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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오전, 세계가 벌컥 뒤집혔다. 미국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와 의사당을 비롯한 주요 핵심 건물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 등이 항공기와 폭탄을 동원한 테러공격을 동시 다발적으로 받은 사건…이른바 9.11이 터진 것이다.
9.11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고 쇼크였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중동, 생소했던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 요구가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채 요청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서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
이희수 교수와 이슬람과의 인연은 그가 1975년 한국외국어대 터키어과에 입학하면서 시작됐다. 1983년 터키 국립 이스탄불대로 유학을 떠나 5년 만에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어 이스탄불의 마르마라 대학 교수로 2년간 가르쳤다. [BestNocut_R]
이 기간 동안 몇 차례에 걸쳐 통산 약 3년간 이슬람권 여러 지역에서 체류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며 친구들을 사귀었다.
지난 1991년 귀국해 1993년부터 한양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금까지 터키에만 100여 번을 다녀온 이슬람 전문가 이희수 교수를 7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다.
◈ 27년째 이슬람 사람들과 함께 하니 얼굴도 닮아 ▶ 만나 보고 깜짝 놀랐다. 생긴 모습이 이슬람 쪽 사람들과 비슷하다.(손숙)
원래 인류학자들은 책상 앞에서 이론 공부하는 학문이라기보다는 현장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체험적 삶의 경험을 통해서 문화현상을 읽어내기 때문에 내가 79년부터 현장연구를 했으니까 만 27년째 거의 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 셈이니까 얼굴모습도 많이 닮은 것 같다.(이희수)▶ 혹시 종교가 있나?
어렸을 때부터 강한 유교 집안에서 자라왔고 특히 우리 집안이 몰락한 남인집안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주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성호 이익 선생님 집안이니까 집안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저는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유교와 가톨릭이라는 두 종교의 영향 아래서 자랐고 특히, 중학교 3년 내내 절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금강경''과 ''천수경'', 웬만큼은 다 외운다.
그래서 종교에 대한 특별한 편견은 없는 것 같고 유학할 때는 이슬람 이름도 종교지도자가 제게 지어줬다. ''자밀(Jamil)''이라고 참 아름답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름으로 줬는데 현지에 가면 한국에서 온 자밀(Dr Jamil Lee)이라고 하면 꽤 유명하다.
▶ 가족도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나?
아들, 딸들도 그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현지 이름을 하나씩 다 가지고 있다. 아들 이름은 행운이라는 뜻의 ''우르''이고 딸은 빛이라는 뜻의 ''누르''라고 한다.
한국 이름은 어렵기 때문에 친해지기가 매우 어렵다. 집사람은 천주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지만 종교적 편견은 별로 가지고 있지 않고 이름은 소피아(sophia)에서 나온 이름인 ''사피에''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자꾸 종교가 뭐냐고 물어보면 저는 인류학자로서 문화적으로 이슬람에 개종했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웃음)
▶ 이제 방학이 시작되었으니 또 떠나겠다?
인류학이라는 것이 늘 현장에 살아야 하니까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여름, 겨울 방학에 꼭 현장에 나가 있다. 지금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 가족이 함께 가나?
가족이 함께 가는 일은 거의 없다. 제가 다니는 지역이 사막이나 오지나 주로 분쟁지역, 이렇게 열악한 지역이 많기 때문에 아무래도 가족과 함께 다니기는 어렵다.
▶ 계절적으로 요즘은 날씨가 어떤가?
지금 중동은 45℃, 50℃ 올라가는 뜨거운 열사의 지역이다.
◈ 이슬람의 밤 문화, 달의 문화, 마이너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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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여름은 어디로 가실 예정인가?
지금 한양대학에서 이란 지역의 카스피해 쪽에 고고학 발굴을 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해외 고고학 발굴이다. 발굴팀은 먼저 들어가서 일 년 내내 발굴을 하고 있고 저는 일단 이스탄불로 가서 베이스캠프를 치고 합류할 예정이다.
▶ 그 더운 여름을 어떻게 견디는지 궁금하다.
