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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일반

    600만 해외 교포는 우리 민족의 자산

    • 2004-12-12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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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교포 문제 연구소 이구홍 소장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해외 교포 문제 연구소 이구홍 소장, ''''자칭 600만 교포의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각오라면 이보다 더 매력 있는 일이 있을까. 600만이 넘는 동포들의, 기한도 없는 정신적 대통령. 이런 각오라면 참 재미있고, 행복한 일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해외 교포 문제 연구소는 언제 창립이 됐나.


    ◑ 이구홍 소장>
    내가 대학 4학년 때였다. 한일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64년에 창립했으니까 40년이 넘었다. 당시에는 재미 교포 숫자가 6만 밖에 안됐으니까 10년 이상 주로 재일 교포 문제를 다뤘다.


    당시 한일 회담 대표였던 문인구 변호사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일본의 대표는 한사람이 계속 나오는 반면 우리는 6차 회담까지 매번 사람이 바뀌어서 회담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배우러 가는 식이라고. 결국 논리가 부족하니까 팔아먹는 것이 일제 하 ''''36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당시로서는 교포라고 하면 부자 또는 간첩이라고 보는 인식이 많았다. 간첩사건 터지면 죄다 교포였으니까.


    당시 재일 교포의 지위는 매우 형편없었다. 심지어 목욕탕을 가더라도 외국인 등록증을 소지하지 않으면 일본 경찰이 체포할 수 있었다. 일본은 재일 동포를 불량 시민으로 보고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추방할 수 있을지에 주안점을 뒀다.


    그런 호소를 듣다 보니, 돈 3억 불, 청구권 자금도 중요하지만 이 분들의 인권 문제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일 교포 문제는 결국 일제 36년의 결과물 아닌가. 한동안은 이 사람들을 데려가서 일본인으로 만들었다가 패전하자 하룻밤 사이에 외국인 등록증을 만들 것을 요구하며 외국인으로 취급해 버렸다.


    ◎ 사회/정범구 박사>
    창립 당시 엄민영 내무부 장관을 끈질기게 찾아가서 결국 도움을 받았다는데.


    ◑ 이구홍 소장>
    당시에는 등록이 되지 않으면 활동이 전혀 불가능했다. 재일 교포 학생들에게 보낼 위문 편지 8천 여 통을 모았는데 등록이 돼 있지 않아 그 편지들을 일본으로 보낼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담당 과장이 학계 출신인 고위층을 업고 오지 않고서는 등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교수 출신으로 내무부 장관으로 있었던 엄민영 장관을 생각해 내고는 수차례 장관 댁에 찾아갔는데, 제일 먼저 문 열어 주는 사람이 가정부였고, 어렵게 만난다손 치더라도 비서 정도.


    결국 어느 날은 꾀를 내서 화장품 구루무를 사다가 가정부 손에 쥐어주고는 도망쳤는데 한 일주일 쯤 후에 찾아갔더니 그 가정부가 무지 친절해졌다. 그래서 결국 20여 차례 방문 끝에 엄민영 장관을 만나 큰소리를 쳤는데...


    어차피 그 댁 방문하는 사람들 모두 굽실굽실 할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억에 남지 않을 것 같아서 ''''대한민국 장관 만나기가 왜 이렇게 힘듭니까? 내가 며칠 만에 당신 만나는지 아십니까? 어제까지 교수였다가 장관됐다고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하고 호통을 쳐버렸다.


    그리고는 교포들에게 보낼 위문편지 중 잘 된 것 몇 개를 내 보였다. 그 중에는 은단 봉지에 흙을 싸서 ''''이것이 조국의 흙이다. 너는 아직 조국의 흙냄새를 못 맡았을 텐데... 이거라도 맡아다오'''' 하는 여학생 특유의 호소력이 담긴 편지도 있었다. 그런 편지들을 보이면서 이 단체가 등록이 되면 이 편지를 외무부를 통해 일본에 보낼 수 있으니, ''''해외동포문제연구소 이사장 엄민영''''이라고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결국 사인을 받아 광복 이후 외교부에 33번째로 등록된 단체가 됐다.


