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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노동운동이 삶, 시대의 현장에 동참했을 뿐이죠"

    • 2007-10-29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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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40년 선한 싸움꾼, 노동운동가 박순희 씨

     

    한국 노동운동의 산증인 박순희 씨…. 1968년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시작으로 원풍모방 노조 부지부장,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공동대표, 민주노총 지도위원, 평택 대추리 지킴이 등 40년을 노동운동, 나아가 사회·평화운동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철도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박순희 씨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처음 공장 일을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라고 하면 빨갱이로 몰렸고, 공장떼기, 공돌이와 공순이로 불리던 때,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접하고 고민 끝에 두 차례나 수녀가 되려고도 했습니다. 75년 원풍모방에 입사, 정부의 극심한 탄압 속에 민주노조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고, 정부의 협박과 수배, 해고를 무릅쓰고 활동하다 82년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는 온 세상의 금은보화를 다 합친 것보다 귀한 존재”라는 말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온, 선한 싸움꾼 박순희 씨의 삶을 10월 26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봤습니다.

    ◇ ‘선한 싸움꾼 아녜스’ 노동자와 함께 한 노동운동 40년

    [BestNocut_R]▶ 우리나라 1960년대는 정치, 사회, 경제의 격동기인데요. 노동현장에서 삶과 권익향상을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셨는데 직접 보니까 정겨운 이웃, 선한 아주머니의 모습이네요. 싸움을 걸기 보다는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그렇죠. 싸울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신앙으로 이야기하면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하거든요. 불의에 항거해서 정의롭게 만드는 싸움이기 때문에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합니다.

    ▶ 그러다 보니 회갑을 맞이하셨어요.

    지난 10월 19일에 회갑을 치렀어요. 700명 정도가 오셨는데 너무 황송해요.

    ▶ 최종수 신부님이 축시를 쓰셨는데 제목이 <피리 부는 여인>이에요. 버들피리처럼 키가 작고 소박한 그녀가 피리를 부는 까닭은 사람과 세상을 향한 연민에서 비롯되었다. 강을 내달리면 나지막한 산으로 이어지고 나지막한 산에서 내려오면 거울에 내비치는 강이 흐르듯 피리는 그녀의 손에만 닿으면 천리향처럼 향기를 내었고 바람을 타고 휘휘 산과 들, 마을로 퍼져나갔다. 햇빛 쨍쨍한 날은 시원한 빗줄기가 되었고 그늘진 곳에서는 따뜻한 노래가 되었다...‘순희’라는 이름이 아주 순한 여자라는 뜻인데 이름과는 다르게 선한 싸움꾼이라는 별명을 얻으셨어요.

    선한 싸움꾼이라는 것이 성경에 있어요. 꼭 선한 싸움꾼은 아니지만 ‘디모데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서 활동하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정의를 향해서 달려올 길을 다 달려왔고 싸울 것을 다 싸웠다. 이제 나를 보고 당신들도 싸우면서 정의를 실현하면서 살아라, 이런 게 있거든요. 그 자체를 풀이해 보면 선한 싸움꾼이에요.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에서 선한 싸움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투쟁이거든요. 뭔가를 변화시키기 위한 앞서가는 싸움인 거죠. 그냥 싸움꾼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싸우지만 선한 싸움꾼들은 이웃과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변화,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엄한 인권을 찾기 위한 그런 노력들, 이런 투쟁이 선한 싸움이겠죠.몰랐는데 어디에 가서 사람을 만나면 선한 싸움 이야기를 많이 했대요.(웃음) 그래서 후배들이 저한테 붙여준 이름이에요.

    ▶ <선한 싸움꾼 박순희 아녜스> 책의 내용을 보면 삶의 여성기둥이라고 해서 1살부터 10살, 11살부터 20살, 이렇게 60살까지 나누셨어요. 내용을 보면 왜 이렇게 고단하게 사셨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애초에 선한 싸움꾼이 되려고 하신 것도 아닌데 운명적으로 되신 건가요?

    저는 운명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 소명에 충실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천한 노동이 싫어’ 그걸 피하려고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 첫 출발이 천주교 성당하고 관련이 있으시던데요.

