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신료의 지구사/ 프레드 차라 지음, 강경이 옮김, 주영하 감수 / 휴머니스트
독특한 향과 맛으로 사람의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는 향신료는 요리에 풍미를 더하며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천국의 향기'로 불리며 고대부터 현대까지 사랑받고 있는 향신료의 그 이면에는 달콤함만큼이나 피비린내도 함께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후추와 칠리페퍼(고추)외에도 클로브(정향), 시나몬(계피·석란육계), 넛메그(육두구) 등 다섯 가지 향신료가 주인공이다. 저자는 향신료의 재배와 무역이 세계 역사에 미친 영향을 시간여행처럼 짚어간다. 이 다섯 가지 향신료가 어떤 경로로 아시아에서 유럽, 아메리카 대륙 등으로 전파됐는지 보여준다.
■ 세계 역사의 흐름을 뒤바꾼 향신료의 역사원산지를 벗어나면 재배되지 않는 향신료 대부분은 아시아에서 주로 생산된다. 이 때문에 고대 유럽에서는 향신료를 얻기 위해 오래전부터 노력을 기울였다. 고대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대항해 시대에는 해적과 무역상들이 향신료 전파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유럽으로 전파된 향신료는 유럽의 문화와 식습관을 뒤바꿔 놓았고, 향신료를 얻기 위한 노력은 항해술과 지도제작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중세에 들어 향신료가 교역과 십자군 전쟁 등을 통해 유럽에 널리 전파되었지만 유럽인들은 여전히 향신료를 이국적면서도 종교적인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넛메그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절대 뼈가 부러지지 않는다, 중풍에 걸리지 않는다는 둥 갖가지 미신이 떠돌았다. 식문화 뿐만 아니라 이러한 미신들도 향신료의 경쟁을 부추겨 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지배, 착취와 학살을 불러왔다.
1615년 네덜란드 군대는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의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원주민들이 영국, 포르투갈 상인과 향신료 거래 계약을 맺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는 이곳에 노예를 들여와 독점 무역을 시작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은 인도네시아에 위치한 몰루카 제도, 일명 '향신료 제도'를 차지하기 위해 15세기부터 19세까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탐험과 교역을 통해 열린 최초의 세계화 시대는 실상 향신료 전쟁이었던 셈이다. 향신료가 내는 가장 진한 향은 결국 부를 향한 피의 냄새이기도 하다.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가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등 향신료 생산국의 가난한 노동자와 비싼 값을 지불하는 소비자 사이에서 중간 유통자들만 배를 불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불공정을 바로잡는 대안으로 저자는 공정무역을 제안한다. 향신료 독점을 위한 유럽 열강들의 무역 전쟁을 다룬 부분은 근대 세계 경제사로 읽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 한국의 향신료 역사책속 특집글 '한국 향신료의 오래된 역사를 찾아서'에서는 향신료의 역사를 한국적 시선으로 들려준다. 조선시대 문헌을 통해 원래 한반도에서 쓰이던 생강, 마늘, 천초, 파 같은 향신료의 역사를 비롯해 이 책에서 다루는 다섯 가지 주요 향신료가 한반도에 어떻게 전래되고 쓰였는지를 들려준다.
생강, 천초, 마늘, 파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뒤 한반도에서 재배되면서 오랫동안 음식 조리에 즐겨 사용됐다. 후추(페퍼), 석란육계(시나몬), 육두구(넛메그), 정향(클로브)은 재배되지 않아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다. 수입 향신료들은 귀한 만큼 요리보다는 궁중에서 약재로 많이 쓰였으며, 후추의 경우 조선 중기부터 음식 조리에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20세기 들어 한국인의 식탁에서 고추의 양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맵게 지적한다. 식재료의 신선도와 다양한 조리법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식민지 의학자들이 제기했던 다량 식용 문제가 한몫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지나치게 매운 음식을 선호하는 식습관을 한국 음식에서 개선해야 할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