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노컷뉴스

16강 진출 실패한 한국축구 "이회택같은 골잡이를 키워라"

  • 0
  • 0
  • 폰트사이즈

책/학술

    16강 진출 실패한 한국축구 "이회택같은 골잡이를 키워라"

    • 0
    • 폰트사이즈

    [임기상의 역사산책 51]'최고의 스트라이커' 이회택의 파란만장한 축구인생

    한국축구의 간판 스트라이커 이회택 선수. 1960~70년대 최고의 공격수였다.

     

    ◈ 처음으로 팬을 몰고 다닌 한국 축구의 전설 '이회택 선수'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의 최고의 스타는 대통령도, 연예인도 아닌 '이회택 선수'였다.

    1m 67cm의 작은 키지만 당당한 체구에 100m를 11초 8로 주파하는 스피드로 귀신같이 골을 넣던 '국민스타'였다.

    우리들은 '떴다~ 떴다'란 동요에 '이회택'이란 이름을 넣어 부르고 다녔다.

    이회택이 속한 포항제철이 처음 출전한 '대통령배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 동대문운동장을 가득 메운 3만 관중 앞에서 그의 활약을 묘사한 기사를 읽어보자.

    "후반 중반 오른쪽에서 넘어온 크로스를 가슴으로 컨트롤 한 후 떨어지는 공을 넘어지면서 골문을 향해 터뜨린 통렬한 터닝슛 한 방은 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방송 해설자는 탄식과 함께 "펠레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라고 외쳤다.
    경기는 결국 2대0으로 포항제철의 승리로 끝났다.
    동대문운동장 그라운드는 순식간에 뛰쳐 나온 관중들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5천여 명의 관중들은 일제히 그라운드로 몰려나와 그를 에워싸고 행가래를 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남미의 축구판에서나 볼수 있는 장면이 7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연출된 것이다.

    이회택의 경기를 보기 위해 고등학교 2학년 때 무작정 춘천에서 서울로 올라온 어느 팬의 회고를 들어보자.

    1971년 박스컵대회에서 드리블을 하고 있는 이회택 선수

     

    "동대문운동장 서쪽 골대 뒤편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니 드디어 선수들이 출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이차만, 최재모, 황재만, 이영무, 조광래, 박성화 등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데 우리의 이회택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회택이가 안 보여'
    '그러게 말이여. 이거 어떻게 된거야? 후반전에 내보내려고 그러나?'
    '혹시 어제 감독하고 한바탕 벌인 거 아닐까?
    회택이 한 성질 하잖아'
    여기저기서 '야~ 우리 회택이 내보내라'하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에고~ 이회택은 경고 누적으로 오늘 출전할 수 없답니다'
    그 순간 일단의 관중들이 갑자기 스탠드 앞으로 마구 몰려가기 시작했다.
    '이회택이다~'
    이회택이 스탠드 바로 밑에서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관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회택'을 연호하며 그의 출장을 독촉했다"

    아마 한국축구사상 최초의 팬클럽을 만든 선수로 기록됐을 것이다.

    ◈ 고려대-성균관대-연세대에 이어 중앙정보부까지 스카우트전에 가세하다

    멕시코 올림픽 아시아 예선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1967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기념사진 (왼쪽부터 이회택-정병탁-김기복). 이때는 반강제로 양지팀에 끌려 들어간 직후였다.

     

    그를 찾는 것은 관중들만이 아니었다.

    고려대와 성균관대, 연세대가 007작전을 방불케하는 치열한 스카우트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원하던 연세대에 입학한 이회택은 입학시험을 치른 뒤 축구부 숙소인 신촌 무악사에 들어가 연세대 선수들과 훈련을 시작했다.

    한 달여가 지난 2월 말에 연세대 운동장 한 쪽에 검정색 지프차가 나타났다.

    선수들이 훈련을 마치자 건장한 두 남자가 선수단 쪽으로 오더니 "이회택이 누구냐?"고 물었다.