    아기 때 유아세례를 받았어요. 그리고 할아버지 대부터 부모님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셨고요. 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당시에 아버님이 철도청에 근무하셨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직장이 있으셨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못살았던 것도 아니었더라고요. 지금은 교대가 있지만 그 전에는 사범대를 가면 바로 선생님을 할 수 있었잖아요.

    위에 오빠 한 분 있고 남동생 둘에 여동생 하나니까 여자로서는 제가 장녀인 거죠. 만약 고집을 부렸으면 제가 공부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양보가 되었고 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당시에는 취직도 힘들었는데 저는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 노동자라는 말도 못 썼잖아요. 이름도 없었어요. 공장떼기, 공순이, 공돌이, 이렇게 불렀죠. 그런데 저는 그게 너무 천박하게 느껴졌어요. 왜 저렇게 천한 노동을 하나...그래서 그걸 피하려고 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것 같아요.

    결국 성당에도 반항심이 생겨서 2,3년간은 나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부모님이 얼마나 신앙이 좋으신지 일요일에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지 않으면 밥 먹을 자격이 없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와서 밥을 먹어야한다고 하실 정도로 엄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반항심에 그러니까 아무 말도 못 하시더라고요.

    저 나름대로 공부하겠다고 학원 다니면서 독학하다 보니까 돈이 없잖아요. 바로 앞집에 조그만 학성모직에 다니는 상무님이 사셨어요. 앞집 아저씨가 상무였던 거죠. 그래서 어떻게 그 아저씨한테 이야기를 해서 금방 회사를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사무실 급사로 두더라고요. 그러다가 2달 정도 되었을 때 제가 생각하기에 어차피 직장에 들어왔으면 돈을 벌어야 되는데 거기에 있으면 돈이 안 될 것 같아요. 학교 선생님이 되려면 돈이 있어서 쉬면서 공부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돈을 더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해서 현장으로 보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현장으로 갔죠. 그때는 기술을 배워서 한 번 회사를 옮겨야 경력도 되고 일당이 높아는 거였어요. 1년 동안 현장에 있으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주야로 24시간 돌아가니까 12시간 교대로 근무했어요. 양복기지 짜는 회사였는데 현장에 갈 때 언니들한테 들은 정보로는 기술직으로 직포를 짜는 게 가장 돈도 많이 벌고 인기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 부서로 보내달라고 그랬죠. 그래서 제가 양복기지 짜는 기술자에요.

    ▶ 그때가 몇 살 때였어요?

    19살 때였어요. 거기서 1년 동안 기술을 배워서 대한모방으로 회사를 옮겼어요. 기능공으로 대한모방을 가면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몇 년 동안 돈 벌어서 공부하러 나가려고 했는데 가톨릭에 열심히 다니는 ‘송숙자’라는 친구를 하나 만나게 되었죠. 그때 저는 반항심에 가득 차 있었죠. 학교 진학 안 시켜주고 하고자 하는 꿈을 이루어주시지 않는 하나님, 원망의 하나님이었거든요.

    그래서 내 능력으로, 세상의 능력으로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 친구가 성당에서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참석해보자는 거예요. 거기가 ‘가톨릭노동청년회 일반회’였어요. 의식을 깨우치는 모임이었는데 4번째 권할 때 못이기는 척하고 나갔죠.

    ◇ 산업역군, 배달의 주인공은 수탈을 위한 미명

    ▶ 당시에 일하시는 분들에게 ‘권익’이 있었나요?

    전혀 없었죠. 노동자는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주종관계에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하라는 대로 했지 8시간 노동이 어떻고 노동법이 어떻고, 그런 부분은 전혀 없었어요. 오죽하면 전태일 열사가 70년대에 평화시장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여공들의 모습을 보고 이건 정말 아니라고 절규했겠어요.

    전태일씨 본인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어요. 근로기준법이 있어도 노동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근로기준법을 껴안고 70년 11월 13일에 분신을 했잖아요. 그러면서 노동문제가 사회문제화 된 거죠.

    그때부터 법조계나 학계, 종교계에서 노동자들의 현실이 이렇게 비참하구나, 우리나라가 농업국에서 산업국으로 변하면서 경제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했지만 ‘선성장 후분배’라는 미명하에 더욱 수탈당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소리를 그때 듣기 시작한 거예요. 그때부터 관심을 갖고 뛰어들기 시작했어요.

