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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가 하는 일은 미움을 없애주는 일"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다큐멘타리안 박성미 감독

박성미

 

''''관성적으로 삶을 기웃거리는 행위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 안의 열정을 완전히 연소시키길 다큐멘터리는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다큐멘터리를 선택했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쉽게 포기하지 못 할 것이다. 세상이 그리 좋아지지 않는다 해도 결코 백기 들고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그것은 내 삶에 대한 나의 도전이며 끝없는 고난의 행군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다큐멘터리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노동을 끝낸 들판에서 사과 하나 두 쪽으로 나눠 먹을 수 있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다큐멘터리스트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타리 제작 전문 업체 디케이 미디어 대표이사인 박성미 감독이 한 말입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다큐멘타리안, 당찬 여성 박성미 감독을 8월 15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세상을 울리는 다큐멘터리 ''''핵심은 진심''''

[BestNocut_R]▶ 박성미 감독님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40살로 접어드셨는데요.

이걸 제가 쓴 게 2001년도 ''''다큐코리아''''라는 회사 홈페이지를 만들었을 때인데 지금은 디케이 미디어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그때 다큐코리아였을 때 대표의 인사말이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막 쓴 건데 사이트의 이 글을 뺐거든요. 이 글이 어디서 나왔는지 깜짝 놀랐어요.

▶ ''''노동을 끝낸 들판에서 사과 하나 두 쪽으로 나눠먹을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다큐멘터리스트다'''' 이 말은 정말 가슴에 와 닿아요. 세상을 바꾸고 싶고 말 걸고 싶고 알고 싶은 욕구가 아직도 박성미 감독의 가슴에 남아있나요?

제가 87학번으로 대학시기를 험하게 보낸 세대이다 보니까 공부를 많이 못했어요. 하지만 확실하게 선배들이나 대학시기에 배운 것은 세상에 대한 애정이었어요. 그리고 중, 고등학교 시절에 반공웅변을 많이 했었는데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애국심은 확실하게 배운 것 같아요. 나를 있게 한 국가와 나를 있게 한 민족,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웅변하면서 몸에 배인 것 같아요. 반공웅변을 했는데 제가 웅변을 잘 했습니다.(웃음)

지금 생각하면 의외인데 전국웅변대회에 나가면 선생님들도 울었어요. 대학시기에 들어가서도 선배들 눈에 목소리가 일단 크고 정제되어 있고 발음도 좋고 하니까 프로파간다로 많이 이용한 것 같아요. 설득을 잘 하는 것 같은데 저는 설득의 핵심은 진심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할 때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설득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경영''''의 ''''경''''자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하루에 돈 나가고 들어오는 게 전 직원에게 공개되었거든요. 저보다 통장에 잔고가 얼마 들어있는지 직원들이 더 잘 알아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직원 전체 총회 때도 돈 얼마 들어왔고 얼마 썼고 어디에 얼마가 나갔는지 다 공개돼요. 그런 면이 투명해서 직원들에게 회사에 대한 신뢰를 주는 거고 신뢰는 곧 애정으로 나타나는 것, 그게 힘인 것 같아요.

▶ 회사직원은 몇 분이나 계세요?

지금 26명이에요. 2003년경에는 70명쯤 됐었어요. 그때는 경영을 몰라서 사람 욕심만 많아서 다 모여 있으면 우리가 뭔가 중요한 걸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우리를 가두는 것이고 26명이 기획해서 더 많은 다큐멘터리 감독들에게 기회를 주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제작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회사를 만든 이유라고 생각해요.

메신저 할 때 대화명을 쓰잖아요. ''''나무는 스스로 그늘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대화명을 최근에 쓰는데, 회사나 조직이나 예전에는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다 모여서 으쌰으쌰 해서 세상을 바꾸는 다큐멘터리를 해 보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하고 그늘이 되는 조직을 만들고 싶어요. 그것이 기업의 형태이든 협회의 모습이든 다큐멘터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제 안의 깊은 애정이 있어요.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사람,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 또는 다큐멘터리에 대한 꿈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은 기본적으로 성향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 미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명확한 팩트가 필요해

▶ 다큐멘터리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어요. 그래서 세상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박성미 감독이 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에요?

분배의 문제인데요. 예전에는 다큐멘터리도 한 국가의 변화의 발전과정과 같이 온다고 생각해요. 한 때는 순수 혹은 보이지 않게 약자들, 마이너리티에 대해 조명하는 것이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고발하는 탐사 다큐나 시사 다큐 같은 것들이 발전하는 거죠.

그리고 6,70년대는 경제성장을 하는, 열심히 일해야 하는 선동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다큐멘터리가 있었고 요즘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라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가능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많이 만드는 사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욕하는 사회가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거고, 그럼 그 사람을 왜 미워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개인의 문제인지 아니면 사회의 문제인지 분석해서 볼 수 있는 국민들이었으면 좋겠어요.그들이 시청자였으면 좋겠고요. 다큐멘터리가 하는 일은 미움을 없애주는 일인 거 같아요. 그 간극을 좁혀낼 때 사회가 좋아지는 거라고 보거든요. 내가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욕하지는 않는다고요. 그런 마음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한 팩트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리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대안이 있어야 하고요. 그 두 가지가 사람들에게 설득되어질 때 일종의 협상이라고 생각해요. 사회와 내가 협상하는 거고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에게 왜 서로 미워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고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그런 다큐멘터리, 그런 세상에 기여하는 작품이어야 하는 거죠.