놀랍게도 날씨가 건조하고 습도가 없기 때문에 그늘에만 들어가면 아주 서늘하고 시원하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낮 동안에는 낮잠을 자거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일을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에스타(Siesta), 낮잠 자는 문화가 원래 아랍문화에서 생겨서 이 사람들이 지중해를 지배하면서 유럽에 그 문화를 퍼트린 것이다.
그래서 아주 뜨거운 여름에는 낮잠 자면서 일을 하지 않고 밤에 일을 한다. 지금도 아랍사람들은 일몰이 하루의 시작이다. 그리고 다음날 해가 뜸으로서 하루가 끝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이나 축제나 오아시스를 찾아 떠나는 카라반(caravan,낙타 떼를 몰고 가는 대상(隊商)), 다 밤에 이동한다. 밤에 이동해 가면 항상 사막에 지형, 지물이 없으니까 별과 달을 보고 방향을 잡아간다. 그래서 천문학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 환경에 따라서 사람들이 그렇게 적응해 가는것 같다. 그 사람들은 밤 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겠다?
철저한 밤 문화, 달의 문화, 마이너스 문화이다.
▶ 딸 이강온 양과 ''80일간의 세계 문화 기행''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최근에 냈다. 딸은 대학교 4학년이니까 우리나이로 24살인데 터키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고 초등학교 때 한국으로 왔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다. 지금도 터키를 간다고 하면 참 좋아한다. 아들은 이번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너무 어려서 추억은 별로 없고 오히려 김치를 좋아한다. (웃음)
▶ 터키어도 잘하겠다?
처음엔 모국어처럼 사용하더니 지금은 잘 못하고 음식은 아직 남아있어서 양고기와 올리브를 참 좋아한다.처음에 귀국해서는 서울 시내에 양고기를 파는 곳이 없었서 이태원의 한 정육점을 섭외해서 우리 딸을 위해 양고기 실어 나르느라 꽤 애를 먹었다. 지금도 워낙 좋아해서 여행을 가면 치즈와 올리브를 사오는 것이 내 일이다. (웃음)
▶ 두 분이서만 다닌건가?
둘만 다닌 여행기라기보다는 아빠가 다닌 것과 딸이 다닌 것을 모아서 청소년들에게 편견 없이 세상을 보는 눈을 재미있게 꾸며주자고 해서, 아무래도 제가 보는 것보다는 딸아이의 시선이 청소년들의 시선과 가까우니까 여행기를 모아 딸의 감성과 필치로 썼고 제가 문화적인 맥락만 조금 짚어준 공동작품이다. 함께 여행한 것은 네다섯 차례밖에 없다.
◈ 이스탄불은 동서양과 종교를 아우르는 5천년 역사의 산물 ▶ 해외여행을 자주 하는 이희수 교수에게 딱 한 군데를 보고 죽으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이스탄불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류문명을 흔히 5천년 역사라고 한다. 이 5천년 역사가 한 도시에 컴퓨터처럼 딱 집적되어 있는 도시가 이스탄불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을 했고, 그 이후에 히타이트, 아시리아 문명이 뿌리를 내렸고 또, 그리스 로마의 중요한 유적지들이 터키에 있다.
그리고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했지만 성모 마리아가 숨지고 초대 7대 교회, 칼케돈(Chalcedon), 에페소(Efes)같은 중요한 기독교 성지들이 다 터키에 있고, 그 뒤로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천 년간 지배를 했다.
또, 11세기 이후에는 셀죽 터키, 오스만 터키가 들어가면서 이슬람 문화의 진수도 거기에 중첩되어 있고 최근에는 EOE(European Options Exchange) 회원국이 되겠다고 협상을 하고 있는 유럽 최첨단의 도시모습도 가지고 있다.
이 지구상에 동양과 서양이 걸쳐있고, 기독교와 이슬람이 만나고, 유럽과 아시아가 공존하는, 한 도시에 5천년 역사가 반경 1㎞ 이내에 집적된 도시가 어디에 있겠나? 돈도 없고 시간도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 이스탄불만 보면 80%는 본 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많이 권고를 한다.
▶ 꼭 한번 가보고 싶다.
금년이 한·터키 수교 50주년이 되는 해라 터키 국민이 2007년을 ''한국 우정의 해''로 선포를 했다. 금년에 방문하면 특히 대접을 더 잘 받을 것이다.