    선수들이 손끝으로 이회택을 가리키자 대뜸 다가가 재차 확인한 후 지프에 타라고 지시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지성 감독이 이들에게 항의하자, 말없이 붉은색 두 줄이 쳐진 중앙정보부 감찰실 신분증을 코앞에 내밀더니 그대로 운동장을 떠났다.

    이회택은 곧바로 이문동 중앙정보부 장교숙소에 마련된 양지팀 선수로 등록했다.

    강제징집 형식으로 차출된 이회택은 육군, 공군, 해병대 중 복무기간이 가장 짧은 해병대를 택했다.

    군번과 군복은 양지팀 숙소로 배달됐다.

    여기서 3년간 활동한 기간은 군 복무기간으로 대체됐다.

    이회택은 이 시절에 대해 두고 두고 후회했다.

    "그때 양지팀 선수들의 봉급이 2만원이었어요.
    아마 고위 공무원 봉급보다 많았을 겁니다.
    흥청망청했지요.
    축구 시작한 지 4년만에 이렇게 많은 봉급을 받았으니 오죽했겠어요.
    그것도 20대 초반의 나이에...
    지금 생각하면 후회막심합니다"

    그러면 이회택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파워가 넘치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에 있다.

    키는 작지만 뛰어난 스피드에다 탁월한 개인기까지 갖춘데다 경기 스타일도 다이나믹했다.

    한 마디로 역동적이고, 빠르고, 저돌적인 공격수였던 것이다.

    그가 거둔 성적을 더듬어보자.

    1967년 메르데카대회 우승의 주역으로 최우수선수로 선정됐고, 아시아올스타로 뽑혀 각국을 순회하며 경기를 치렀다.

    이어 1969년 킹스컵 대회 우승을 비롯해 1970년에는 메르데카대회 우승과 방콕아시안게임 우승으로 2관왕을 달성했다.

    71년에는 새로 창설된 박스컵 우승, 72년 메르데카 우승, 74년 박스컵 우승...

    아마 지금 선수 생활을 했다면 박지성같이 유럽의 그라운드에서 명성을 날렸을 것이다.

    ◈ 이회택, 끝내 올림픽과 월드컵 등 세계무대에 서지 못하다

    1967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멕시코 올림픽 아시아예선 한일전(빨간 유니폼이 한국팀)

     

    1967년 10월 7일 한국축구 대표팀은 운명적인 경기를 맞이한다.

    일본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아시아 예선 일본과의 경기였다.

    당시 양 팀은 모두 3연승을 달렸지만 일본이 필리핀을 대파하면서 골 득실에서 +21, 한국은 +7이었다.

    우리로서는 일본전에서 무조건 승리를 거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일본은 축구 역사상 최고의 멤버로 구성돼 있었다.

    전반에는 2골을 내주고 말았다.

    후반에 이회택과 허윤정 선수가 연속골을 넣어 2-2로 동점을 만들었다.

    이후 가마모토에게 1골을 내줬지만, 허윤정 선수가 다시 골을 넣어 3-3 동점이 되었다.

    후반전 45분도 지나고 전광판 시계가 멈출 무렵, 김기복 선수가 회심의 중거리 슛을 날렸다.

    그러나 이 슛은 골대를 맞고 튕겨져 나오고, 주심은 휘슬을 불었다.

    결국 일본이 올림픽 본선에 진출해 동메달을 따게 된다.

    이회택이 다시 세계 무대를 노크한 것은 2년 후인 1969년 10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지역예선전이다.

    한국과 호주, 일본 등 3개국이 참가했다.

    1차 리그에서 한국은 일본과 2대2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미 호주가 일본을 3대1로 이긴 상태였다.

    한국도 호주에 1대2로 패배했다.

    선수단 사이에 "호주는 한 게임 이길 때마다 엄청난 현금을 뿌린다더라"라는 괴소문이 돌았다.

    이 얘기를 들은 고위층에서 "좋다~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만 따온다면 선수단 전원에게 집 한 채씩을 사주겠다"는 언질이 왔다.

    2차 리그에서 일본과 호주는 1대1 무승부를 기록했다.

    한국은 일본을 2대0으로 완파했다.