▶ 어느 정도 성공도 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무작정 나라를 욕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풀어줘야 하는 건가요?

그것도 일종의 다큐멘터리가 교육성과 공공성을 많이 가질 수밖에 없는데, 물론 선동성도 갖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이니까 무작정 이 나라를 욕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주변에 있어요. 그런데 그들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공시대라는 MBC 프로그램이 그 사람들에게 성공의 기준을 돈을 많이 버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돈을 어떻게 쓰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거죠. 기본적으로 인간은 악하게 태어나지만 교육을 통해서 마지막에 죽을 때는 선하게 죽는다고 생각해요. 그 교육은 기회가 균등하게 가야하고 많은 정보들이 제대로 가 줘야 한다는 거죠.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드라마보다는 장르적으로 다큐멘터리가 맞다고 봅니다.

▶ 요즘 만들고 있는 작품은 어떤 게 있어요?

일단 크게 보면 매체별로는 방송다큐멘터리도 제작하고 극장용 다큐멘터리도 제작하고 제작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원이나 투자도 합니다. 장비를 대여해준다거나 현금으로 투자를 하기도 하고요. 방송다큐멘터리는 이른바 외주 프로덕션이 되는 거잖아요. 외주 프로덕션으로서 제작해야 하는 것은 프로그램이 한정되어 있어요. 특집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어요. 2004년까지는 8.15 특집, 한글날 특집, 3.1절 특집, 현충일 특집 등등을 많이 했죠.

▶ 방송국마다 다큐멘터리를 많이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것도 많이 바뀌었어요. IMF 전에 대한민국이 다큐멘터리를 굉장히 많이 했던 나라에요. 그런데 안 봐 주니까 시청률이 안 나와요. 그것은 국민들의 인식수준이 돈 버는데 급급하지 머리 아픈 거 보기 싫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다큐멘터리 편성시간이 조금씩 줄어요.그리고 IMF 잘 극복하고 나서 국민소득이 늘고 있어요. 이제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싶은 사회가 되었어요. 그런데 IMF 때 다큐멘터리를 줄여나가면서 다큐멘터리 제작들이 없어졌어요. 공백현상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VJ는 차고 넘치고 여의도에 PD는 차고 넘치는데 다큐멘터리 감독은 찾기가 어려워요.

▶ 그러면 틈새시장으로 박성미 감독은 괜찮으시겠어요.

틈새보다도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구조가 되는 나라는 이 세상에 관심이 많은 거거든요. 그러면 좋은 세상이 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만큼 숫자가 적다는 이야기는 아직 우리가 풀어야할 과제들에 대해서 냉정하고 차분히 바라보는 것들이 줄고 있다고 보는 거죠. IT강국은 좋은데 사람들이 이제는 도서관에서 책을 잘 안 빌려 봐요. 지식검색하면 주르르 나오고 댓글 달려 있으면 그게 지식의 다인 줄 아는 세상이 되어버린 거죠.

예전에 저희가 다큐멘터리 제작할 때는 1편을 만들려면 논문만 해도 수십 편, 국회 도서관 가서 다 복사해서 봐야 하고 이전에 외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가 있는지 다 봤는데 지금은 그렇게 기획하지 않아요. 그렇게 공을 들이지 않는 거예요. 그건 제작비 문제도 있지만 다큐멘터리의 제작문화 풍토가 없는 거예요. 굉장히 심각합니다. 다큐멘터리 작가도 없다는 말인데, 제가 **포털사이트 이름 대면서 그 안에서 지식을 구하지 말라고 해요. 그게 올바른 지식인지 아닌지, 교수가 논문을 쓴 것이든 석박사가 논문학위를 받은 것이든 의심으로 봐야 한다는 거죠. 이게 정말 옳은가? 하고.

다큐멘터리는 크게 3단계인데 첫 번째 리서치 단계에서는 마음을 열고 보는 거예요. 모든 정보를 다 흡수해야 한다고요. 여기에서 과학성과 객관성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 다음이 편집과 촬영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주관이 생기는 거죠. 무엇이 진실인가? 마지막에는 결국 어느 한 쪽에는 손을 들어줘야 하는 거예요. 그 편을 정확하게 들려면 내 걸 보고 사람들이 ''''말도 안 돼'''' 보다는 ''''그러네, 말 되네'''' 라는 말은 최소한 들어야 한다는 거죠. 이건 주관이에요.