    ◎ 사회/정범구 박사>
    엄민영 장관과의 만남이 계기가 돼서 나중에 브라질에 대규모 이민을 보내는 문제까지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제안하게 됐다는데.


    ◑ 이구홍 소장>
    그 때는 박대통령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 중이었다. 그래서 국내 경제학자들을 숱하게 만났는데, 대부분 한국은 자원이 없는 나라라서 공업화는 안 되고 농업화 모델인 노르웨이 모델 등 몇 개일 수밖에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런 비관적 결론을 갖고 있을 때였는데.


    재일교포였던 코오롱 이원만 사장이 타이어와 나무로 만든 인형 보따리를 들고 엄민영 장관을 찾아가서 ''''일본은 이 인형으로 1억불을 수출하는데, 우리는 왜 자원이 없다고 하냐''''면서 안타까워했다. 당시 한국 수출고는 1천 6백만 불에 불과했는데, 그런 인형으로 1억불을 수출한다니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결국 이원만 사장의 설득으로 인해 제 1차 경제 개발 계획이 수정된다.


    나는 그 때 엄민영 장관에게 ''''우리는 어차피 사람을 팔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실업자 투성이 아니었나. 일본 사람들은 브라질에 가서 대성공을 했고, 일본 전 국토 보다 더 넓은 땅을 개척했다. 그래서 우리도 사람을 팔아야 산다고 했더니 엄장관이 그것을 굉장히 깊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보고 그 이야기를 대통령 앞에서 직접 이야기하라고 했던 것.


    ◎ 사회/정범구 박사>
    우리 해외 동포가 600만 명이 넘는다는데.


    ◑ 이구홍 소장>
    물론 상당수는 화교이고, 유태인이 1600만. 그리고 이태리인, 인도인 다음으로 우리나라일 텐데. 남북 통틀어 6천만 중 6백만이니까 10%이상이다. 화교가 아무리 많아도 12억 인구 중에 4천만이고, 일본도 1억 2천만 중 170만이니까 1.6%정도. 그런데 우리는 10% 이상 해외 동포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세계 순위권이다.


    재일 동포들은 65년도 국교 정상화가 타결되면서 한국에 들어오게 됐는데, 우리는 65년부터 70년대 초반까지 항상 북한 콤플렉스를 가졌다. 그 때는 북한이 우리보다 앞섰으니까.


    그런데 불과 5~6년 만에 우리가 북한을 앞서기 시작했다. 나는 7.4 공동 성명도 통일을 하자는 회담이 아니라 남북 어느 사회가 더 잘 사는 사회인지 내기 경쟁을 한 회담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한국 경제가 비약 성장하는 과정에 재일 동포가 본국에 기여한 것이 엄청나다.


    5~6년 동안 재일 동포의 자본과 기술이 동시에 들어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포를 민족의 자산이라고 보는, 시각 전환을 한다면 국력 발전에 큰 힘이 된다고 본다. 당시 재일 교포의 송금 액수를 처음으로 조사해서 발표했는데, 우리의 수출액이 3~4천만불 정도일 때 교포들의 송금액이 4천만불이었다.


    ◎ 사회/정범구 박사>
    꽤 오래 전부터 교민청 신설이 대선 공약으로 등장하지 않았나. 그것이 왜 아직도 실현이 안 되고 있을까.


    ◑ 이구홍 소장>
    외교부는 교포를 민족 자산이 아닌 짐으로 보고, 피하려 든다. 최근 이 사람들이 꾀를 내서 현지화 정책이란 것을 하고 있는데, 재미 동포가 현지에서 미국 사람이 돼서 성공하는 것이 당신 좋고 조국 좋다는 논리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현지화는 곧 조국의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한다. 그러니까 바나나 인생을 만든다. 겉으로는 동양인인데, 정신적으로는 미국인이 된다. 이런 사람은 백만이 아니라 천만이 있어도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 사회/정범구 박사>
    대사관이 교민들 관리 등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영사 업무 자체가 외교관들이 기피하는 업무 아닌가.


