고 이쪽이 너무 뜨거워서 그 쪽으로 뛰어 들어간 것인데, 들어가고 보니까 이게 바로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영화를 만들어도 한 열 편을 만들 정도로 파란만장하세요.

    ‘잭 캔필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속에 영화가 아주 여러 편이 들어 있다고 말이죠.

    ▶ 오늘에 이어 내일도 서진규 박사와의 만남이 계속됩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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