    10월 20일 호주와의 2차전이 열렸다.

    한국은 이기면 호주와 한 번 더 재경기를 할 수 있고, 호주는 비기기만 해도 본선에 진출하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1대1 무승부 상황에서 후반 20분 한국은 페널티킥을 얻었다.

    페널티킥의 달인 임국찬이 나섰다.

    아쉽게도 공은 정확하게 골키퍼 가슴으로 날라갔다.

    다들 통한의 한숨을 쉬었다.

    축구인 김용식의 회고다.

    "우리가 그날 이겼더라면 이틀 뒤 재경기를 벌이게 돼 있었고, 그렇게 되면 축구협회는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국찬의 실축을 '2천만 원짜리 실축'이라며 안타까와했습니다"

    이회택은 이렇게 되돌아봤다.

    "그의 실축은 월드컵 진출의 꿈 뿐아니라 집 18채를 몽창 차버린 것이었습니다.
    국찬 형은 그후 미국으로 도망치듯 떠났습니다.
    한 많은 이민길이었습니다"

    이렇게해서 이회택의 국제무대 진출은 무산됐지만, 세계적인 클럽과의 경기에도 참가하고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월드컵에 참가한다.

    ◈ 이회택, 에우제비오와 펠레 등 불세출의 스타플레이어와 대결하다

    친선 경기를 갖기 위해 한국을 찾은 펠레 선수와 함께 한 선수들. 펠레 오른쪽이 이회택, 김진국, 왼쪽은 이세연 골키퍼, 박이천 선수

     

    1970년 브라질 명문팀인 플라멩고 프로팀을 한국이 초청했다.

    이 경기에서 이회택은 2골을 쓸어담아 2대1로 승리했다.

    이어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가 이끄는 명문 프로팀 벤피카가 동대문운동장에서 백호, 청룡팀과 대전했다.

    벤피카는 백호를 5대0으로 이겼지만, 청룡과는 1대1로 비겼다.

    1골을 넣은 이회택을 전담 마크한 선수가 훗날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될 포르투갈의 옴베르토 코엘류였다.

    2년 후 1972년에는 '축구황제' 펠레가 소속팀 산토스 팀과 함께 한국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갖기 위해 내한했다.

    펠레의 인기는 대단했다.

    경기가 열린 동대문운동장은 수용 능력이 2만 5천여 명인데 3만 5천 명이나 들어왔다.

    관중들 모두 "펠레~펠레"를 외치며 열광했다.

    경기에서 차범근과 이회택이 1골씩 넣긴 했지만 펠레가 1골을 넣은 산토스 팀에게 2대3으로 패했다.

    이회택은 당시 펠레의 플레이를 보고 축구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 화제를 모은 다채로운 사생활

    이회택의 절친 가수 조용필. 그의 첫번째 매니저가 축구선수 이회택이다.

     

    1971년 뮌헨 올림픽 예선 말레이시아와의 경기를 앞두고 이회택은 감기 몸살을 앓았다.

    감기약을 잘못 먹고 출전하는 바람에 경기 내내 헤맸다.

    그런 와중에 팬이 던진 병이 운동장으로 날라오고, 그는 홧김에 공을 관중석으로 날리고...

    이회택은 이 일로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었다.

    시합도 지고, 대표팀에서도 쫒겨났다.

    그는 마침 대마초 사건으로 가요계에서 방출된 가수 조용필과 전국을 유람하며 낚시를 했다.

    조용필과는 무명 시절 '25시'라는 그룹 사운드에서 퍼스트 기타를 치고 있을 무렵 처음 만나 의기투합한 사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다.

    둘다 "하나에 미쳐야 진정한 선수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조용필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대표곡으로 한 앨범을 만들려고 동분서주할 무렵, 그의 첫번째 매니저를 자처한 이회택이 바쁘게 움직였다.

    막 기획사를 출범한 록 밴드 '영사운드' 출신의 제작자 안치행에게 조용필의 음반 제작을 부탁했다.

    안치행은 킹레코드사에 제작을 의뢰했다.

