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권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흔히 말하는 ‘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에 띄게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평생을 한길만 바라보며 열심히 살아온 덕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됐습니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 경북대 석좌교수…그는 미국 유학시절 설익은 옥수수를 따먹으며 옥수수 육종기술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는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수확량 많고 알이 굵은 종자 개발에 열정을 쏟았죠.
그는 옥수수 씨앗을 열쇠 삼아, 세계 평화의 문을 두드리는 녹색혁명가이기도 합니다.
아프리카 기아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북녘 땅에서 배고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동포를 돕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평화를 위한 씨앗’ 개발에 몰두하는 사람, 평화는 식량 문제가 해결될 때 이루어진다는 신념으로 평생을 옥수수에 매달린 사람… 옥수수 박사 김순권 경북대 석좌교수 만나봅니다.
◇ 슈퍼 옥수수, 기존의 옥수수보다 품질 뛰어나
▶ 이번에 사료용 슈퍼 옥수수를 개발하셨다고 하던데요. 기존의 옥수수와는 다른 것이 많습니까?
예. 엄청나게 다릅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공부해 와서 만든 옥수수는 강원도 산골의 밭에 서 잘 자라는 곡식용이었습니다. 그것이 ‘수원19호’라는 것인데, 사료용으로 남쪽에선 30년 동안 제일 많이 심어졌죠. 그러다가 이번에 만든 것은 순수 사료용입니다. 옥수수의 영양가 중에 절반은 이삭에 있고, 나머지 잎, 대에 있는데 이것을 완전히 이용할 수 있는 옥수수가 개발되어서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어요.
▶ 어떻게 그런 옥수수를 알아내셨어요?
저희들이 북쪽을 돕는데, 북쪽은 질보다는 양이 많은 것이 문제이지 않습니까? 늦어져도 좋으니까 양이 많은 것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저희가 그 점을 중심으로 해서 3만5천종을 경북대학교에서 정부 과학기술부 지원금으로 만들어서 북한에 25군데 연구소에서 공동 연구를 했습니다. 그 중에서 최근 2종을 골라냈는데 아주 월등하게 미국산보다도 품질이 뛰어납니다.
▶ 박사님께서 연구하시는 교잡용 옥수수는 유전자 변형 옥수수와 다른 건가요?
저는 유전자 변형을 솔직히 반대합니다. 유전자 변형을 안하고도 얼마든지 공생옥수수로 지구의 환경을 고치고 식량해결을 할 수 있습니다. 병.벌레에 강한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한 가지는 완전히 100% 강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주로 강한 유전자에 의한 GMO 타입입니다. 그러니까 병.벌레를 완전히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하는 일은 그것이 아니고 벌레도 지구상에 태어났으니까 살아남아야 하잖아요? 병.벌레가 자연적으로 진화하게 95%만 강하게 하고 한 5%는 놔둡니다. 그러면 농약을 뿌릴 필요가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농약을 뿌리면 뿌릴수록 더 뿌려야 하거든요. 계속 뿌리다보면 나중에 돌연변이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이 하는 것은 GMO와 완전히 전혀 다릅니다. 완전히 새로운 공생원리에 의해서 지구환경을 지키고 기후 변화를 막는 것입니다. 또 제가 주창한 이론은 아니더라도 ‘공생원리에 의한 육종’ 이것은 그 이론을 만들고 거기에 대한 논문도 굉장히 많이 발표했습니다.
◇ 북한의 어려운 식량난, 너무 가슴 아파
▶ 수퍼옥수수 개발은 북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출발했던 것이 맞나요?
그렇게 봐도 이상이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전세계가 개발도상국은 안된다고 했던 그교잡종 옥수수 1대 잡종을 이용한 겁니다. 한 번 종자를 쓰면 그 다음에는 못 씁니다. 쓰면 수량이 반으로 줄어들죠. 그것을 우리나라에 안된다고 했는데 두 개의 원종을 결합해서 잡종을 만드는데, 안된다는 것을 제가 보니까 저같은 촌사람 농사꾼이 안하면 그것을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미국 사람에게도 지혜를 줬는데 왜 우리가 못하나 해서 거기에 대한 도전을 시작했죠.