▶ 터키 국민들이 한국을 유난히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내 생각에는 지구상에서 한국 민족을 제일 좋아하는 민족이 아닐까 싶다. 가까이는 6·25 때 미국 다음으로 많은 1만5천명 되는 군대를 보내서 3천명 이상이 죽고 다쳤다. 목숨을 바쳐서 지켜준 나라가 이제는 터키보다 훨씬 더 잘 사는 것에 대한 뿌듯한 자긍심이 있는 것 같고, 두 번째로 터키는 고구려시대 때 돌궐로 우리와 이웃해서 함께 살았다. 흉노, 돌궐이라는 것이 터키의 조상들이다.
그래서 터키의 중학교 사회교과서에는 한국과 터키는 같은 알타이 민족으로 형제로 같이 살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터키에서 중학교만 나온 사람은 한국이 당연히 역사를 공유한 형제의 나라라는 것이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지리적으로는 1만㎞가 떨어져 있지만 심정적으로나마 한국을 제일 좋아하고 사랑하는 그런 민족이다.
▶ 지난번 2002년 월드컵 4강전 때 터키에 져서도 안 분했다. (웃음)
3,4위 전 때 우리 한국 스포터즈들이 애국가가 나올 때 터키 국기를 더 많이 흔들어 줬다. 그게 터키 7천만 국민들을 다 울려버렸다고 한다. 월드컵 직후에 한국 배낭여행객들이 6천 명이 다녀왔는데 거의 무료로 다녔다는 얘기가 있다. (웃음)
▶ ''위스크 다르(Uskdar)''가 터키 민요인가? 어렸을 때 그냥 막 따라 부르던 기억이 난다.
Uskudar''a gider iken aldi da bir yagmur.....(위스크 다르 머나먼 길 찾아왔더니....) 위스크 다르는 이스탄불의 아시아 쪽 항구 이름이다. 우리의 ''아리랑'' 같은 노래이다. 신라 경주에서 출발했던 실크로드, 아시아의 끝이 바로 위스크 다르(Uskdar)이다.
거기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서 유럽으로 가는데 거기서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동방에서 왔던 손님들과 로맨스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 이스탄불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소개를 좀 더 해달라.
이스탄불은 세계적인 미항이다. 세계 3대 미항을 나폴리(Napoli), 시드니 (Sydney), 리오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라고 하지만 나폴리를 가보니 많이 오염이 됐고, (웃음) 이스탄불은 동양과 서양이 같이 공존하는, 한쪽은 유럽이고 한쪽은 아시아… 그 두 대륙을 1㎞의 다리 하나가 이어주고, 그 사이를 해협이 흐른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고기를 바다 낚시해서 저녁식탁에 올릴 수 있는 도시 한복판에 있는 아주 깨끗한 바다이다. 또, 유적과 경관과 세계 3대 음식 중의 하나인 풍성한 음식도 매력이다.
◈ 9·11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주로 어떤 음식이 있나?
주로 양고기를 가지고 하는 케밥(kebap)이 유명하다. 양고기 요리를 ''케밥''이라고 하는데 케밥의 종류가 300가지가 넘는다. 동양과 서양에 걸쳐 있으니까 음식재료들이 다양하지 않겠는가? 또, 동양적인 분위기,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왔으니까 우리 입맛에도 상당히 맞고, 동양 사람들도 좋아하고, 서양 사람들도 좋아하고, 음식 종류가 풍성하고 다양하니까 아주 즐길만 하다.
▶ 이야기를 듣고 올여름 여행지 바꾸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다. (웃음) 9·11사건 이후에 많이 바빴겠다?
정신없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였다. 우리나라에 아직 이슬람문화를 전공하는 전공자들이 몇 명 없기 때문에 9·11이라고 하는 세계사적 대사건 앞에서 전공자들이 열 사람 이상의 몫을 해야 했다.
▶ 9·11사건을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들었고, 그때 어떤 상황이었나?