    ▶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드신 게 언제부터였어요?

    성당에 친구 인도로 가톨릭노동청년회 일반회 모임에 갔는데 신부님이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고귀한 인간의 존엄성에서 노동은 나오는 거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역사를 노동을 통해서 하셨다. 그래서 노동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사업의 조력자이고 계승자이고 또 노동이 없으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시면서 노동에 대해서 힘과 긍지를 주시는 거예요. 그때 제가 눈이 확 뜨였죠, 귀가 열리고.

    ▶ 그때도 산업역군이라는 표현도 있었는데요.

    산업역군, 생산의 주인공이라고 했지만 그건 하나의 노동자를 부려먹기 위한 수단이었지 권익을 위한 실현은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있어요.

    ◇ 경찰서 면회 갔다가 임명받은 노동조합 부지부장

    ▶ 노동조합 부지부장이 되신 건 언제에요?

    1976년이었어요. 저는 사실 노동조합에 깊이 관여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신앙인으로서 정말 노동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 기쁜 소식을 열등감에 빠져 있고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들한테 힘을 주면서 노동을 기쁘게 하려고 했지 노동운동에 깊이 발을 들여놓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활동을 하다 보니까 노동조합 사람들이랑 만나게 되고 노동조합은 머릿수는 많은데 힘이 없다, 노동자의 힘은 많은 사람들의 단결이고, 그것이 힘이다 보니까 노동조합을 조직하게 되는 거죠. 그러던 과정에서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보면서 너무 두렵고 무서웠어요.

    당시 우리 나이 20살, 21살이면 다 결혼을 했거든요. 집에서는 결혼해야 한다고 선도 들어오는데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갈등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때 생각하기에 더 이상 깊이 노동자들과 살다가는 전태일 열사처럼 죽을 수도 있겠구나, 저는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고요. 그렇지만 혼인을 하면 지금까지 이 좋은 가치를 발휘하지 못할 것 같고, 그래서 수녀원을 생각했어요.

    ▶ 그때 선도 좀 보셨어요?

    선도 봤죠.(웃음) 한두 번 본 것 같아요.

    ▶ 전태일 열사 사건을 계기로 해서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데요. 직접 노동현장에 들어가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1971년에 대한모방을 사퇴하고 수녀원에 갈 준비를 3년 동안 했어요. 다시 돌아봐도 노동현장이더라고요. 노동자들한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그래서 75년도에 원풍을 들어갑니다. 그때 우리나라에 산업화가 한창 일어날 때에요. 68년도에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알았는데 구로공단이 형성되었을 때에요.

    75년도는 공장도 많아지고 노동문제가 더욱 심각했었죠. 소명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으로 원풍모방에 들어갑니다. 들어가서도 노조간부나 이런 건 하지 않고 삶으로 보여주는 공동체를 지향했어요. 그래서 외국 수녀님들하고 구로공단에서 공동체를 시작했어요. 그것만 하려고 했는데 원풍모방 지부장이 노동문제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되었어요.

    남부경찰서에 있었는데 제가 활동한 걸 아니까 저보고 면회를 오라고 하더니, 내일 고척동 형무소로 넘어가는데 상집회의에서 벌써 저를 부지부장으로 임명을 해놓고 경찰서에 면회 오라고 해서 지부장이 저한테 위임을 다 하고 가는 거예요.

    ▶ 그래서 진정제를 드신 건가요?

    그렇죠. 지부장은 교도소로 넘어가고 그 이튿날부터 바로 나왔는데 당시 조합원들이 1,800명이었어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려니까 얼마나 떨려요. 도저히 떨려서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진정제 좀 사다 달라고 했더니 팥알만한 게 있어서 2알 먹고 시작했죠.

    ▶ 박정희 정권의 노조탄압은 아무래도 사측보다는 노조 측에 피해가 더 많았던 거죠?