▶ 그래서 북한 동포 도와주는 것 때문에 북한으로 납치당할 뻔 했다는 얘기는 뭡니까?
제가 미국에서 졸업식도 참석 안하고 한국에 와서 농업진흥청에서 ‘수원 19호, 20호, 21호’ 라는 그 당시에는 사실 수퍼 옥수수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런 용어는 그 당시에 몰랐죠. 옥수수 박사라고 한 것은 강원도 농민들이 자기 밭에 저를 데리고 가면 “옥수수 박사, 옥수수 박사” 해서 된건데, 그렇게 성공하고 난 뒤에 1975년도 유엔에서 저를 발령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나라에서 성공을 해야 가지 절대 안 간다고 해서 1979년에 성공을 해서 유엔에 갔는데 1980년도 봄에 흑인들 두 사람이 와서 납치를 시도하다가 북쪽이 옥수수가 하도 필요해서 저를 데려가려고 했던 것이라고 판명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 ‘증산’ 이라는 것은 알곡의 크기 얘깁니까? 옥수수가 더 열리는 걸 말하는 겁니까?
‘수원 19호’ 같은 것은 우리 옛날의 재래종보다 알곡이 두 배는 더 많이 나왔어요. 전체 단위면적의 수량이 많이 나오는 거죠. 병.벌레도 별로 안 걸리고, 바람이 불어도 잘 서있고, 농사짓기도 좋고요. 옥수수를 볼수록 아주 아름답습니다. 기분도 좋고, 아주 양도 많고, 영양가도 아주 높고, 농약도 전혀 안 뿌려도 되고요. 그렇게 ‘수원19호’는 알곡 중심인데, 이번에 만든 사료용 수퍼 옥수수는 알곡뿐만 아니라 가축이 먹을 수 있는 나머지 50%의 ‘대’가 아주 뛰어납니다.
▶ 1998년부터 북한을 다녀오셨던 건가요?
그렇죠. 제가 1998년 1월 달에 최초로 북한의 초청을 받아서 다섯 번 연속적인 초청장이 와서 통일부 허가를 받고 정식으로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북한에 다녀오게 된 거죠.
▶ 농촌의 현실이 너무 어렵다, 피폐하기까지 하다고 들었는데 직접 보신 북한의 모습은 어땠나요?
아주 어려웠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17년 있었는데, 아프리카의 못 사는 어느 나라 보다도 북한이 더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북한이 제일 어려울 때였죠. 그래서 제가 가서 특별히 옥수수에 관심이 있어서 봤는데, 옥수수는 계속 심으면 땅이 나빠집니다. 옥수수는 콩에 비해서 세 배정도 정상적인 수량이 나옵니다. 그런데 콩은 영양가가 세 배 정도 높죠. 근데 북쪽에서는 제일 중요한 게 양 아닙니까? 그래서 밭에는 옥수수만 심게 되어 있어요. 법으로 콩은 못 심게 돼있습니다. 콩은 논두렁에 심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북한은 과밀식을 합니다. 굉장히 포기 수를 많이 넣습니다. 그것이 비료를 많이 주고 기후가 좋은 정상적인 상태일 때는 다수확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비료는 필요한 양의 5분의 1도 안되고요.
옥수수는 암꽃, 수꽃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강냉이 옥수수는 암꽃입니다. 암꽃에 수꽃 꽃가루가 묻어야 수정이 되어서 종자가 맺히는 겁니다. 수꽃이 피고 삼일 만에 암꽃이 피어야 하는데, 그렇게 밀식을 하면 일주일, 열흘씩 간격이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종자가 맺혀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것을 보고 어려운 우리 동포들, 도저히 식량 할 수가 없다 해서 삶을 포기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1996년에 천재지변이 일어났습니다. 하루에 100-200mm 비가 일주일, 열흘 온 겁니다. 그와 같은 비가 남한이나 전세계 어디에 왔더라도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1997년도에 해일이 일어나고 가뭄이 와서 너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눈에 눈물이 안날수가 없을 정도로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동포를 이렇게 놔두시는가 하나님께 불평을 안 할 수 없는 심정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일어설 수 있다, 당신들 정말로 자존심도 강하고 주체 의식도 강하고, 일어설 수 있는 데 왜 못 일어서나 하면서 제가 그분들한테 격려하면서 희망을 주고, 당신들과 같이 죽어도 좋으니 나하고 같이 죽기 전에 노력해서 식량을 해결하자 해서 북한 스스로의 노력을 저는 굉장히 높이 평가합니다.
