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빈에 들어가자, 엄청난 인파가 쏟아져 나와 그들을 환영했다.
◈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독일군과 히틀러, 열띤 환호 속에 행진하다
독일군과 오스트리아 국경수비대가 독일-오스트리아의 국경 표지를 철거하고 있다. 주민들이 즐거운 듯이 바라보고 있다.
1938년 3월 12일, 독일 국방군이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었다.
갖은 방법으로 오스트리아 정부를 협박해 국경을 열은 독일군은 내심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싸늘한 반응을 예상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국경을 수비하던 오스트리아 군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주고, 가는 곳마다 주민들의 히틀러식 환영을 받았다.
모두들 손을 앞으로 치켜들고 '하일 히틀러'를 외쳐댔다.
거리의 시민들은 거미처럼 생긴 나치 깃발과 꽃다발을 들고 환영했다.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침공을 '꽃의 전쟁'으로 부르기로 했다.
1938년 3월 15일, 히틀러는 빈의 헨덴플라츠에 모인 20만 명의 시민들에게 '이제 오스트리아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군대를 따라 오스트리아에 들어온 히틀러는 군중들의 열광에 제 정신을 잃었다.
히틀러에 대한 환영은 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거리는 열광적인 환영 인파로 출렁거렸다.
건물마다 나치 깃발이 걸렸다.
24년 전 일정한 직업이 없이 빈에서 싸구려 그림을 팔던 실업자 청년이 대 독일제국의 총통으로 돌아온 것이다.
독일 제3제국 의회에서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합병을 발표하자 모두들 기립하여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있다.
독일의회는 즉각 독일과의 합병을 결의했다.
다음달 10일에 치러진 오스트리아 국민투표에서 99.08%가 합병을 찬성했다.
오스트리아는 독립을 잃고 <오스트마르크>라는 이름의 한 주로 전락했다.
◈ 오스트리아 국민들, 독일보다 한술 더 떠서 유태인 탄압에 나서다
빈의 거리에 끌려나와 칫솔로 바닥 청소를 하는 유태인들.
나찌와 오스트리아 정부는 합병 직후부터 반체제 정치인들과 유대인에 대한 박해에 나섰다.
불과 몇주 안에 6만명의 유대인이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과 기독교사회당 지도부 인사들도 모두 체포돼 수용소로 끌려갔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치인들은 좌우를 떠나 독립을 찾는 방안을 끝없이 토론한다.
오스트리아 군인 60만명이 독일군에 편입돼 침략전쟁의 선봉으로 나섰다.
특히 잔인한 살륙이 벌어진 동유럽과 발칸 반도의 친위대와 비밀경찰에 오스트리아인들이 집중 배치됐다.
전쟁이 끝난 후 전범으로 분류된 오스트리아인은 54만명에 달했다.
◈ 슬픈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제작한 '사운드 오브 뮤직'은 아름다운 경치와 노래 때문에 정작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잊게 한다.
잘쯔부르크에서 7명의 자녀와 사는 완고한 폰 트랍 대령이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진다는 로맨스 영화이다.
결국 결혼에 골인하지만 독일군의 징집명령을 거부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스위스로 망명길을 떠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전 해군장교 트랍 대령은 독일과의 합병을 반대하는 소수임을 인정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조국을 떠난다.
이 가족이 도망치듯 망명길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이 나라의 나찌즘이 얼마나 극성을 부리고 있는지롤 보여준다.
◈ 패전...4개 강국에 점령당하다
빈에 입성하는 소련군. 가는 곳마다 약탈과 강간을 일삼아 전후 국민투표에서 오스트리아 공산당은 전멸해버린다.
2차대전 막바지에 오스트리아는 전쟁터로 바뀐다.
수도 빈만 해도 50번 이상 공습을 받아 8천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소련군이 먼저 1945년 4월 초에 빈에 도착했고, 미군도 서둘러 서쪽을 점거한다.
알프스 산맥에서 만난 미군과 소련군.
결국 오스트리아는 미국과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이 분할 통치하는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움직임은 빨랐다.
보수와 진보는 물론 공산당까지 끌어안고 재빠르게 임시정부를 구성한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전쟁 중에 나온 <모스크바> 선언이다.
전후에 오스트리아 통일과 독립의 주역이었던 카를 레너 전 대통령. 끊임없는 소통과 양보를 통해 나라의 단합을 이끌었다.
연합군은 "오스트리아는 히틀러 침략전쟁의 첫번째 희생물이며 독일과의 합병은 무효"라고 발표했다.
이어 "오스트리아가 히틀러 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한데 대해 얼마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오스트리아는 '책임' 부분은 묵살하고 오로지 '희생자 신화'만 들이밀었다.
악질 전범에 대한 처벌과 공직 추방도 흐지부지되었다.
카를 레너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는 점령국을 상대로 10년간 치열한 협상을 벌였다.
먼저 거국내각을 구성해 냉전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점차 서방으로 기우는 오스트리아에 불만을 가진 소련을 달래기 위해 '영세중립국가' 카드를 내밀었다.
드디어 1955년 5개국 외무장관이 빈에서 모여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하는 <국가조약>에 서명한다.
이어 10월 26일 의회는 헌법을 수정 가결해 오스트리아의 영구중립을 선언했다.
영세중립을 선언한 10월 26일은 오스트리아의 경축일로 다양한 행사와 축제가 펼쳐진다. (사진=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
◈ 숨겼던 어두운 과거와의 만남...발트하임 대통령의 나찌 전력 논란
유고슬라비아의 포드고리카 비행장 활주로에 서있는 나치 장교복 차림의 쿠르트 발트하임 전 유엔 사무총장(가운데).
1986년 오스트리아 연방대통령 선거에 쿠르트 발트하임 전 유엔 사무총장이 출마했다.
선거전 와중에 빈과 뉴욕에서 발트하임이 나찌 전력을 숨겼다는 폭로기사가 잇따라 나왔다.
그가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서 나찌 정보장교로 근무하면서 6만여 명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는데 관여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셈이다.
발트하임은 그저 '임무수행'을 했을 뿐이라고 발뺌했다.
문제는 오스트리아 유권자들이 이런 의혹에도 불구하고 53.9%의 표를 던져 그를 6대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범자 의식'이 작동했다.
그러나 댓가는 혹독했다.
이스라엘 정부가 즉각 대사를 소환하고, 미국정부는 발트하임을 기피인물 리스트에 올려 입국을 막았다.
그는 6년 임기동안 국제무대서 완전 고립돼 재선을 포기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1979년 5월 한국을 방문해 국립중앙박물관을 둘러보는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멀고 먼 오스트리아의 역사청산발트하임 사건은 나찌 범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공동책임론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온갖 논란 끝에 프라니츠키 수상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1991년 의회연설을 통해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2차 세계대전과 그 결과에 대한 오스트리아인들의 공동 책임을 시인했다.
이어 의회는 나찌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가 미군에 의해 해방된 5월 5일을 <폭력과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기념일>로 제정했다.
여전히 어두운 과거와 대면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일본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였던 오스트리아 짤쯔부르크시의 아름다운 전경.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관광객을 위해 관광코스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사진=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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