    군부 유신독재라는 용어를 쓸 수밖에 없는 게 바로 그런데 있잖아요. 75년도에 원주교부의 지학순 주교님이 양심선언을 하셨고 또 신부님들이 정의구현 사제단을 만들어서 기독교 목사님들과 함께 시국선언을 명동성당에서 하셨고 그때의 긴급조치가 대단했었죠.

    ▶ 그리고 YH무역 사건도 큰 사건이었어요.

    그때 절규할 수밖에 없었는데 오죽하면 신민당 당사를 가서 배고파서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고 했겠어요. 실제로 그때는 생존권 투쟁이었거든요. YH무역 노동자의 플랜카드를 보면 ‘배고파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절실한 구호였는데 공권력이 투입돼서 김경숙 씨가 죽은 거죠. 그것과 함께 부마사태가 나면서 순했던 국민들이 더 이상은 안 되겠다 해서 노도같이 일어나서 박정희 정권이 18년 만에 끝장이 난 거예요.

    ◇ 전두환 정권 들어서면서 100년 후퇴한 노동법

     

    ▶ 그 다음 정권인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전두환 정권이 광주의 수많은 민중을 학살하면서 첫 번째로 시작한 게 뭐였는가 하면 노동운동 탄압이었어요. 5.18나고 19일에 바른 말 하고 민주적으로 노동운동을 했던 노조간부들의 집을 새벽에 급습했어요. 다 보안사에 잡아가서 고문하고, 그때 당했던 고문을 말도 못합니다.

    우리 사업장을 비롯한 몇 몇 사업장은 집을 안 들어가서 안 잡혀 들어갔죠.그러다가 7월에 노동계에 대정화가 일어나면서 우리 같은 경우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가 되었다고 누명을 씌워서 수배를 내렸어요. 9개월 동안 수배를 당하고 다음 해 지학순 주교님이 조사를 받고, 그러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을 그만하고 공무원으로 가서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하라고 회의를 했죠.

    그리고 노조 간부를 다 해고시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감옥에 보내고 또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거기에 찍힌 사람들은 전국 어디에 가도 취업을 할 수 없도록 명단을 돌렸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노동을 해야 먹고 사는데 노동권까지 박탈당하니까 이건 사형보다 더한 거예요. 그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또 전두환 정권이 들어와서 노동법도 100% 개악이 되었잖아요.

    요즘에 산별노조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시에는 어용이라도 산별노조였어요. 이 산별노조로 인해서 노동자들의 힘이 더욱 커진다고 해서 기업별로 노동조합을 분산시키도록 만들었어요. 그리고 제3자 개입금지법을 만들었는데 노동자가 억울하게 당했으면 노동법에 이런 게 있다고 그 권리를 찾게끔 해줘야 하잖아요. 옆에 있는 동료나 아들, 딸이 억울하게 당해도 아버지가 그 문제에 개입해서 그 사람이 뭘 하게 만들면 3자 개입이 되는 거예요. 이걸 신앙인으로 말하자면 이웃사랑 금지법이죠. 그래서 이것 때문에 무척 많이 싸웠어요.

    ▶ 그러면서 감옥에도 가셨는데 어떤 죄목으로 가신 거예요?

    1980년대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저는 김대중 씨를 보지도 못했는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엮더라고요. 왜냐하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노동 쪽과 학생 쪽을 엮어야만 모양새가 되거든요. 김대중 씨 혼자 정치인들만 했다고 하면 안 사니까 우리하고 엮은 거예요. 서울대 총학생회장 쪽과 우리 노조 쪽을요. 그래서 80년대에 우리는 수배당하고 해고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어디에도 못 갔죠.

    또 이때 70년대에 만들어진 노동조합을 차례대로 다 파괴를 해요. 원풍모방은 우리 노조 지도부만 없애면 무너질 줄 알았는데 후임들이 너무 잘했어요. 그랬더니 82년 9월 27일에 KBS, MBC 앞세우고 회사 구사대와 함께 노동조합을 강점했어요. 지부장에게 강제로 사표를 내도록 했지만 끝까지 안 냈죠.

    그랬더니 난지도 쓰레기장에 갖다버리고, 그 사건 다 말로 할 수 없어요. 그 사람들이 다 쫓겨나서 병원에 있을 때 제가 병원비를 모금해서 줬거든요. 그랬더니 그 사람들 도와줬다고 제3자 개입금지법으로 구속이 된 거예요. 영등포 구치소에 구속되었죠.