▶ 북한에서 어떤 노력을 했나요?
제가 옥수수를 너무 많이 심었다고 했더니 당장 반으로 줄이더라고요. 옥수수 밭에 콩을 심어라 하니까 처음에는 북쪽에서 굉장히 오해를 했습니다. 국정원에서 시켜서 우리를 더 굶어죽게 하기 위해서 콩을 심으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요. 콩은 옥수수보다 수량이 3분의 1밖에 안 나오니까 제가 과감하게 이건 100년 전부터 농업이 과학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해서 자신있게 건의를 했습니다. 그건 얼마든지 과학적으로 제가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것이죠. 북쪽이 제 이야기를 듣고 그 당시에는 콩을 팥이라고 해도 제 이야기를 믿어주었죠. 처음에 안 믿은 게 한 며칠 안 믿었지요. 제가 순수하게 자기들을 위해 죽겠다는데 어쩌겠습니까? 북쪽은 저에 대해서 남쪽보다 훨씬 더 아프리카 활동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유엔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자기들 북쪽을 돕기 위해서 한국에 무조건 귀국했는데, 저를 상당히 순수하게 보고 잘 봐주고 잘 도와달라고 옥수수만 잘하면 통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 그럼 수확은 얼마 만에 한 겁니까?
옥수수 심고 나면 3개월 반에서 4개월 만에 수확을 하죠. 그래서 ‘수원 19호’를 80개 협동농장에 심었어요. 3천 종의 옥수수를 만들어서 남과 북이 공동연구한 겁니다 6.25 사변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이 기술협력을 한 겁니다. 그것도 협약에 의해서, 북쪽의 요구에 의해서요. 그러면서 아프리카에서 하도 못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절대로 그분들 자존심을 건드려서는 안되죠. 자존심을 살려가면서 같이 노력하고 주체농업을 과학적으로 해야 한다. 그 당시 중국만 해도 매일같이 “과학농업, 과학농업” 합니다. 제가 그것을 이용해서 과학농업을 하시면 식량이 안전하게 공급될 수 있습니다, 종자 혁명을 일으켜야 하고, 과학자 한테 자유가 더 있어야 하는 것을 제가 많이 주장했죠. 저는 죽어도 좋고, 죽어도 할 말은 한다는 생각으로 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남쪽을 위해서도 아니고 동포를 위해서 우리 반쪽 형제를 위해서 한 것이니까 자신 있게 권고를 하고, 제가 얼마든지 희생될테니까, 저를 죽일 것 같으면 죽일 날짜를 미리 알려달라 하면서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 ‘이 분이 큰 소리 뻥뻥 치는 것 아닌가?’ 하다가 실제 옥수수가 영글었을 때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 때 굉장했습니다. 북한의 동포들이 남쪽에서 온 동포에 대한 사랑이 대단합니다. 옥수수를 보러 가자고 하는 대대적인 운동이 벌어진 겁니다. 옥수수가 좋게 나왔을 때 북쪽이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80개 협동농장에서 시작한 것이 증산해서 전국의 협동 농장 3천개 중 1천개 농장으로 확대가 되었습니다. 첫해 가을에 옥수수 박사 이야기만 들으면 식량해결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 겁니다. 70%의 인민들의 식량이 옥수수입니다. 거기에다가 옥수수가 남쪽에서 개발한 좋은 옥수수죠. 미국에서 개발한 옥수수였다면 안 심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로 진실하게 자기들을 돕는 데 대해서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오해가 없으면 얼마든지 하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17년간 아프리카에서 많은 성과 이뤄
▶ 그 전에 17년 동안 ‘검은대륙의 옥수수 추장’이셨는데요. 왜 아프리카였느냐 하는 것은 어려운 땅이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신 건가요?