저녁에 들어와서 TV를 켜는데 이미 몇 군데 방송국에서 전화가 와 있었다. 3박 4일 동안 정보 부재상태라고 할까, TV방송 3사들이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하고 CNN 편집화면만 내보내 줬다. 제가 TV 3대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거의 3박 4일 동안 CNN이 내보내 주는 화면에 국가운명을 매달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기껏 방송 3사의 차이라는 것은 그 회사가 고용한 동시통역사의 내용의 차이였다.
전 국가나 정부 부처가, 이제 위기관리반이 가동되고 비상대책이 만들어졌지만 너무나 전문가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국가이익을 지키고 어떤 전략적 대책을 세울 것인지에 대한 시스템이 부족했었다는 것을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전문가니까 뭔가 국가 발전과 미래를 위한 아이디어를 좀 내놓으라고 했을 때 심지어는 내가 그런 얘기를 했다. ''대책 없다'' (웃음)
뭐 좀 내놔야 할 것 아니냐고 하면서 위기대책반이 가동이 됐는데, 위기에 대한 대책을 세우려면 적어도 위기를 유발하는 인자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나 데이터베이스가 있어야 하는데 상대는 알카에다라고 하는, 그때 우리는 거의 처음 들어보는 존재였다. 위기를 유발하는 사람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대책을 세우면, 세우는 만큼 그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많으니 정말 가만히 있자고 그랬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만큼 글로벌 지식이 희박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다양한 문화에 대한 국가 전략을 세우고, 전문가를 양성하는 일에 매진하자고 간곡한 부탁을 했던 기억도 난다.
▶ 지금 아랍인구가 얼마나 되나?
이슬람권 전체 인구가 UN 통계로 14억 정도 되고, 이슬람 국가로 UN에 가입하고 있는 나라가 정회원국 기준으로 57개국이다. 적어도 14억 인구, 57개 나라를 가진 지구촌 4분의 1에 육박하는, 이 최대 단일 문화권에 대한 정보를 총체적으로 무지상태에 만들어 놓고, 우리가 글로벌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문제가 많다고 봐야한다.
▶ 9·11사태를 이슬람 쪽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한다.
흔히 외신에서 들려주는 것 하고 내가 인류학자로서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그 사람들에게 느끼는 그 사이에는 차이가 많이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9·11은 이슬람문명과의 싸움, 가치에 대한 정면도전, 이슬람에 대한 적대행위였다는 것이 90% 이상의 절대적인 생각이다. 알카에다를 중심으로 하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급진 세력들은 제가 보기에는 한 3% 정도라고 본다.
미국 학자들은 5% 정도로 보는데 5%가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57개 이슬람 국가 중에서 향후 5년 이내에 그 사람들이 정권을 담당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는 제가 보기엔 한 나라도 없다.
문제는 우리의 진정한 파트너는 우리와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97%의 건강한 주류, 이슬람 공동체인데 이 사람들을 급진 테러의 모습으로 같이 묶어버리니까 그것이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다.그래서 이슬람권 사람들도 9·11테러는 야만적 행위다, 오히려 이슬람의 가치를 왜곡시키는 적대행위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한다.
◈ 일부다처는 비 이슬람적 행위, 왜곡이 낳은 수많은 오해들▶ 우리는 교과서에 실린 것도 그렇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도 그런 것이 이슬람 쪽에 대한 왜곡이나 오해가 굉장히 많이 있는 것 같다. 무지에서 오는 것도 있을 것이고 우리가 너무 미국 측의 정보만 듣다 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든다. 이 교수가 보시기에 정말 바로 잡아야 한다는 오해가 있다면 바로잡는 의미에서 몇 가지만 이야기해달라.
최근에 크게 문제가 됐던 것이 우리 중·고교 사회교과서에 실린 이슬람의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진이다. 이슬람은 우상숭배 금지 때문에 예언자의 사진을 싣는 것을 최대의 신성모독으로 여긴다. 얼마 전에 네덜란드의 어떤 신문에서도 마호메트의 만평을 실었다가 전 세계 이슬람 국가에서 들끓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나?
그들은 일체의 동물과 사람을 형상화 시키지 못한다. 14억 이슬람교도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호메트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다. 보지도 못하는 그 얼굴이 우방의 학교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으니…그것은 종교에 대한 모독이다. 그 사진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진도 많이 있을 텐데, 사실 그것은 외교문제가 될 소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다음 개정교과서에서는 고치기로 약속을 했다.