그러니까 객관성과 주관성의 형평성을 가지려면 처음 리서치 하는 단계에서 세상에 무엇을 말할 것인지 그걸 말하기 위해서 어떤 소재를 선택할 것인지 하는 부분에 있어서 자기 지식이 명확히 있어야 하는 거죠. 여기에는 가치관과 복잡한 것들이 섞이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책상 위에 담아놓지 않으면 편협한 다큐멘터리가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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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밑바닥에서 몸으로 느낀 일본의 다큐멘터리

▶ 학교 때는 뭘 전공하셨어요?

역사학을 전공했어요. 저는 우리 회사 직원을 뽑을 때 대 놓고 이야기해요. 운동했던 사람, 자기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단 몇 개월이라도 고민했던 사람,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싸워본 사람들은 무조건 가점 준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편견이지만 사학과를 졸업한 사람들도 가점 준다고요.역사 공부한 사람은 거짓말 잘 못해요.

▶ 역사를 전공하셨는데 어떻게 다큐멘터리 감독을 하시게 된 거예요?

사실은 대학원을 가려고 87년부터 91년도까지 학교에 머물러서 학생운동을 했어요. 그걸 하면서 전혀 영어공부를 못 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영어, 아주 괴롭습니다.(웃음)공부를 못 하다 보니까 노동자의 삶을 가던가 아니면 선배들한테 도제로 배웠던 세상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싶다는 꿈을 학생운동 마지막 시절에 갖게 되잖아요. 그런데 노동자가 될 자신이 없었어요.

정치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대변인 하면 참 잘하겠다는 소리를 들어요. 그리고 후배들은 제가 이 일 안 하고 신흥 교주했으면 정말 잘 했을 거라고 해요.(웃음) 하지만 인간의 신뢰감을 줄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계속 하다 보니까 무엇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가를 아는 거라고 생각해요.

대학원 준비를 하다가 당시에 KBS에서 석사 과정의 사람들을 데리고 다큐멘터리 기획팀을 만들었어요. 물론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3년 촉탁직으로 들어갔는데 좋은 선배들이 기획을 했었어요. 몽골리안 루트, 독도 365일, 자연다큐도 기획을 했던 것 같고 장기 기획물을 기획했는데 같은 방에 있었지만 저는 그 팀에는 없었어요. 방송사가 방송 나가는 프로그램만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무형문화재를 기록해야겠다고 해서 전통문화 라이브러리라는 팀을 만들었는데 그 팀에 제가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기획하다 보니까 방송이 마약 같더라고요.

91년도에 ''''자본주의 100년, 한국의 선택''''이라는 6부작이 방송에 나갔는데 완전히 사무실이 전화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아니, 너희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이런 빨갱이 방송을 만들 수 있냐?부터 시작해서 너무 잘 봤다는 말 등. 정말 마비 정도였어요. 제 1편이 ''''미완의 선택''''인데 우리가 자본주의의를 너무 급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미완의 선택에서 새로운 선택으로 가는데, 새로운 선택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어떻게 같이 갈 것인가의 문제잖아요. 굉장히 뜨거운 문제였거든요. 그 프로그램 때문에 KBS가 들썩거렸어요. 임원단 시사까지 하고 이건 넣는다, 못 넣는다 말도 많고 그때만 해도 제주 4.3항쟁 가지고도 불방이 될 시기였으니까요.

그런데 역사의 한 사람으로서 대중의 힘이 느껴지니까 전율이 느껴져요. 방송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대학원 가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어요. 방송을 해서 세상을 한 번 바꿔야겠다 했죠. 찬반양론을 떠나서 인간의 행동을 유발시켰다는 점, 전화를 하게 하고 항의하게 하고 분노하게 했다는 게 대학 강단에서 몇 백 명을 가르치는 것과 비교할 게 아니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방송에 남으려고 했는데 공부를 잘 못했기 때문에 PD가 될 수 없다면 작가밖에 선택할 수 없었어요. 작가로 시작을 했죠. 그리고 나니까 금방 알겠더라고요. PD가 아니면 제작을 할 수 없다는 것을요. 3년쯤 지나고 나니까 방송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보여요. 15년 전이라 어릴 때 이야기지만 그 허무감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할 거면 제대로 가든지 아니면 지금 접어야한다는 순간의 선택에서, 다큐멘터리 왕국이라는 일본의 NHK에 가서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보자. 한국처럼 제약과 조건이 있는지 많은 제재를 받는지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지 눈으로 보려고 무조건 갔어요.

▶ 돈은 있었어요?

없었어요. 결혼 전이니까, 엄마한테 KBS가 일본에 연수를 보내준다고, 이런 기회가 없다고 다녀오겠다고 하고 갔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보내주시겠어요? 좋은 기회니까 다녀오라고 하셨는데 엄마한테 돈을 달라고는 못하고 마이너스 대출통장에 대출을 받았죠. 500만원을 받아서 일본에 들어간 거예요. 들어갔는데 무서워서 돈을 못 쓰겠어요. 물가가 너무 비싸니까. 그래서 방을 못 구해서 일주일을 길거리에서 잤어요. 제가 배짱 빼면 시체에요.(웃음)

▶ 말은 배우고 가신 거예요?