    하지만 박성배 사장이 '노래가 너무 일본놈 스타일이라 안된다'고 박대하자 오기로 음반 제작을 강행했다.

    이 음반은 빅 히트를 치면서 조용필을 '국민가수'로 끌어 올렸다.

    한편, 이회택은 축구 덕분에 한국전쟁 때 월북한 아버지를 상봉할 수 있었다.

    1990년 평양에서 아버지 이용진 선생은 생일을 맞은 아들 이회택에게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그것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 진출을 이끌었던 북한의 축구 영웅 박두익과의 인연 덕분이다.

    국제대회에서 여러 차례 만난 두 사람은 친분을 쌓았고, 박 감독은 부친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1990년 10월 10일, 이회택은 평양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대회 남측 선수단 고문으로 방북하면서 그리운 아버지를 만났다.

    한눈에 서로를 알아본 부자는 울음을 터뜨리며 얼싸안았다.

    다음날 이회택은 아버지가 직접 차려준 생일상을 받았다.

    ◈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월드컵에 참가하다

    1979년 선수생활을 떠난 그는 지도자로 변신했다.

    한양대 감독에서 출발해 프로축구단 포항아톰즈를 이끌었다.

    감독을 맡은 첫해인 1986년에 축구대제전 우승이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끌어냈고, 1988년에는 프로축구 리그에서 우승하면서 프로축구 지도자상을 받았다.

    지도자로서도 최고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여세를 몰아 대망의 한국대표팀 감독에 88년 12월 취임했다.

    한국대표팀은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중국, 카타르, 사우디, 북한 등과 함께 예선전을 치러 4승 2무라는 무패의 기록으로 본선행 티켓을 땄다.

    우리 국민들 모두 월드컵 본선에 대해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

    첫 경기는 1990년 6월 12일 베로나에서 벌어진 벨기에와의 경기였다.

    0대2로 힘 한번 못쓰고 무너졌다.

    이탈리아월드컵 조별 리그 벨기에와의 1차전. 한국은 0대2로 완패했다.

     

    1주일 전 너무 늦게 이탈리아에 들어온데다 싸울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도 잘 몰랐다.

    지금같이 인터넷이나 비디오 자료를 통해 상대를 분석하고 싸운게 아니었다.

    그냥 '벨기에는 스타 '아무개'가 있지' 하는 정도였다.

    '압박'(프레싱)이란 것도 몰랐다.

    태극전사들은 강하게 미드필드에서부터 조여오는 상대 선수들의 프레싱에 당황했다.

    지도자는 준비가 부족했고, 나가서 싸울 선수들의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스페인전에서는 황보관이 중거리포로 한 골을 뽑았지만 결과는 1대 3 완패였다.

    스페인전에서 황보관이 성공시킨 시속 114km의 빨랫줄 같은 슛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이 대회에서 한국이 기록한 유일한 골이었으나 '대회 베스트 5골'에 선정됐다.

     

    마지막으로 벌어진 우루과이전에서는 0대1로 석패해 3패를 기록하고 짐을 싸고 귀국했다.

    이회택은 두고두고 얘기를 했다.

    "열번 다시 태어나도 축구 선수는 하겠지만 대표팀 감독은 하지 않는다.
    그 시절 내가 받았던 정신적 쇼크는 너무 컸다.
    대표팀 감독은 정말 힘든 자리였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대표팀 감독 시절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인 황선홍-홍명보 선수를 발탁한 것이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이후 이회택은 독일월드컵 단장이니 축구협회 기술위원장 등을 지내다 지금은 다 그만 두고 고향 김포에서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회택은 지난 2005년 9월 21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오늘 새벽 브라질에서 열린 벨기에와의 경기를 보면서 "왜 이회택-차범근-황선홍-박지성으로 이어지는 공격수의 맥이 끊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후계자 한 명만 있어도 한 명이 퇴장당한 벨기에전에서 패배하는 참사는 없었을텐데..."하는 생각이 든 축구팬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 시각 주요뉴스


    실시간 랭킹 뉴스

    노컷영상

    노컷포토

    오늘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