제가 미국에서 석박사과정을 하는데, 논문 심사위원 중에 한 분이 아프리카 유엔 연구소로 가시게 됐어요. 가면서 저보고 가자고 저를 관심있게 보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절대 안 간다, 돈 아무리 많이 줘도 제가 조국에 가서 미국에서 배운 기술이 우리 농민들 부자될 수 있게 해서 성공하면 가고 아니면 안간다고 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왔는데 1년에 몇 번씩계속 오라고, 조국도 중요하지만 아프리카 식량을 위해서 이 큰 대륙, 아프리카 인구를 살리는 것 이게 더 중요하지 않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한국 사람이고, 뿌리가 여기라고요. 우리 동포부터 살려놓고 성공하면 간다 해서, 성공했을 때 농업진흥청 월급의 100배를 받고 제가 아프리카에 스카우트 되서 1979년도에 가게 되었죠.
우리 민족도 6.25 사변 이후에 참 많은 외국 원조를 받았잖아요? 우리 민족의 빚을 제가 옥수수로 갚을 자신이 생긴 겁니다. 제가 이것을 강원도에서 하면서 1년에 4백억, 그 당시 4백억이면 굉장합니다. 그 정도 농가소득이 매년 증가된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계산하면 아프리카 같은 큰 대륙에 내가 우리 민족이 받은 빚도 값을 수 있고, 제가 신앙을 가진 사람이니까 하나님이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 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죠. 북한도 똑같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한 것입니다.
▶ 원래 아프리카의 주곡식은 무엇이었나요?
아프리카에서 제일 못 사는 사람이 먹는 것이 건조지역에서는 조, 수수이고, 비가 많이 오는 곳은 카사바라고 주정 원료로 우리 칡같은 나무뿌리나 '얌'이라고 우리의 ‘마’와 같은 종류를 많이 먹었는데, 옥수수가 이제 아프리카에 퍼져서 직접 재배해보니까 굉장히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김순권
▶ 그럼 옥수수는 첫 시도였나요?
아니죠. 제가 가기 전에도 몇 백년 아프리카에 옥수수가 들어와서 병이 나서 완전히 망할 때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있었는데요. 제가 갔더니 특히 바이러스 병이 퍼져서 한 50년 이상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해서 연구를 했는데 실패를 했죠. 저는 그런 것 고치는 데는 완전히 전문가입니다. 교잡종도 만들지만, 병.벌레와 같이 공생하는 것, 전에 사람들은 완전히 죽이려고 했는데 저는 절대 안된다, 이 병.벌레는 완전히 24시간 일을 하는 겁니다. 특히 악마의 풀 같은 것은 1백년 동안 선진국과 아프리카가 해결하려다가 실패했습니다. 그 분들의 원리는 뭐냐면 약을 써서 화학적으로 죽인다는 거였죠. 그래서 제가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말라고, 아프리카에 생긴 악마의 풀이 웃는다고 했죠. 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갈 생각을 해야지, 그래야 지구도 기후도 안 변하고 안전하고 평화가 올 수 있는 겁니다. 제가 하는 방법이 그 분들과 완전히 다릅니다.
▶ 가셔서 어떤 어려움이 있으셨나요?
제일 어려운 것은 식구들과 함께 가 있었는데, 우리가 사는 곳은 완전히 ‘스몰 어메리카 인 아프리카’입니다. 미국과 같이 3백만 평에 참 정리가 잘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밖에 나가면 완전히 별천지입니다. 캄캄하고, 도로도 시원치 않고, 출장을 가도 연락을 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오기로 한 날까지 오면 살아오는 거고, 안 오면 완전히 사고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 정도인데, 그래도 그와 같이 의로운 일을 우리 한국 사람에게 맡겼다는 것을 나는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노력을 안 할 수 없죠. 내가 이 아프리카 대륙을 위해서 죽어도 좋다 생각했죠.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저를 보고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더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라고 했죠. 제가 처음에는 2년 동안 계약했는데 6개월만에 중요한 것을 알고 열심히 하니까 유엔연구소 소장이 한국에 와서 설득을 해서 저를 아프리카에 계속 놔두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사표를 내고 아프리카에 계속 있게 되었죠. 17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죠. [BestNocut_R]
▶ 그럼 연구만 하신 게 아니고 결과물로 옥수수가 열리고 수확량이 많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결과물들이 보여진 것은 언제쯤이었나요?
