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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 말하는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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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이 말하는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 2007-10-1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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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큰 언니처럼…우리가 만든 한복 보며 아이 같이 기뻐해…"

    이방자

     

    "이방자 여사는 우리 장애인을 밝은 세상으로 이끌어 준 등불이었습니다"

    12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가 세운 국내 최초의 장애인 직업교육시설 ''명휘원''을 찾은 2기 졸업생 김명숙(57.여.지체장애3급) 씨는 "장애인 졸업생들이 사회에 진출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던 여사의 열정적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1969년 명휘원 수예반을 졸업한 뒤 이방자 여사를 도와 명휘원에서 8년간 장애인들을 가르치다 현재 경기도 광명시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으며 명휘원 1기 졸업생인 남편과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김 씨는 "당시 장애인들은 학교나 직장을 가지는 것은 꿈도 못 꿨고, 집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어려워했다"며 "여사님은 그런 우리들을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이끌어준 사람"라고 회상했다.

    ''장애인들이 기술 등 직업적 전문성을 갖추고 사회에 안착할 때까지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여사는 장애인들이 만든 옷을 입고 장애인이 만든 제품을 판매하는 바자회 등을 열게 했다.

    [BestNocut_L]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거쳐 장애인들은 사회 진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수익금으로 기숙사 설립과 학생 증원 등 복지사업도 확대할 수 있었다.

    또 국내에는 장애인을 위한 재활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여사는 고국인 일본 등 해외를 다니며 지원을 받아오기도 했다.

    김 씨는 "많은 장애인들이 그때 배운 기술로 30년이 넘도록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살고 있다"며 "여사님은 항상 큰언니 같이 편안하게 장애인들을 대했고 우리가 직접 만든 한복을 아이같이 기뻐하며 즐겨입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씨는 그러나 "일본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여사의 이러한 업적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본 왕족 신분으로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던 영친왕(이은)과 정략결혼한 이방자 여사는 해방 후에도 정치적인 문제로 영친왕이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면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장남 이진이 1922년 생후 9개월만에 국내에서 의문의 독살을 당하는 아픔을 겼기도 했다.

    김 씨는 "생전 여사의 전속사진사로 활동했던 김만식 씨가 매년 여사의 추모전시회를 가졌지만 김 씨가 사망하면서 그마저 끊겨 아쉽다"며 "다른 졸업생들과 함께 기념사업을 펼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방자 여사는 1963년 영친왕과 함께 한국으로 온 뒤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특히 남편인 영친왕과 함께 장애인 복지에 대해 관심이 많아 1963년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을 시작으로 1966년 장애인 재활을 위한 자행회, 1967년 직업교육전문기관 명휘원을 잇따라 설립했다.

    남편의 호인 명휘(明暉)를 따 명휘원이라 이름짓고 남편과 자신의 호인 가혜(佳惠)에서 한자씩 따 명혜학교를 설립할 만큼 생전 남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지극했다.

    또 일본 왕족의 신분임에도 한국에 돌아온 뒤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나는 한국인이고 내가 묻힐 곳도 한국입니다"라고 밝혔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도 두터웠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던 이방자 여사는 1985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에 명휘원 운영을 맡긴 뒤 1989년 숨을 거뒀으며 같은해 장애인 복지활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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