히라가나, 가타카나 분리되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원래 3년 있을 생각으로 이민가방 2개를 가지고 갔는데 김치가 푹푹 썩고 있잖아요. 고추장이 넘쳐요.(웃음) 그래서 신주쿠 공원 한쪽에 밀어 넣고 어학원에 신청을 하고 갔었기 때문에 밤에 연등실이라고 해서 24시간 불을 켜놓는 곳이 있어요. 거기다가 이민가방을 숨겨놓았는데 냄새가 나서 도저히 미안해서 안 되겠어요. 그래서 공원에 갖다 놓고 먹고 싶은 사람은 먹고 없어지면 할 수 없고 옷이랑 챙겨서 방을 구하러 다녔어요. 날씨가 따뜻해서 한참 노숙했었어요.

우리가 보는 허상이 아닌 일본의 길거리 문화를 몸으로 느끼면서 굉장히 많은 반성을 했어요. 저 밑바닥에서 하수도 교통안내하고 러브호텔의 냄새나는 시트 갈고 설거지하고, 신문배달하고 말이 안 되니까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밖에 없잖아요. 어학원 수업 2시까지 마치고 8시간씩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니까 일을 하러 온 건지 공부를 하러 온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어떻게 방송을 하는지 밤새도록 TV를 보는데 포르노도 보고 다 봤어요. 한 1년쯤 보니까 방송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방송으로 세상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더라고요. 일본의 방송이 국민들을 얼마나 피폐화시키고 일본인 개개인에게 얼마나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지를 너무 많이 봤어요. 무언가 사람들이 나사가 빠져있는 듯하고 뭔가 신흥적인 것에 광분하고.사람들에게 올바른 가치기준을 제공하고 뭔가를 이야기를 해 주는 일본의 다큐멘터리를 보러 간 건데 그건 NHK밖에 없어요. 그런데 NHK는 시청률이 안 나와요. 안 본다는 이야기에요.

▶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남편이 독일에 유학을 갔는데 독일 가서 제가 깜짝 놀란 게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거기에 쪽지가 붙어있어요. ''''비너스 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으니까 비스킷을 준비했으니 보러 오세요.'''' 비스킷을 먹으면서 다큐멘터리를 같이 보는 거예요. 일본은 벗기고 싸우고 물론 그런 프로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일본의 NHK 다큐멘터리는 재미없어서 잘 안 보거든요. 문법은 정확한데 비전이 없어요. 국민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뭘 하고 살아야하는지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역할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방송은 태생적 한계인가 보다. 광고수익과 광고주의 눈치와 이런 매카니즘에서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그러니까 포기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연극배우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도쿄 신주쿠 양산박이라는 곳을 찾아갔어요. 저보고 늦었대요. 할 수 있다고 우겼더니 판토마임을 먼저 가르쳐줘요.오사카에서 4개월을 돈 내고 판토마임을 배웠어요. 그런데 아르바이트 때문에 같이 다니지를 못하는 거예요. 일본은 지방공연에서 성공해야 중앙으로 들어오는, 굉장히 잘 된 문화시스템을 갖고 있어요. 지방공연을 못 다니니까 내가 검증받을 수 없잖아요. 돈 벌어야 하니까 도쿄를 떠날 수가 없죠. 그래서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결심한 결정적인 건 하나였어요. 방송을 안 한다면 다큐멘터리는 한다. 한국에 들어와서 98,99년에 회사 없이 인권영화제에 출품할 2편을 만들었어요. 하나는 ''''입국금지''''이고 또 하나는 ''''꽃 파는 할머니''''에요.

◇ 조총련과 양공주, 대한민국의 초상

▶ 입국금지와 꽃 파는 할머니는 어떤 작품인가요?

제가 일본에 있으면서 마지막으로 헤어지는데 재일동포들과 굉장히 친했어요. 제가 살던 니뽀리라는 동네가 제일동포들이 많이 살아요. 술을 마시고 있는데 나이 드신 재일동포 한 분이 오셔서 서울에서 왔냐고, 자기가 안주 하나 사줄 테니 먹으라고 해요. 얼마나 감사해요. 감사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죠. 그러고 나서 밤에 맨션으로 돌아왔는데 창문 하나 없는 맨션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전화가 왔어요. 재일동포 함부로 만나시면 안 된다고, 그 사람이 조총련 사람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대체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누구를 만나든 얼굴에 조총련이라고 써 있지 않은데 조총련이냐고 물어보면서 살아야 하냐? 그 사람이 나한테 해 끼친 거 없다면서 싸웠어요. 난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열 받아서 일부러 사람들 만날 때마다 조총련 어떻게 만나야 하느냐고 물어봤어요. 재일동포들 거의 다 조총련이에요. 조총련이 조선인 총연합회였잖아요. 김종필과 박정희 시대에 한국국적을 취득하면 주는 영주권 조약이었어요. 일본은 한국국적을 취득하는 사람에게만 영주권을 주면 되니까 손해볼 게 없죠. 그래서 조총련이 분열되고 민단이 생겼죠. 아니면 일본국적으로 귀화하라는 거고요.

