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4월 2일이면 망우리 공원묘역에 모이는 한국인과 일본인들
지난 2011년 4월 2일 아사카와 다쿠미의 80주년 추모제에 모인 참배객들. 다쿠미는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을 연구하고 알리는데 일생을 바쳤다. (사진=아사카와형제기념사업회 제공)
매년 4월 2일을 전후해 망우리 공원묘역에 가보면 한일 양국인들이 한 무덤을 둘러싸고 참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덤의 주인공은 1931년 4월 2일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 과로로 서거한 조선총독부 산림과 직원 아사카와 다쿠미다.
타계할 때 나이가 고작 만 40세였다.
그는 왜 자신의 고국인 일본에 묻히지 않고 남의 나라인 이 곳에 묻혔을까?
왜 수많은 한국인들이 그를 잊지 못해 매년 이 묘역을 찾아올까?
조선 항아리를 들고 있는 27세의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에 온 초기라서 양복을 입은 모습이지만 곧 벗어던지고 한복을 즐겨 입는다.
그는 낮에는 산림과 직원으로 조선의 벌거벗은 산하를 푸르게 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그가 가장 심취한 것은 조선백자를 시작으로 조선 도자기 전체와 소반과 그릇, 옷장 등 조선 민중이 일상 생활에서 즐겨 쓰는 소박한 민예품이었다.
그는 조선에 살면서 조선인과 조선 문화, 조선의 산하와 전통에 심취해 짧지 않은 17년 조선생활을 조선인으로 살았다.
다쿠미는 청량리에 집을 마련한 뒤 온돌방에 조선식 장롱을 두고 조선 음식만 먹고 살았다.
치열하게 조선어를 공부한 뒤 한복을 입고 조선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니 전차에서 일본인 승객으로부터 '조선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강요당한 일도 있었다.
3.1운동과 관동대학살을 지켜 보면서 식민통치에 분노하고, 광화문 철거를 막는데 앞장섰다.
비참하게 사는 조선인의 삶에 가슴아파해서 늘 궁핍한 이웃을 도왔다.
다쿠미가 한 가장 큰 일은 조선의 소반과 도자기를 한일 양국에 알린 2권의 저서와 오늘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흡수 통합되는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운 일이다.
◈ 조선의 아름다움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청화백자추초문각호>청화백자추초문각호>
이 도자기의 아름다움이 일본인 청년 3명의 운명을 바꿨다. 현재 도쿄에 있는 일본민예관에 전시돼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사카와 다쿠미는 어머니 배 안에 있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7살 위인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노리타카는 1913년 조선으로 건너가 학교 교사로 취업했다.
그는 사업을 벌이려고 조선에 건너간 일본인과는 달리 오직 조선민예에 이끌려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제일 먼저 고려청자를 보기 위해 이왕직박물관으로 달려갔다.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
"어느 날 밤 경성의 고물상 앞을 지나가는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물 사이에 하얀 항아리가 있었다. 그 둥근 자태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멈춰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 항아리를 비싸지 않은 5엔을 주고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항아리를 바라보며 '고려청자는 차가운 과거의 아름다움이지만, 이 백자항아리는 지금 피가 통하는, 살아있는 친구다. 드디어 나의 눈이 열렸다. 진정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수집한 도자기 중 하나가 위의 사진에 나온 '청화백자 추초무늬 모따기 항아리'이다.
이 항아리를 보고 동생 다쿠미도 '조선의 미' 연구에 뛰어들었고, 노리타카의 친구이자 일본의 저명한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를 조선으로 달려오게 만들었다.
왼쪽이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 오른쪽 사진은 인도인 친구이자 민예학자인 싱이 경성을 방문했을 때 동생 다쿠미와 함께 '청화백자 진사 연꽃무늬 항아리'를 사이에 두고 포즈를 취한 것이다.
한편, 동생 다쿠미는 형을 따라 조선에 가기로 결심하고, 일본의 영림서를 떠나 1914년 5월 17일 경성시 독립문통에 숙소를 구했다.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청 임업시험소 직원으로 취직했다.
다쿠미도 형이 소장한 청화백자 2개를 보고 반했다.
다쿠미의 회고담이다.
"정동에 있는 형의 집에서 잤다. 흰 바탕에 푸른색 안료로 연꽃을 그려 놓은 '청화백자 진사 연꽃무늬 항아리'에 연꽃을 꽂았더니 아름다왔다. 방 전체가 환했다. 조카 마키에는 그 항아리가 마치 아가씨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어린아이의 직감은 정확하다"
다쿠미는 형 노리타카를 따라 고려와 조선도자기의 흔적을 찾아 조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는 도자기는 물론 소반과 옷장 등 조선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공예품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수집에 몰두했다.