제가 간 지 4년 만에 1983년도에 전 세계가 아프리카는 불가능하다는 교잡종 옥수수를 만든 겁니다. 또 50년 동안 해결못한 바이러스 문제도 공생하는 옥수수를 만들어서 아프리카에서도 안전하게 과학적 연구만 하면 얼마든지 식량생산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을 한거죠. 유엔에서 평가가 나와서 코리안이 아프리카의 역사를 바꾼다, 선진국이 지금까지 불가능하가도 했던 것을 코리아에서 온 사람이 이것을 한다는 평가를 받았죠.
◇ 말라리아로 다섯 번이나 죽을 고비 넘겨
▶ 인간 레이저빔이라는 별명은 그 때 붙은 건가요?
왜냐하면 제가 나이지리아에서 여섯, 일곱 군데 시험장에서 합니다. 일단 가능성이 있는 곳은 다 해야 되기 때문에 한 시험장에 한 5천 종류를 심어놓습니다. 그 5천 종류를 제가 가서 몇 시간 만에 다 봐야 합니다. 제가 지나가면 잡생각 전혀 할 시간도 없고 그것을 전부 등급을 매겨야 합니다. 이걸 하는 데 다른 사람들은 따라오면 혼돈해서 정신이 없습니다. 다른 직원이나 외국인들은 도저히 저를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농촌에서 태어나서 바다에서 들에서 신체 단련이 됐고요. 저는 필요하면 그 일을 마치기 위해서 점심 안먹고 계속 하는 겁니다. 그래서 레이저 빔이 쏘듯이 중요한 옥수수를 골라내는 거죠. 동료라든가 연구하는 연구원들이 그런 얘기를 했죠.
▶ 그래서 식량난 해결에 얼마나 기여하시게 된 건가요?
나이지리아의 경우 제가 갔을 때 옥수수를 1백만 톤을 생산하고 1백만톤을 수입했습니다. 제가 떠날 때 옥수수를 7백만톤 생산했습니다. 수입도 안 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수출국가는 굉장히 화가났죠. 우리가 옥수수 못팔아 먹는다고 저를 미워했죠. 하지만 저는 순수하게 생각하죠. 저는 돈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하는 거다. 한국이 6.25 사변 이후 굉장히 가난하고 폐허에서 개발된 나라 아닙니까? 당신들도 우리보다 훨씬 조건도 좋고 하니까 제가 희망을 주었고요. 퇴비를 잘 못 만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것 만드는 것까지 알려주면서 공생의 원리를 설명해가면서 연구를 했죠.
▶ 농민의 아들이었다는 얘기를 참 많이 하시는데요.
제가 아프리카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농촌에서 태어나서 농민의 아들로서 직접 논밭에서 고생하면서 자라난 사람이 전세계에 몇 명 안될거다 하는 자신감을 가지고 내가 이 일을 못하면 백 년동안 아프리카가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 하면서 일을 한거죠.
▶ 아프리카 풍토병 같은 것 때문에 박사님이나 가족들이 어렵진 않았나요?
제일 어려운 것은 말라리아입니다. 우리는 말라리아병에 굉장히 약합니다. 필요할 때는 약을 먹어도 안 듣습니다. 제가 말라리아병에 백 번도 넘게 걸렸을 겁니다. 한 번 모기에 물리면 피 속에 말라리아균이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굉장히 지치고 정신력이 희미하면 말라리아균이 활동을 합니다. 한 다섯 번은 거의 사경을 헤맸습니다. 약을 먹고도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데 다시 살아난 겁니다. 제가 그 때 살아나지 않았다면 북한 동포를 도울 수도 없고 사료용 수퍼 옥수수도 만들어낼 수 없었겠죠.