그 종용과정에서 조총련이 당시에 70만 정도가 남아있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과 무지무지 친해진 거예요. 사람들이 굉장히 순박해요. 수학여행도 가고 하니까 평양은 몇 번 왔다 갔다 해도 서울에는 한 번도 와 본적이 없어요. 개인적으로 이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술 마시고 놀다가 내가 서울 가면 우리 집에 한 번 초대할게, 나한테 이렇게 많이 베풀어줘서 고마워 했더니, 저와 한 살 차이 나는 청년이 ''''아직도 모르냐, 난 서울 한 번 가보는 게 꿈이야. 난 못 간다.''''는 거예요.왜 그런가 물었더니 무국적이라 패스포트가 없대요. 패스포트를 봤더니 국적란에 ''''경상남도 OO'''' 이렇게 쓰여 있어요. 이게 뭐냐고 했더니 그때부터 역사를 이야기해줘요. 그리고 자기가 왜 한국국적이나 일본국적으로 취득안하고 무국적으로 사는지 이야기해주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공부를 하고 보니까 이 사람들한테 약속을 지키려면 서울에 왔을 때 알려야겠다 싶어서 국회의원용 버전으로 왜 이들한테는 입국금지를 시키는가? 그때는 재일동포 특별법이 없을 때니까 법 제정까지 가야한다는 용도로 하나를 만들고 그 다음에는 이건 일본정부가 잘못하는 거거든요. 일본정부에게는 ''''패스포트''''라는 제목으로 하나를 만들려고 했어요. 그 나라의 영주권을 갖고 있으면 당연히 패스포트를 발급해줘야 하는 거예요. 무국적 난민에 대한 예우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본정부를 타격하는 것을 하나 만들고, 그래서 입국금지를 만든 거예요. 왜, 누가 이들의 입국을 막는가에 대한 다큐멘터리였죠.

그리고 꽃 파는 할머니는 조금 다른 케이스인데 제가 군산의 아메리칸 타운에 갔는데 70먹은 노인들이 사는데 이분들이 11살, 13살에 시작한 양공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 갈 데 없으니까 있는 곳이 아메리칸 타운이었어요. 그때 6,7분이 살아계셨는데 밤에 할머니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미군들에게 장미꽃을 팔러 다녀요. 이제 몸을 팔 수 없으니까 꽃 2천원 팔아서 연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분들은 주민등록이 없어요. 가족들이 버려서 등본에 등록이 안 되어 있어요. 가족들은 양공주가 우리 집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싫어서 실종도 아닌 사망신고가 되어 있는 거예요.

이분들을 인터뷰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영어는 곧잘 하지만 쓸 줄은 모르고 일자무식이라서 만 원짜리를 똘똘 말아서 연탄에 채워넣어요. 도둑맞을까봐. 집에 갈 때 다 빼고 잘 펴서 봉투에 넣어서 집에다 보태주고 얼굴도 못 보고 그냥 오는 거예요. 남동생 학비, 부모 먹을 것을 위해서 그렇게 해도 누가 알아주냐고요. 너는 어차피 몸 파는 화냥년이라는 거죠. 그 동생에 대한 인터뷰를 많이 하셨던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어요. 병원에 갔는데 가족들한테 전화를 했어요. 돌아가셨는데 평생 안 보셨는데 한 번은 보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에요. 돈은 다 받아썼어도 더러운 돈인 거죠. 가족들에게는 돈에 색깔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걸 개인의 문제로 본 게 아니라 꽃 파는 할머니의 결정적인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몸 파는 매춘이 불법이에요. 그런데도 이 분들이 애국자라고 박정희 대통령과 사진도 찍었어요. 액자로 만들어서 옷장 안에 걸어놓았어요. 부추긴 것도 있다는 거죠. 그것에 대해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시대가 잘못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 일제시대 때 정신대로 끌려 가셨던 할머니들처럼 대우를 해 달라는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서로 생각이 다른 쟁점이라서 이런 것이다 라고는 말씀을 드릴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분들이 종군위안부의 역할을 했느냐, 이분들이 미군정 시기 45년~48년 사이에 그런 일을 했다면 논리가 성립이 되겠죠. 그런데 보이지 않는 간접적인 매춘행위를 해서 개인이 돈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복잡한 문제들은 있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건 어찌되었던 우리 사회에 같은 하늘 아래에 살고 있다는 것이고 그들이 무엇을 아파하는지, 이 사회에 대해서 애정을 갖고 있는지, 혹시 서럽지는 않은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지 않는가, 그게 제 다큐멘터리의 주제였어요.

◇ 명성황후는 최고의 전략가, 대원군은 문제도 아니었어

▶ 재일교포 음악인 김홍재씨의 「나는 운명을 지휘한다」라는 책을 쓰셨고, KBS 수요기획으로 「대한제국 애국가」도 만드셨는데 박성미 감독의 대표작이 「다시 살아나는 국모, 명성황후」라고 생각되는데 만들 때 이야기를 해주세요.