◈ 야나기와의 운명적인 만남…<조선민족미술관> 설립에 뛰어들다조선민족미술관>
일본의 대표적인 미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 다쿠미를 통해 조선 민예품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다.
조선에 대해 잘 모르던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것은 다쿠미의 형 노리타카가 선물로 보내준 <청화백자추초문각호>를 보고나서다.
조선을 처음 찾은 야나기에 대해 친구 노리타카는 이렇게 묘사했다.
"야나기는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철화자기 항아리를 하나 사서 내게 보냈다. 경성에 도착해서는 둘이서 한여름 염천을 매일같이 골동품 가게를 뒤지며 보냈다. 이러한 열기가 동생 다쿠미에게 전해졌다"
야나기는 다쿠미의 집에 묵으면서 그의 견식에 깊이 감동했다.
특히 조선 땅에 온 이상, 조선어를 배우고 조선인의 생활에 완전히 융화된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23년 9월의 어느 날.
청량리 임업시험장의 관사에는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방안에는 문예지 <폐허>의 동인 오상순, 염상섭, 변영로가 보이고, 집주인 다쿠미도 자리를 함께 했다.
다쿠미는 조선옷을 입고 조선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인 모인 이유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내 야나기 가네코의 음악회 준비를 협의하기 위한 것이다.
가네코는 일본의 대표적인 성악가로, 조선에 와서 음악회를 여러 차례 열었고, 여기서 나온 수익금은 남편과 다쿠미가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조선민족미술관>의 건립 비용에 들어갔다.
야나기와 다쿠미는 사라져가고 일본인들이 대거 약탈해가는 조선 미술품과 민예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 그 아름다움과 전통을 알리는 방안에 대해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사재를 털고 조선 예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1924년 경복궁 안에 있는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통합되기 전 <조선민족미술관>이 들어섰던 경복궁 집경당.조선민족미술관>
야나기와 다쿠미는 개관 전 미술관에 진열할 작품을 찾아서 50여일간 경성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렇게 해서 약 3백 점을 모을 수 있었다.
다쿠미는 집에 모아놓은 조선시대 도자기, 장롱, 책상, 연적 등 3백여 점을 미술관에 모두 기증했다.
다쿠미가 재혼할 때 일이다.
"결혼식 때 입을 옷이 없는 것 같아서, 어머니께서 다쿠미에게 가만히 돈을 쥐어주며, '양복 좀 새로 지어 입으려무나' 하셨어요. 다음 번에 왔을 때 어머니께서 '양복 샀니?'하고 물으니, '모두 골동품이 되었어요'라고 태연하게 대답하더군요"
결혼 비용까지 죄다 골동품을 사서 미술관에 기증하는 데 쓴 것이다.
조선민족미술관은 매년 봄. 가을에 한 차례씩 전람회를 열었다.
해방이 되자 조선민족미술관의 전시품들은 우여곡절 끝에 국립민속박물관에 들어갔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통합돼 지금도 전시되고 있다.
◈ 길지 않은 인생에서 2권의 명저를 남기다
다쿠미가 살아 생전에 유일하게 출판한 <조선의 소반>조선의>
다쿠미는 생전에 <조선의 소반>을 냈고, 서거 후 지인들에 의해 <조선도자명고>가 출판되었다.
지금도 한국인 연구자들이 즐겨 찾는 명저로, 읽어본 이들은 내용의 치밀함에 놀라고, 외국인이 썼다는 사실에 다들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조선의 소반> 1장 앞부분을 보면, 다쿠미의 공예관을 엿볼 수 있다.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휘한다. 어떤 의미에서 사용자는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하고 단정한 자태를 지니면서도 일상생활에 친숙하게 봉사하고, 세월과 더불어 우아한 멋을 더해가므로 올바른 공예의 표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은 많은 문화를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소반만은 다르다고 평가했다.
조선사람은 실내에서 의자를 사용하지 않고 바닥에 앉아서 생활을 하는 까닭에, 상에 관해서는 의자를 쓰는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3장에서는 통영반, 나주반, 해주반 등의 분포지역과 구조를 설명해 얼마나 빈틈없고 철저한 조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남의 흉내를 내기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는 공예의 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서 '자신에 찬 날'은 바로 조선의 독립을 의미했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조선도자명고>속에 그린 삽화.
다쿠미가 세상을 떠난 지 5개월 후에 출판된 <조선도자명고>는 그가 10여 년동안 조선도자기의 이름을 조사. 연구한 결과이다.
