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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기 바빴던 이승만…'스탈린은 달랐다'



책/학술

    도망가기 바빴던 이승만…'스탈린은 달랐다'

    [임기상의 역사산책⑩]'빨리 도피한다' VS '수도 사수한다'...엇갈린 국가의 운명

    지도로 보는 한국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의 일방적인 우세로 시작됐지만,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된다. 그러나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일진일퇴하다 휴전협상이 시작된 1951년 6월부터 교착상태에 빠졌다. (지도=웅진지식하우스 제공)

     

    ▣도둑같이 새벽 기차 타고 서울 떠난 대통령
    "각하~ 지금 서울을 버리고 떠나시면 안됩니다. 대통령이 피신하면 한국군 병사 전체가 전쟁을 포기합니다"

    "내가 북한군에게 잡히면 한국한테는 재앙이야"

    운명의 1950년 6월 25일 밤.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주한 미국대사 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즉시 서울을 빠져나가겠다는 대통령의 고집을 꺽으려고 남의 나라 외교관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무초 대사는 대통령이 적군의 수도 함락을 사수하다 군대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그러나 적군에 잡히지 않을 그 순간까지 머물러 있어 달라고 호소했다.

    끝내 설득은 실패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내각이나 국회에도 알리지 않고 달랑 4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객차 2량만 달린 낡은 3등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가다보니 대구다.

    "어~ 너무 내려갔다. 대전으로 돌려라"

    대전에 도착한 대통령은 또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인다.

    녹음방송을 통해 마치 자신이 서울에 남아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서울시민은 물론 국민들 모두 안심하라고 연설했다.

    서울로 올라간 녹음테이프는 27일 밤 10시부터 여러 차례 방송되었다.

    최고 지도자가 서울에 남아 '안심하라'고 방송하니 서울시민들은 피난을 가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입소문을 통해 대통령이 서울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정부와 군, 경찰의 고위 관계자들과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일제히 가족과 함께 재산을 챙겨 서울을 탈출했다.

    방송 다음날인 6월 28일 새벽 2시 15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 시민 대부분과 국군 주력부대, 많은 군사장비들이 고스란히 한강 북쪽에 남게 되었다.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3개월 후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서울이 수복되자 군경은 적 치하에 남은 서울시민들을 상대로 검거작전에 나섰다.

    시민들은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정부로부터 다시 부역, 친공, 북한협력 등의 혐의로 처벌받거나 처형되었다.

    국민과 정부를 버리고 도망간 이유로 처벌받은 자들은 한명도 없었다.

    다음 해 1월 4일 중국군이 밀고 내려오자 서울시민들은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한번은 속지만 두번은 속지 않는 법이다.

    혹한 속에 먼길을 떠나는1.4후퇴 피란길.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도록)

     


    오사카 성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의 혼간지(本願寺) 자리에 오사카 성을 짓고 조선 침략을 총지휘했다. (사진=역사의 아침 제공)

     

    ▣왜군 무서워 압록강 거쳐 만주로 도망가려 했던 선조
    지금부터 422년전인 1592년 4월 28일.

    믿었던 신립 장군마저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겁에 질렸다.

    <선조실록>은 이날 "충주에서 패전 보고가 이르자, 임금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가는 것)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고 기록했다.

    패전 소식에 패닉 상태에 빠진 선조가 가장 먼저 도주하겠다는 얘기다.

    대신들은 통곡하며 반대했다.

    이 시점에서는 남은 병사를 모아 한강 교두보를 지켜야 하는데 다 포기하고 도망가겠다니 대신들은 아연실색 했을 것이다.

    선조는 반대를 뿌리치고 이틀 후 새벽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궁궐을 나왔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자 한양 일대는 무법천지로 변했다.

    노비들이 들고 일어나 먼저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다. 이 곳은 공사 노비들의 문서가 보관돼 있는 곳이다.

    이 혼란 속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도 다 불에 타 폐허로 변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강방어선도 맥없이 무너지고 장수와 병사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다.

    한편, 벽제관~개성~평양을 거쳐 압록강변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이번에는 강 건너 요동으로 넘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라를 가장 먼저 포기한 인물이 국왕이다.

    신하들이 반발하고 명나라가 '오지 말라'고 통보하자 그제서야 주저앉았다.

    이 와중에 나라를 지킨 것은 전국에서 들고 일어난 의병들과 바다에서 일본 해군을 궤멸시킨 이순신 장군과 그 휘하의 수군들이었다.

    ▣ 적 침공 앞에서 혼란 수습하고 수도 지킨 스탈린
    문자 그대로 '총력전'이었다. 모스크바의 방어선 구축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민간인이 동원되었다(좌).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10월 혁명' 기념일의 퍼레이드. 이 병력들은 행사가 끝난 후 곧바로 전선으로 달려갔다. (사진=프라우다지 인용)

     

    1941년 10월 16일 모스크바는 대혼란에 빠졌다.

    3갈래로 소련을 침공한 히틀러의 '전쟁기계' 독일군은 서와 남, 북에서 모스크바를 압박해 들어왔다.

    독일군 선봉대는 모스크바 교외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희미하게나마 크레믈린 궁의 나선형 탑이 보이는 곳이다.

    외국 외교관들이 모두 동쪽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대거 수도를 빠져나가거나 약탈, 파업에 가담했다.

    영화관들은 문을 닫고 지하철은 운행을 멈추었다.

    시민들은 절규했다.

    "우리의 지도자 스탈린은 어디에 있는거야? 그는 우리를 버렸다"

    그 시간에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집무실에 앉아 반전의 계기를 찾고 있었다.

    집무실로 장군들과 참모들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매년 거행하던 볼셰비키 혁명 24주년 기념일 퍼레이드를 올해도 실시하겠다"

    부하들은 대경실색했다.

    독일군이 코 앞에 온데다 독일 공군으로부터 폭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다시 강조했다.

    "모스크바 시민뿐 아니라 전국의 군대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열병식을 거행한다"

    1941년 11월 7일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드넓은 붉은 광장에서 소련군의 장중한 행진이 벌어졌다.

    이어 스탈린이 연단에 서서 연설을 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떠한 군사적 지원도 없이 단독으로 해방을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독일 침략자들은 소련 국민들을 섬멸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당하게 해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운명이 어떠했는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연설은 라디오 방송과 확성기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퍼레이드와 연설을 직접 본 시민들이나 중계를 들은 소련 국민들 가슴에 피가 끓어 올랐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스탈린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한 병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최고 지도자가 모스크바에서 우리와 함께 있기로 결정한 사실을 확인한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에 고무되어서 우리는 마치 진군하는 나찌놈들을 잡아 관에 가두고 못질 하듯이 의기양양하게 행진했습니다"

    1년 후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궤멸시키고 쾌조의 속도로 베를린을 향한 진군을 시작한다.

    스탈린의 공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이때 이 순간만은 진정한 '지도자'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한국전쟁에서 한민족의 지도자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중요한 것은 국난 속에서 리더는 백성과 군대와 자리를 함께 해야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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