그때 저희 회사 별명이 ''''사진 한 장짜리 다큐멘터리''''였어요. 사진 한 장을 가지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거죠. 당시에 명성황후 사진이 진짜인가 아닌가 라는 시비에 걸려있었어요. 그걸 화두로 처음 방송에서 제가 이야기를 했어요. 다큐멘터리가 이 사진의 진위여부가 왜 문제가 되는지부터 시작을 해요. 저희가 만든 작품 중에서 작년에 극장개봉까지 했는데도 아직은 대표작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창립작인 것은 맞아요.

비슷한 맥락인데 명성황후도 일본의 자객이 죽였다고 역사교과서에는 분명히 쓰여 있는데 일본은 자신들이 죽였다고 인정하지 않아요. 민비는 알아도 명성황후는 몰라요.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 민비를 살해했다는 것은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왕비를 죽였다는 것인데 이건 국제법으로도 엄청난 거예요. 일본이 이걸 인정하면 손해배상도 엄청나게 받을 수 있고 굉장히 큰 외교적인 문제에요. 저는 이해가 안 갔던 게 와세다 대학 사학과에 다니는 일본 아이들이랑 같이 이야기를 하는데 명성황후를 몰라요. 너희가 와서 민비를 죽였어, 몰라? 자기들이 왜 죽였냐고 해요. 멀쩡하게 남의 나라 왕비를 왜 죽이냐고. 그래서 생각했죠. 대한민국 바보 아니야? 일본애들은 인정도 안 하는데 맨날 우리만 일본 자객이 와서 죽였다고 하는 거예요.일본 자객 누구? 한 나라의 여왕을 죽였는데 살인자가 누구냐고요. 재판기록이 있더라고요. 일본의 외교문서에 재판기록도 있고 이름도 적혀 있어요. 그 사람들 가지고 일본 국회도서관에 가서 이름을 찾으면 저서를 남긴 사람들이라서 책이 다 나와요. 자기들이 쓴 자서전이 있어요. 그걸 읽으면 자기들이 명성황후의 어디를 어떻게 찔러서 죽였는지도 나와 있어요.

▶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당시의 일본 자객들은 런던대학 나온 사람, 하버드 대학 나온 사람, 당시 23,4세의 최고의 엘리트들이었어요. 일본은 명성황후를 죽이지 않으면 조선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명성황후가 정치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던 거죠. 청나라를 끌어들일 줄 알고 일본을 이용할 줄 알고, 이런 조율을 하는데 일본에 대해서 굉장히 반일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어요. 직감적으로 일본은 우리를 침략할 것이라는, 그런 근성이 있다고 본 거예요.

일본이 봤을 때 대원군은 문제도 아니었어요. 대원군을 죽이지 않고 명성황후를 죽였어요.우리도 미군이 범죄를 저지르면 본국으로 가잖아요. 그렇듯이 범인들이 히로시마에 도착했다는 자료가 남아있어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영웅으로 추앙받고. 이들은 국가에 대해서 충성을 한 거예요. 사람도 죽일 수 있어요. 이들이 일본의 근, 현대를 좌지우지한 인물들이에요. 장, 차관을 다 지냈어요. 그때 진행을 배유정 선배가 했는데 사실이냐고 묻는데 사실이라고 했어요. 제가 사진도 다 한명씩 공개했어요. 이 사람은 누구이고, 명성황후를 어떻게 죽였고 자서전은 어떻게 남아있고 등등. KBS에서는 이게 외교적으로 얼마나 큰 문제에요. 시사를 얼마나 치열하게 했겠어요. 잘못 나가면 정말 대형사고거든요. 그런데 방송 나갔어요. 일본에 아무 문제없었어요.

제가 보여줬더니 일본 사람들도 보고 놀랐죠. 하지만 지식인층 사이에 공황상태가 온다고 방송은 안됐어요. 연출은 공동연출로 대학원 후배들이 연출하고 제가 총 프로듀서를 했는데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애들이 전율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때는 명성황후였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민비로 바뀌어요. 모든 역사교과서나 신문이나 보도에. 그리고 일본에 가면 민화를 다 공개했는데 헌 책방에 가서 다 찾아냈어요. 민비라고 불리는 민화들을. 뿔이 나 있고 여우꼬리가 감겨있고. 뿌리는 거예요. 왜? 민비는 죽여야만 하는 여자라는 것을 꾸준히 설득작업 한 다음에 최고의 엘리트들을 넣어서 그들을 영웅화시키고 그들로 인해서 일본의 근, 현대가 일어난 거예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1시간짜리로 만들다 보니까 조금이라도 외교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것들, 100% 확실하지 않은 것들은 다 뺐어요. 그래서 제가 요즘 ''''살인자를 찾아라''''로 해서 5편쯤 다시 만들고 싶다고 얘기하고 다녀요. 언더우드 여사가 남긴 글에 보면 명성황후는 최고의 전략가이자 최고의 정치가라고 나와 있어요. 언더우드뿐만 아니라 당시 명성황후를 만난 외국인 기자들이 쓴 걸 보면 훌륭한 정치적인 감각을 지닌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아요.