▶ 여러 곡물이 많은데, 꼭 옥수수를 연구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어릴 때 옥수수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굉장히 어렵게 살았는데요. 옥수수는 가난한 사람이 즐겨 먹는 것 아닙니까? 저희가 7남매로 위로 여섯이 누나이고 제가 마지막인데, 제가 경북대학교를 나와서 서울대학교 대학원 시험에 떨어져서 수원 농촌 진흥청에 가게 된 겁니다. 처음에 갔을 때는 통일벼 만드는 곳에 시험 보조로 들어간 겁니다. 3개월 동안 온갖 보조, 잡일을 하다가 공무원 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는데, 벼를 연구하는 과에 자리가 없어서 옥수수 연구하는 부서에 자리가 나서 제가 옥수수 부서를 택하게 되었죠. 밭에 가서 옥수수를 연구하는데, 벼는 논이잖아요? 완전히 제가 산에 뛰어다니고 밭을 뛰어다니고 하던 것의 연속이 되었죠. 또 제가 미국에 가서 느낀 것이 지금은 눈이 크지만 그 당시는 아주 눈이 작았어요. 그래서 하루에 백만 개, 이백만 개의 옥수수 꽃가루가 날리는 데 제 눈에는 적게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옥수수를 위해 태어난 인간 괴물이라고 친구들이 놀립니다.
◇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은 배고픔이죠
▶ 부모님이 자식까지 농사꾼이 되려고 한다고 반대하시지는 않으셨나요?
반대 많이 하셨죠. 울산농고 다닐 때도 농업에 희망이 없다고 빨리 집어치우라고 하셨는데도 제가 굶어보면서 왜 내가 이렇게 어려운 세상에 태어나서 이 고생을 하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을 믿고난 뒤부터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세계의 굶주린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내가 어릴 때부터 그런 고생을 하도록 절대자가 인도를 했다고 생각을 하면서 참 즐거운 마음으로 했죠. 제가 시험을 보면 미끄러지고 떨어지는 데 아주 선수입니다. 그래도 또 ‘더 좋은 데 가기 위해서 떨어졌겠지, 또 노력하면 되겠지’ 하면서 고슴도치 같이 살아왔죠. 사실 집이 가난해서 고등학교까지 못 갈 형편인데, 장학금에 의해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도 장학금으로 다니고, 정부 장학생으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죠.
▶ ‘빈농’이라고 하셨는데, 어느 정도로 형편이 어려우셨나요?
저는 6.25 사변이 나서 형편이 어려웠는데, 제가 외동아들이니까 그래도 우리 집에서 밥을 많이 얻어 먹은 편입니다. 달걀 하나를 삶아도 아버지하고 저하고 반으로 나눠서 주셨죠. 밥은 해초, 곰피, 보리를 섞어서 아주 시커멓습니다. 그런 것도 많이 못 먹었죠. 그렇게 형편이 어려울 때 굶어서 죽는 사람도 많았는데, 부모님들이나 누님들이 안 먹고 저를 먹여 살리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죠. 지금도 생각하면 아주 생생하게 장면들이 잊혀지지 않아요.
▶ 박사님에게는 배고픈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아주 남다르게 자리잡혀 있으시겠어요.
제일 인간에게 비극이 배고픈 것 아닙니까?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우리가 돈 버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죠.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그와 같은 길을 택해 온 겁니다.
▶ 그런데도 북한 사람들은 식량이 부족하다고 하는 걸까요? 경작이 덜 되었나요?
북한같이 단기간내에 식량증산을 한 나라는 전세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북한 동포들을 높게 평가합니다. 제가 1998년도에 갔을 때 그 당시만 해도 옥수수, 벼, 감자도 별로 없고, 콩 조금 있고 150만톤도 안 되었을 겁니다. 2200만 북한 동포가 한 사람이 먹는 옥수수를 비롯한 곡식이 100kg도 안됩니다. 완전히 절대 기아죠. 그런 사태가 남한에서 벌어졌다면 절반은 배고파서 죽었을 겁니다. 그 정도였는데, 지금은 북한이 400만톤에서 450만톤, 잘되면 500만톤으로 예전보다 3배정도 식량 증산이 된 겁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농사를 짓고, 기후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피눈물 나는 북한 동포들의 노력, 북한 당국이 농업을 중요시하고 농업제일주의로 식량 증산을 일으킨 것을 저는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정말 우리 민족만이 성취할 수 있는 특이한 사건이었습니다.