    ▶ 처음 들어가셨을 때 느낌이 어떠셨어요?

    일본순사, 감방, 이런 생각해서 그렇지 저는 좋은 체험을 했다고 생각해요. 1년 동안 책도 많이 읽고 자신에 대해 정리도 많이 했어요.

    ▶ 타월 한 올씩 뽑아서 가제수건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동료들이 많이 들어가니까 마음이 쓰이잖아요. 감옥에서 아무 것도 못 하는 줄 아는데 다 하는 게 있어요. 수건을 들여보내주면 감옥에서도 수건은 받아주니까 그 올을 하나씩 빼요. 그 올을 빼면 나중에 가제수건이 되거든요. 그러면 가제수건에 뺀 실을 가지고 바늘이 없으니까 건방이 들어오면 작은 생철 핀이 있어요. 거기에 코를 잡아서 수를 놓는 거예요. 그걸 주고받았다는 얘기에요. 무료함도 있었고 동료에 대한 사랑도 있었어요. 이걸 받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고요.

    ▶ 감옥까지 가셨을 때 가족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저희 가족은 신앙이 바탕이 되어서 그런지 잘 받아들이셨어요. 제가 지난 번 회갑 때도 오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는데 우리 오빠도 제가 하는 일에 대한 타당함, 올바름 같은 걸 인정해 주셨어요. 저를 담당하는 사람이 4명이었는데 늘 저를 따라다녔어요. 회사담당, 집 담당, 노조담당, 또 수녀원에 가는 짐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와서 운동으로 사니까 부모님과 같이 안 살고 자취를 했을 때니까 자취집 담당이 있었죠.

    그런데 부모님 집에도 담당이 따로 있었던 거예요. 오빠가 조그만 회사를 운영했는데 계속 압력을 넣으니까 오빠가 항의를 했죠. 그래서 오빠가 나를 대신해서 많이 싸워주셔서 당당할 수 있었어요.그래서 감옥에 갔을 때도 내가 왜 이러나 하는 비참한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 노동운동이 삶, 시대의 현장에 동참했을 뿐

    ▶ 청와대에서 시위할 때 경찰차에 들이받혀 교통사고를 당하시기도 하고 불면증으로도 고생하셨는데 건강은 어떠세요?

    초기에는 긴장과 떨림도 있고 또 분노도 있어서 불면증에 걸려서 몇 달간 고생했어요. 그리고 머리가 너무 아파서 검사를 했더니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뇌파가 늘어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초기에는 많이 아팠는데 지금은 단련이 돼서 아프지도 않고 잠도 잘 자고 마음이 여유롭게 평안해졌어요.

    ▶ 상황에 떠밀려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는데요.

    그렇죠. 요이 땅 하고 내 계획이 이렇게 살 거라는 건 전혀 아니었으니까요. 시대에 현장에서 그때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산 게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지금 후배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노동운동은 삶이다. 노동운동 따로 삶 따로 이거 아니다. 그리고 세상에 노동 안 하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냐?

    노동을 통해서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되고 자녀도 번성하고 사회에 기여하고 사는 건데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나 투쟁을 일삼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 노동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나라가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이건 폐해다. 정말 노동자라고 하면 당당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찾고 권익을 수호하는 차원에서도 반드시 해야 한다.

    그리고 70년대는 노동자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했지만 못 배운 게 한이 돼서 논 팔고 밭팔아서 자녀들 공부시켜 놓으니까 오늘날 노동자들은 석사, 박사에요. 그런 사람들이 지금 비정규직으로 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비정규직으로 안 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합니까?

    이건 우리 사회가 잘 못 의식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모순을 겪고 있는 거예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각 가정마다 없는 집이 어디 있어요? 1,500만 명 노동자 중에 6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결국 노동문제는 나의 문제이고 우리 가정의 문제이고 사회의 문제라고 봐야 하는 거죠.

    ▶ 갈등과 반목이 계속돼서 기업이 외국으로 나가기도 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기도 하는 것 아닌가, 또 귀족노조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는데 아직도 투쟁적인 노동운동이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견도 있어요.