◇ 어른이 물어보는데 어떻게 앉아서 답하랍네까?

▶ 그렇게 많은 작품을 만드시고 북한까지 가셨는데 만드신 작품이 「평양에서의 8일간」, 이 작품은 어떻게 가능하셨어요?

그것도 참 우연인데요. 어찌됐든 다큐멘터리는 당대 우리가 풀어야할 시대적, 역사적 과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분명하니까요. 지금이 남북시대라고 생각하고 통일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다큐멘터리스트가 분명히 기여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그러다가 우연히 제안을 받았어요. 우리겨레 하나 되기 운동본부라고 그쪽에서 제안을 받았는데, 이런 걸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해서 가게 됐어요. 가서 일주일 동안 저한테 시간이 주어졌어요. 찍으라고 허락도 났고요. 다큐멘터리 시작은 제 방의 이코노믹지, 재무제표 숫자, 전자계산기에서 시작을 해요. 북은 나에게 7일간의 여행을 허가했다. 그리고 나서 평양에 들어가는 것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해요. 자본주의에서 살아온 내가 사회주의를 일주일 동안 경험한 느낌이에요.

▶ 그쪽에서는 자유롭게 찍게 해 줬어요?

자유롭다는 게 어디까지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사회주의 공화국이 저한테 허가해 줄 수 있는 자유는 다 주었다고 생각해요. 자본주의에서의 자유의 개념과 사회주의에서의 자유의 개념이 다르니까요. 거기 가니까 못 찍게 하더라, 이것만 찍으라고 하더라 이런 건 관점의 문제라고 봐요. 예를 들면 애들이 너무 부자연스러우니까, 인터뷰하면 자연스럽게 앉아서 대답하라고 선생님에게 도와달라고 했어요. 아이들 좀 자연스럽게 하면 안 되느냐고요. 그랬더니 ''''박선생, 아이들이 그게 쉽게 되갔습니까?'''' 왜 안 되느냐고, 남쪽에서 보면 이게 역효과다, 사람들이 보면 시킨 걸로 본다, 자연스럽게 하자고 했죠.

''''선생이 마이크를 갖다 대면 일어나지 마시고 자리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대답하시라요.'''' 그래서 저와 카메라가 낮춰서 ''''얘'''' 그랬더니 탁 일어나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아~안 되네.'''' 내색을 해 버린 거예요. 어린애가 상처를 받았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해서 ''''선생님, 어른이 와서 물어보는데 어떻게 앉아서 답하랍니까?'''' 제가 그때 가슴에 팍 꽂힌 거예요.이건 나의 부당한 요구였다. 이 아이들도 친구들이 와서 물어보면 안 일어나요. 어른이 와서 물어보면 일어나라고 배웠는데 자꾸 앉으라고 하니까 안 된다는 거죠. 나한테도 어쩔 수 없이 반북의식이 있었구나. 저는 이 아이들이 훈련받아서 그렇다고 생각을 했어요.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나라의 문화와 아이덴티티가 있는 거라는 생각을 처음 가졌어요.

▶ 서로 이야기를 잘 하려면 문화를 이해해야 되잖아요.

저도 북에 가니까 다큐멘터리의 기본 ABC를 까먹게 되더라고요. 편견이 생겨요. 그게 참 무서운 거예요. 아프리카 어디의 소수민족을 취재해도 그런 마음을 안 갖거든요. 그런데 북에 가니까 생기더라고요. 내가 아직 근본적으로 다큐멘터리를 할 때가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목도 겸손하게 잡은 거예요. 평양에서 8일 동안 내가 보고 느낀, 박성미라는 한계를 가진 사람이 본 것에 불과하다는 나래이션이 나와요. ''I can go''라는 영문명으로 EBS에 나갔는데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에 출품한 작품이에요.

◇ 음식에 정치, 경제, 사회가 다 들어가 있어

▶ 두 번째가 「조선요리백선」인가요?

작년에 KBS 스페셜로 나갔는데 북녘음식기행으로 나갔죠. 평양에서의 8일간이 끝나고 나서 중고등학생용 교육 영상을 만들었는데 그게 신뢰가 쌓였고 다른 것도 해 보자고 해서 제가 가장 비정치적인 것을 고민하다가 음식을 찾아낸 거죠.음식을 기획했는데 다들 굶어죽는 나라에 무슨 음식이 있느냐고 그래요. 음식은 있을 수 있겠는데 요리가 있겠느냐는 거죠.