▶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신 공로 때문에 노벨평화상에 3번 후보에 오르시고, 노벨 생리의학상에 2번 후보에 오르셨어요.
노벨상을 받고 한국에 들어왔으면 좋은데, 많은 국민들이 후원도 해주고 성원도 해줬는데 못 받은 것이 그렇죠.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노벨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동포들의 배고픔을 중단시키고, 특히 최근 4년은 아시아 지역에 관해 일하는데 아프리카보다도 더 못사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하루에 1불이 아니라 반 불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비일비재 합니다. 아프리카에도 100원이 없어서 말라리아 약을 못 먹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는 겁니다. 이런 사람의 생명을 구해주는 것, 그것이 노벨상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저는 노벨상 그런 것에 대해서 별로 욕심을 낼 필요도 없고 더 중요한 일들이 훨씬 많습니다.
◇ 옥수수를 통해 남과 북이 통일의 계기가 되길 희망
▶ 그렇게 바쁘게 사시는 동안 가족들, 특히 아내 되시는 분은 어떠셨을까 싶은데요. 기록을 보니까 예전에 사모님을 막무가내로 따라 다녀서 결혼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제가 우리 집사람의 신앙의 도움이 아니고는 도저히 이와 같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는 장가를 잘 가야 합니다. 제 집사람도 남편을 위해서 굉장히 헌신적입니다. 남편을 위해서 죽어도 좋다는 그런 여자입니다. 일류 대학을 나오고 신앙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희생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은 좀 많이 달라졌지만요.(웃음) 우리 아이들 교육시키는 것도 집사람이 참 피눈물나는 동반자로서 기도하면서 많이 애썼습니다. 제가 이렇게 잘 될 수 있었던 이유의 51%는 제 집사람과 가족에게 돌립니다.
▶ 선물로 옥수수를 내미셨다는데요. 어떤 얘기입니까?
농촌 진흥청에 있을 때 서울 아가씨를 꼬셔야 하는데, 갖다줄 것이 없더라고요. 다른 것 갖다주면 돈 들어가니까요.(웃음) 공짜로 갖다 주어야 하니까 돈 적게 드는 옥수수 몇 자루 따다가 주면서 꼬시고, 나중에는 나한테 시집 안 오면 정말 손해볼 것이라고 공갈까지 쳤는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짝을 채워 주신 것 같아요.
▶ 나이지리아에서 ‘명예추장’까지 하셨는데요. 나이지리아는 추장의 경우 부인을 여덟명까지 거느릴 수 있는 일부다처제 사회라면서요?
예. 저도 했고, 남편을 위해서 수고 많이 했다고 우리 집사람도 명예 추장을 했어요. 그래서 집사람이 “당신 여덟 여자 거느리면, 나는 여덟 남자 거느릴 수 있다”고 하는 농담도 하고 했습니다. 또 아프리카에서 옥수수 연구가 성공하니까 선물로 딸을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참 재미있는 일이 많았죠. 저는 정말로 아프리카와 전 세계에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 자녀분들은 어땠나요?
애들이 참 고생을 했어요. 한국에서는 학교를 한 달도 못 다녔어요. 우리 큰 애가 유치원 들어가려고 할 때 아프리카를 가서 아프리카 유엔 연구소 안에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거기서 졸업을 하고 난 뒤에는, 누구누구 애니까 비행기를 타고 어디서 내리게 해달라고 판에다 써서 아이 목에 걸어서 혼자 나이지리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다시 미국으로 가서 기숙사 학교로 보냈습니다. 아이들도 많이 울고 저희 부부도 많이 울었습니다. 특히 둘째 딸을 떼어놓고 올 때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제가 아프리카를 위해서 우리 아이 셋보다는 5천만의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눈물을 머금고 일을 안 할 수가 없었죠.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 그런 고생을 많이 해서 하버드, 코넬 같은 일류 대학을 나왔고, 큰 아이는 뉴욕에서 직원 200-300명을 거느린 대벤처회사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유학 중에 아이들이 태어나서 전부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뿌리는 한국이죠. 선진국 사람들을 거느리면서 아주 깃발 날리고 있습니다.