    그게 핵심인데요. 언론이나 국민들을 올바로 가르치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까워요. 사실은 사실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우리나라가 양극화 현상이 심하잖아요. 이게 뭔가 하면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이거든요. 가진 사람은 내려놓고 없는 사람은 올려놓고 중간집단의 역할, 다리 역할을 하면서 다함께 더불어 사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속담에도 99개 가진 사람이 1개 뺏어서 100개를 채운다고 하듯이 이런 정신이 있는 한은 우리 노사문제는 갈등구조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를 대기업노조, 귀족노조라고 하면서 돈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 노동자들 돈 많이 받아야 하죠. 우리 선진국 수준으로, 사회가 좋게 가려면 차별 임금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왜 노동자들이 덜 받아야 하는가?

    아니거든요. 대학을 나왔다고 비정규직으로 가지 않으려고 하고 중소기업으로 안 가려고 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는 3D를 안 하려고 하는데 그것까지 우리나라 노동자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학 나오고 박사 되었으면 그거 못하나요? 그런 의식이 사라졌을 때 노동문제도 투쟁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투쟁의 관계가 해소된다고 봅니다.

    제가 즐겨 쓰는 말이 평화인데 평등할 평(平)자에 화(和)를 보면 벼화(禾)에 입구(口)잖아요. 입으로 들어가는 쌀이 골고루 나누어져있는 것이 평화다, 평화의 의미가 그런 거죠.

    ▶ 너무 가슴 아파서 잊혀지지 않는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요즘 비정규직 법이 통과되면서 가장 먼저 터진 게 이랜드, 뉴코아잖아요. 그걸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프고 눈물이 날 수 밖에 없는 게 뭐냐 하면, 그래도 70년대는 산업화가 되면서 꽃다운 아가씨들이었어요. 운동을 하다가 결혼을 하면 되었는데 지금 비정규직으로 고생하는 아줌마 노동자들은 자녀들 있죠, 생계는 꾸려야 하죠, 벼랑 끝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절실해요.

    그 사람들 한 달에 고작 7,80만원 받는 거예요. 그런데도 비정규직을 끊으려고 용역을 주고, 자본을 우선으로 하면서 인격을 짓밟는 건 아니다 이거죠. 돈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거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인격적으로 벌어야죠. 그렇게 인격을 짓밟고 남을 아프게 하면서, 나만 살겠다고 했을 때 이게 맞는 거겠어요?

    ◇ 다시 태어나도 나는 영원한 노동운동가

    ▶ 요리가 수준급이라고 하던데요?

    저는 혼자 살아도 혼자 살았다는 느낌이 없어요. 저희가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현장에는 못 가지만 노동자는 사람을 만나고 살아야 하잖아요. 80년대에 노조가 파괴당하고 나서 저 같은 경우도 전라도로 내려가서 노동자의 집에 있었는데 마침 활동을 많이 하셨던 문정현 신부님, 문귀현 신부님이 전주 쪽에서 활동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노동자들의 사랑방이 되었죠.

    꼭 노동문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도 이야기하고 이성문제도 이야기하고 가족문제도 이야기하면서 같이 밥해 먹고 같이 놀기도 하고 현장 이야기도 했어요. 또 해고를 우르르 당하면 몇 십 명씩 몰려와서 마당에 솥 걸어놓고 밥 해먹고 하면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면서 먹었던 밥이기 때문에 맛있다고 하는가 봐요.(웃음)

    ▶ 자신이 걸어온 길, 삶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세요.

    이번에 환갑을 맞으면서 여러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내가 이 기회에 진솔한 말을 처음으로 하는데 나라고 욕심 없고 나라고 하고 싶은 거 없겠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때마다 정화라고 할까,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 때문에, 신앙을 통해서 살았기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노동자 출신으로 혼자 60을 산 건 대단한 거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웃어요.(웃음)

    사람들은 저보고 지금까지 살면서 감옥에 다녀오고 수배도 당하고 중앙정보부, 안기부, 보안사 등을 거치면서 너무 힘들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지금도 또 그런 일이 닥치면 그럴 수밖에 없지, 또 감옥에 가야 하는 거면 가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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