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방문한 안산 트라우마센터는 속된 말로 '맨 땅에 헤딩중'이었다.
이달 초 설치돼 한달도 채 운영되지 않았지만 서른명 안팎의 적은 인력으로 세월호 희생자 가족부터 불특정 다수의 일반 시민들까지 수천여명의 정신 건강을 책임지는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도시공사 건물 3층 한 켠에 자리한 안산 정신건강 트라우마센터. 단원보건소 내에 임시로 마련됐던 거처를 떠나 새롭게 이전한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장소가 협소했다.
30평 남짓한 사무실에는 전화를 받는 직원들과 상담사들이 분주하고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직접 상담을 받을 여건은 안 돼 보였다.
공사 직원들의 휴게실이 임시 상담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는데 문이 유리로 돼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데다 직원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직접 찾아오는 분들은 많지 않고, 희생자 가족들의 가정 방문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고 센터 관계자는 전했다. 실제로 이날 하루 센터를 찾은 일반 상담인은 1명에 불과했다.
◈ 나 살겠다고 무슨 상담이냐... 죄책감에 상담 거부하는 가족 많아상담사와 사회복지사들은 2인 1조 또는 3인 1조로 팀을 짜서 하루에 2~3가구씩 방문하고 있다.
하지만 상담을 거부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가구도 수십 가구에 달하는 실정이다.
센터 측 통계에 따르면 현재까지(21일 기준) 세월호 희생자 243가구를 방문했지만 이중 199가구만 면담을 했고, 20가구는 상담을 미루거나 거부했다. 24가구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내 새끼가 죽었는데 나 살겠다고 무슨 상담을 하느냐"며 죄책감에 한사코 상담을 거절하는 가족들이 많다고 상담사는 전했다. 한 번 상담을 받은 뒤 추가적인 상담에 소극적인 가족들도 많다고 한다.
가족들 중에는 비극적인 상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일부러 감정을 회피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국립서울병원에서 파견온 상담사 김옥주(42)씨는 "슬픔을 느끼는 '애도 기간'도 충분히 있어야 자연스러운데 가족들 중에는 아예 현실을 부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상담 자체를 거부하던 가족들도 상담사의 지속적인 접촉과 방문 뒤에는 점차 마음을 연다고 한다.
김 씨는 "'아직 아이들도 다 못 찾았는데 무슨 상담이냐'며 손사레를 치던 가족들도 여러번 진심을 담아 방문하거나 연락을 드리면 점차 받아주신다"며 "새로운 인력이 오면 낯설어하시는 만큼 전담자를 두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나머지 가족분들도 서둘러 상담을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료사진. 황진환기자
◈ 센터 직원 16명 뿐, 나머지 파견 자원봉사자에 의존이제 막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트라우마센터 의료진과 상담사들은 굳게 닫힌 가족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정부의 지원은 미비한 것이 현실이다.
트라우마센터 개관이라는 대대적 홍보에 대비해 3~40명 남짓한 인력은 안산 지역 희생자 260여가구를 방문, 상담하기도 빠듯하다. 세월호 참사 관계자나 일반 시민들까지 포괄하기에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현재 센터에서 직접 고용된 직원은 정신과 의사 2명을 포함해 16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국립서울병원이나 지역사회복지협의회 등에서 임시로 파견 나오거나 자원봉사를 온 인력들이다. 의료진만 따져보면 배치된 정신과 의사는 총 6명(4명 국립서울병원 파견, 2명 센터고용)이 전부다.
이중규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장은 "일반 시민들은 직접 센터에 찾아오신다면 상담을 해 드리지만 일손이 딸리기 때문에 맨투맨으로는 어렵다. 우선적으로 희생자 가족들의 방문 상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센터측은 직접 고용 인원을 30명 정도까지 늘릴 계획이지만 대신에 그간 상담을 도맡았던 파견 의료진이나 상담사들이 빠지면 가족들에게 혼란을 주고 연속성을 해칠 수 있다.
사고 발생 시 응급 의료 인력 동원에 대한 법률은 마련돼 있지만 정신 건강과 관련해서는 상담사 및 의료진 투입이 더디게 진행되는 실정이다. 초기에 투입되는 인력이 지속적으로 배치돼야 하는데 자원봉사자나 파견자에 의존하다보니 중간에 담당자가 바뀌면서 혼선을 빚는 경우도 많다.
이에 새누리당 신의진 의원은 "신체적 치료 등에 대해서는 응급 인력 배치 규정이 있지만 정신적인 상담이나 치료 인력 지원에 대해서는 법적인 규정이 없다"면서 조속한 법률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진도 팽목항에서 한 스님이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황진환기자
◈ 한달이 치료의 골든타임, 잠수부 등 관계자들 상담도 시급복지부는 연간 최대 40억원을 들여 향후 3년간 센터를 운영할 계획인데 올해까지만 전액 국비로 운영하고, 내년부터는 지자체로 운영권을 넘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센터를 지자체로 이관하지 말고 전액 국비로 지원, 운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일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이목희 의원은 "연간 예산이 40억 원에 불과한데 이 예산도 국비와 지방비를 5 대 5 비율로 한다면 제대로 된 치료 지원이 되기 어렵다"며 전액 국비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사고 발생 후 한달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의 '골든타임'으로 여겨지는 만큼 즉각적인 현장 인력 투입과 모니터링 강화가 필요하다.
PTSD의 증상은 길게는 사고 발생 수십년이 경과된 이후에도 발생할 수 있지만 사고 한달 전후로 정신적 치료를 받는지 여부가 추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이 시기가 가족들에게 집중적인 정신 상담이 이뤄져야 하는 골든타임인 것이다.
서울시 보라매병원 최정석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트라우마의 증상은 1주일 안에 시작되는 경우도 있고, 길게는 10년, 20년이 지나고 시작되는 경우도 있는데 사고 발생 후 한달이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며 "초기에 얼마나 일찍 상담이나 의료적 개입이 시작되는지가 관건이 된다"고 설명했다.
직접 희생자를 목격한 잠수부나 구조 인력, 관계자 등에 대한 정신 건강 관리는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