그는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도자기)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민족의 생활을 읽고 그 시대의 분위기를 읽으려면 우선 그릇 본래의 올바른 이름과 쓰임새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태어날 때 붙여진 이름으로 그릇들을 부른다면 기꺼이 지난 일들을 이야기해 줄 것이다. 그러면 더욱 친근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서는 그 그릇들을 사용하던 조선민족의 생활상이나 마음에 대해서도 저절로 알게 되리라"
이 책에서 다쿠미는 도자기의 성쇠가 민족의 성쇠와 관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다쿠미가 한민족의 성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는 조선민족이 융성할 때, 각 시대마다 전세계에 독보적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훌륭한 도자기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 책의 특징과 매력은 대표적인 조선도자기의 아름다운 사진과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 한국어로 쓴 설명 때문이다.
◈ 허망한 죽음…그를 사랑한 조선인들은 모두 통곡했다
아사카와 다쿠미 묘역에 새겨진 묘비. (사진=아사카와형제기념사업회 제공)
다쿠미를 기억하는 모든 조선인들은 그와 동행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다쿠미를 조선사람으로 착각했다.
그는 나다닐 때 한복을 즐겨 입었다.
다쿠미가 자주 갔던 골동품 가게 '순쇼도' 주인의 아들은 당나귀를 타고 가게에 와서 안채 손님방에 앉아 있던 바지저고리 차림의 다쿠미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
그는 조선음식을 즐겨 먹었다.
조선 김이나 다시마를 참기름에 튀긴 음식을 좋아했다고 한다.
거처하는 방은 온돌에다 조선 장롱이 놓여 있었다.
다쿠미는 만 40살이 되던 1931년 4월 2일 식목일 기념행사를 준비하다 과로한 나머지 급성 폐렴에 걸려 허무하게 서거했다.
일본인 친지는 물론 많은 조선인 이웃이 달려와 통곡을 했다.
평소 교분이 있던 청량사의 비구니 세 명도 영전에 향을 올리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다쿠미의 부인이 나와 사의를 표하자 손을 붙잡고 "아이고..."하며 통곡을 했다.
상여를 내보낼 때는 30여 명의 이웃이 서로 상여를 메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마을 이장이 그 중에서 10명을 골라야 했다.
일본에서 달려온 평생의 친구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렇게 장례식을 묘사했다.
"어젯밤 입관을 마치고, 오늘은 장례식이다. 다쿠미답게 조선옷을 입히고, 조선식 장례식을 치르며 조선인의 공동묘지에 묻고, 묘를 세우기로 했다. 다쿠미를 따랐던 조선인들이 상여를 메고 갔다"
형 노리타카가 동생을 그리워하며 그린 동생 다쿠미의 얼굴 그림.
그는 누구보다 일제를 미워하고 압제와 가난에 시달리는 조선인들을 따뜻하게 대했다.
월급을 축내서 민예품을 사들인 뒤 대부분 조선민족미술관에 기증하고 집에는 깨진 물건만 두었다.
형편이 어려운 조선인 동료 자식이나 이웃집 조선인 학생 여러 명에게 드러내지 않고 학비를 대주었다.
여자 걸인에게는 가진 돈을 건네줬고, 남자 걸인에게는 일자리를 주선했다.
조선인과는 기생에서 비구니까지 신분의 차별 없이 친구로 지냈다.
그의 일기장을 읽어보면 조선인에 대한 따뜻한 눈길이 느껴진다.
"길에 나와보니 예쁘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즐거운 듯 오가고 있었다. 조선인 아이들은 특별히 예쁘다. 웬지 모르게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다. 오늘은 웬지 조선인의 세상 같은 기분이 든다. 일본의 행위가 이 아름다운, 천사같은 사람들의 행복을 어딘가에서 방해하고 있다면, 하나님~ 부디 용서해주십시요"
"조선 유랑 연예인들의 춤과 곡예, 인형극을 보러 갔다. 원시적이고 세련되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좋은 점을 볼 수 있다"
"조선인 대부분은 모래밭에서 먹고 마시며, 북과 종을 울리면서 신명나게 춤추고 있었다. 실로 유쾌해 보였다. 나도 함께 춤추고 싶은 기분이 되어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했던 아사카와 다쿠미.
어떤 기록과 증언을 들어봐도 그야말로 '진흙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흰 연꽃'을 연상케한다.조선도자명고>조선의>조선도자명고>조선의>조선민족미술관>조선민족미술관>폐허>청화백자추초문각호>조선민족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