    ◑ 이구홍 소장>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외교관들은 영사 업무를 동 서기로 인식한다. 그러니까 영사 업무는 외교관들에게는 기피의 현장이고, 그래서 1년 몇 개월이면 자리를 뜬다.


    옛날이야기지만 어느 대사는 직원들을 모아 놓고 근무 성적이 나쁘면 영사부로 내쫓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교민청을 설립하게 되면 외교관들의 상당수가 교민청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지 않나. 박정희 대통령도 교민청을 만들라고 했지만, 외교부가 극렬 반대했다. 미국, 중국이 반대한다고 외국까지 끌어들이면서.


    ◎ 사회/정범구 박사>
    전 세계에 화교가 퍼져 있는 중국의 경우는?


    ◑ 이구홍 소장>
    개정 전 중국 헌법에는 네 개의 화교 보호 조항이 있었다. 대만헌법에도 네 개가 있다.


    국가는 화교를 보호한다고 아주 못을 박는다. 북한 헌법에도 2개 조항이 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아주 인색하다. 2조 2항에 단서 하나 붙는다.


    지금까지는 중국 정부 보다 대만 정부의 화교 정책이 강했다. 대만 헌법에는 화교사무위원회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최근 헌법이 바뀌어서 여섯 명의 화교 대표를 국회에 보내도록 하고 있다. 대만과 중국이 벌이는 일종의 화교 전쟁으로 보이는데, 그에 비해 우리는 너무 미약하다.


    ◎ 사회/정범구 박사>
    8~9일 양일 간 교포정책포럼을 열었는데. 주로 어떤 이야기들이 나왔나.


    ◑ 이구홍 소장>
    재일 동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등에 대해서 논의했다. 재일 동포의 경우 귀화 문제가 있다. 한국 국적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지, 아니면 일본이 요구하는 대로 귀화해서 사는 것이 바람직한지, 이제 이 부분을 정리할 때가 왔다는 것.


    재일 동포의 귀화 문제는 미국의 경우와 다르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따듯이 재일 교포도 시민권을 따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를 지식인들도 하고 있는데, 재일 교포의 역사성, 식민지화 문제 등을 해소하지 않고 우리가 일본에 귀화한다는 것은 일본 정부의 동화 정책에 휘말리는 것이다.


    민족성을 죽이는 것이고, 미국처럼 우리의 성을 그대로 가지고 시민권을 따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귀화제도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일본인화 될 것을 요구한다.


    ◎ 사회/정범구 박사>
    어느덧 이 문제를 가지고 40여 년간 씨름하시다 보니 60대가 되셨는데, 앞으로도 계속 재일 동포의 지위 개선을 위해 일하실 계획인가.


    ◑ 이구홍 소장>
    누가 날 임명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칭 600만 교포의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각오라면 이보다 더 매력 있는 일이 있을까. 600만이 넘는 동포들의, 기한도 없는 정신적 대통령. 이런 각오라면 참 재미있고, 행복한 일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해외 동포와 관련된 재외 동포법, 국적법 개정 논의, 해외 동포에게 참정권을 주자는 움직임 등 몇 가지 현안 가운데 일생 동안 꼭 개선되는 것을 보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


    ◑ 이구홍 소장>
    최소한의 예산으로 교포 사회를 극대화시키고 활성화시키려면 교포 사회를 일원화하는 교민청이 빨리 설치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각 부처가 따로 이 문제를 다루다 보면 현장에 떨어지는 결과물이 없다. 또 이것을 뒷받침하는 재외동포보호법, 문화진흥법 등이 이번 기회에 통과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행:정범구박사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98.1MHz 월~토 오후 7시~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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