그렇게 북녘음식기행으로 한 건데 나중에 알았어요. 음식이 얼마나 정치적인 것인지.음식에 정치, 경제, 사회가 다 들어가 있어요. 장기체류는 안 되니까 왔다 갔다 하면서 1년 반을 찍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그들은 음식에 조미료를 안 쓰잖아요. 거기에 철학이 있는 거예요. 원래는 맛내기라고 다시다 같은 조미료가 있었어요. 그런데 인민들의 건강을 해치니까 먹지 말라고 해서 전 공화국이 다 안 먹어요. 없어진 거죠. 이건 굉장히 정치적인 거예요. 인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발언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누구 집에 놀러 가면 집 청소도 해놓고 맛있는 요리도 내놓잖아요. 어디나 그렇잖아요. 더구나 카메라가 온다는데. 그런데도 찍어놓은 걸 보면 엄청 신경 썼구만, 이런 편견들이 있어요.북에서는 아직도 어른이 독상을 받아요. 독상을 받는 이유는, 거기는 수령님이라고 할 때 아버지라는 친족적인, 가족적인 관계를 강조하잖아요. 그러니까 부모에 대한 효를 무지하게 강조하는 거예요. ''''효, 충, 의''''가 같이 가는 거니까. 음식문화에 그런 게 다 배어있어요.또 정책들이 나와요. 정부의 정책들이 한 국가가 어떻게 가져가는지 음식문화에 그대로 배어난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어요. 생각해 보니까 소금만 갖고도 세계사를 말할 수 있고 후추를 갖고도 세계사를 말할 수 있고 커피를 갖고도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 음식만 10분짜리로 100편을 기획한 게 조선요리백선이에요. 지금 촬영만 끝난 상태에요.

▶ 많은 작품을 찍다 보면 잊지 못할 사람도 생기잖아요. 북한에 보고 싶은 사람이 많아지면 통일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같이 일했던 사람 중에 누가 제일 보고 싶어요?

북에도 프로덕션이 있는데 이름들이 다 예쁘잖아요. 프로덕션 이름이 ''''내나라 비데오''''에요. 거기에 임경수라는 저와 동갑내기 카메라맨이 있어요. 거기는 기본적으로 영화학교가 6년제에요. 4년 동안 이론과 실습을 하고 2년은 인턴을 한 다음에 카메라 감독이 되는 건데, 카메라 감독이 된 다음에 주어진 것이 무급이에요. 무급에서 5급까지 가는 건데 이 사람이 4급 정도 되는 베테랑 카메라 감독인데 남자인데도 너무 예뻐요.

일요일에 남편이랑 같이 밥을 먹는데 임경수씨 얼굴이 지나가요. 이 사람 생각하면 아파요.아프다는 건 작업을 같이 하고 있는데도 같이 할 수 없다는 의미에요. 이 사람도 다큐멘터리가 하고 싶은 거고 저도 하고 싶은 거예요. 이 사람은 촬영감독이고 저는 연출이잖아요. 같이 작품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잖아요. 지금도 평양에서 헤어질 때 울어요. 나만 운대요. 평양을 가면 1회용 방문증을 줘요. 처음에는 그걸 모았어요. 나중에 너무 많아져서 안 모았는데 늘 헤어질 때는 마음이 아파요. 왜 우리는 작업도 같이 못 하나...북 사람들은 통일에 대한 게 강하니까 ''''박선생, 급하게 생각하지 마시라요. 언젠가는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공항가면서 제발 울지 좀 마시라요.'''' 그러면 예, 하고 대답해요.(웃음)

◇ 같이 나누고 같이 만드는 세상, 다큐멘터리에 담아보고파

▶ 남편은 뭘 하시는 분이세요?

남편은 독일에 유학 가서 정치경제를 공부하고 왔는데 쓸모없는 인재가 되어버렸어요.(웃음) 지금은 미국인 회사에 들어가 있어요.

▶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5살 난 아들이 있어요. 아들이 하기 싫은 건 절대 안 시키는데 콜라도 한 피트씩 다 먹어도 그냥 둬요.

▶ 아들이 자라서 뭘 했으면 좋겠어요?

연극했으면 좋겠어요.(웃음) 아들이 끼가 있어요.저는 아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욕심을 안 가졌으면 좋겠어요. 아들이 성장한 대한민국의 모습은 같이 나누고 같이 만드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자기 인생을 채워나가는 세상이요.

▶ 앞으로 만들고 싶은 작품이나 계획이 있다면 어떤 게 있으세요?

현재 개봉용으로 준비하고 있는 게 하나는 남북의 청소년축구단이 중국 운남성에서 합숙훈련을 해요. 킹스컵 대회에 단일팀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어제 제작이사가 가서 아이들과 인터뷰가 가능한지 기획개발차 헌팅을 다녀왔는데 그걸 개봉해보고 싶어요.1년에 1편씩만 개봉하려고요. 그리고 또 하나 개발하는 건 미스코리아에 대한 거예요. 전국미녀대회라는 제목으로 기획중인데 미스코리아라는 게 워낙 루머도 많고 접근이 안 되니까 오해도 많잖아요. 기본적인 제 생각은 저 같은 경우는 외모는 안 되지만 머리는 좀 되니까 이쪽으로 온 거고 나보다 더 머리 좋은 사람들은 변호사하고 있고 더 머리 좋은 사람은 의사하는 거고.자신에게 주어진 처지와 캡파에 의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에 따라 가는 거지 저도 예쁘면 미스코리아 해 봤을 것 같아요. 본능에 해당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간이 인간을 평가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제작을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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