▶ ‘옥수수로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야말로 인도적이고 동질적인 말씀이지 않습니까? 정치적인 뜻을 갖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오해는 없으셨나요?
저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한 번 정치가들 도와주다가 혼이 났습니다. 솔직히 정치가들은 어떤 면에서는 전부는 아니어도 거의 반 이상은 사기꾼입니다. 저 같은 과학자도 이용해먹고 필요없으면 싹 버리고,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하고요. 정치가들이 전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옥수수를 통해서 우리 민족이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은 옥수수를 키우기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량 해결이 되고도 남을 정도로요.
요즘 옥수수가 지구 환경을 깨끗하게 하는 에탄올로 인해 더욱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옥수수 에탄올을 자동차에 넣으면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20% 줄어듭니다. 통일이 되더라도 북한은 옥수수 중심의 축산 발전, 남쪽은 벼 중심의 쌀농사를 해서 서로 바꿔 먹고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 시도하는 것은 통일이 되기 전에도 먹는 것이 좀 왔다갔다해야 화해가 더 잘되고 우리가 북녘을 더 사랑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공짜로 쌀을 주거나 차관을 주지말고, 옥수수하고 바꾸는 거죠. 차관을 줘서 받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와 같이 할 때 북쪽도 명분도 되고, 자존심도 살리고, 우리 남쪽에서 막 퍼준다는 소리도 할 수 없죠. 우리가 남아도는 쌀을 그냥 창고에 넣어둘 것이 아니고, 우리 동포들이 굶고 있는 북쪽에 줘야죠. 형제간에도 가난한 형제가 있으면 도와줘야죠. 그렇게 하면 북쪽도 우리가 도와주는 것에 대해서 엄청나게 고맙게 생각을 합니다. 그 분들이 자존심 때문에 대놓고 고맙다고는 못해도 저는 그 분들의 마음을 확인 했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이나 비전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특별한 비전이라기보다 계속 옥수수 연구를 해서 죽기 전에 더 좋은 옥수수를 만들어서 세계에 옥수수가 필요한 나라에 도움을 줘야죠. 옥수수가 없으면 축산 발전이 전혀 안됩니다. 옥수수를 가지고 한 이만 종류를 만듭니다. 미국이 선진국 중에서 제일 잘 사는 것도 제가 볼 때는 완전히 옥수수 때문입니다. 밀은 중동이나 다른 지역들이 많이 경쟁을 하지만, 옥수수는 미국에 경쟁할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미국에 잘못 보이면 옥수수를 사먹지도 못합니다. 우리같이 100% 수입에 의존하다가 미국의 가격이 올라가는 바람에 상당히 어렵죠.제가 지금 경북대학교의 정년이 3년 남았습니다. 그래서 ‘닥터콘’이라는 벤처회사를 만드는데 모금을 해보니까 정말 어렵더라고요. 남북관계가 잘 풀려갈 때는 모금이 잘 되는데 남북관계가 악화되면 모금이 거의 중단됩니다.
그래서 이 옥수수를 잘 해서 우리 남쪽의 농민들도 부자가 되게 하고 그 분들한테 예를 들면 로열티를 받는다든가 해서 연구도 계속하고 학생들도 키우고요. 지금 제 제자들 중에 꿈이 있는 학생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런 돈을 받아서 저희 회사는 100% 사회 환원을 합니다. 원금까지도 완전히 사회 환원입니다. 저희들은 죽으면 돈이 필요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전 세계에 얼마나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까? 지금 우리가 26개 나라에서 옥수수 연구를 돕고 있습니다. 저는 아주 희망적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같이 하실 때 제가 반드시 이 귀한 심부름을 할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요. 제가 하는 일과 옥수수 재단을 위해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해주셨기 때문에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도와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제가 죽을 때까지 옥수수밭에서 열심히 노력을 하겠습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