두 번째 민감한 문제가 ''페르시아 만''인데 우리가 많이 쓰는 페르시아 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독도문제처럼 민감한 문제이다. 이란사람들은 페르시아 만이라고 하고, 아랍사람들은 아랍만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국조차도 91년 전쟁 후에 중도적인 입장에서 ''걸프해''로 바꿔서 부르기 시작했다. 외교적인 분쟁을 피해가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모든 교과서, 지리부도, 지리책에는 모두 ''페르시아 만''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랍하고 석유나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있는데 굳이 이란 입장을 두둔해서 페르시아 만이라고 쓸 필요가 없다. 22개 아랍 국가들의 입장도 있으니까 중도적인 입장도 필요할 텐데 말이다. 그것은 한국에 와서 꼭 일본해라고 표현해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빨리 고쳐야 한다.
그것은 일부러, 의도적이라기보다는 무지해서 그런 것 같고 또,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 일부다처의 문제 같은 것은 우리 교과서에서 많이 고쳐져서 상당히 전향적인 교과서가 되고 있다.
▶ 일부다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역사적 배경이나 정확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원래 이슬람은 일부일처이다. 가장 많이 일부다처를 하는 나라가 아랍 에미리트, 카타르 같은 나라인데 최근에 5% 정도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니까 95%는 일부일처제를 한다고 이해를 하시면 좋을 것 같다. 유목사회에서는 전쟁과 약탈, 또 낙타를 타고 교역을 통해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원천적으로 사회참여가 봉쇄되어 있다. 혼자서 경제력을 가질 수 없으니까.
그런데 끊임없는 전쟁과 약탈로 남자들은 계속 생명을 잃게 되니까 항상 공동체에서 남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거기서 남자 없이 여자가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죽음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 살아남은 남자가 전우의, 동료들의 아내들을 함께 부양하는 의무, 소위 오아시스의 의무로 시작을 했는데 원래는 좋은 취지였다. 그러다 그것이 남성의 권위나 경제력의 과시, 여성인권의 수단으로 악용됨으로써 지탄을 받고 있다.
일부다처는 유목사회구조가 만들어냈던 것이고 이 무분별한 일부다처에 이슬람이 들어와서 철퇴를 가한 것이다. 일부다처에 대한 조건을 아주 엄격하게 하고 일부일처를 하되 그 조건이 충족됐을 때 일부이처를 하도록 하는, 오히려 무분별한 일부다처에 철퇴를 가한 것이 이슬람이다. 그래서 이슬람은 원래 일부일처가 기본 원칙인데 특수한 상황에서 일부다처를 허용하고 있고, 현대 아랍사회에서도 급속히 일부일처로 가고 있다. 일부다처를 하는 사람들은 좀 ''비 이슬람적'' 행위라고 요즘 이슬람학자들은 그렇게 정의를 하고 있다. (웃음)
▶ 맘에 안 드는 것이 아프가니스탄을 봐도 그렇고 원리주의자들이 있지 않나? 여성에 대해서 아직도 너무 남존여비사상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저도 똑같은 생각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텔레반정권이나 지금 사우디아라비아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여성에게 운전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인데 이 문제를 가지고 15년째 논쟁을 하고 있다. (웃음)
▶ 교육도 안 시킨다고 들었다.
아직 해결이 안 됐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이슬람의 이름으로 급진 정치지도자들이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이슬람국가인데도 인도네시아에서는 국민들이 직접선거에서 메가와티(Megawati) 여사를 대통령으로 뽑아버리지 않았나? 또, 아프가니스탄 이웃나라가 파키스탄인데 파키스탄에서는 국민들이 베나르지 부토 (Benazir Bhutto)여사를 민선 여성수상으로 뽑았다. 방글라데시도 여성 민선 수상이 나왔다.
특히, 물론 서구화가 가장 많이 돼 있고, 여성 민선수상이 나왔고, 99%가 이슬람을 믿고 있지만 터키는 최근에 간통죄가 폐지됐다. 그리고 사형제까지 폐지가 됐다. 어떤 이슬람국가에서는 간통죄와 사형제까지 폐지되는데 또, 어떤 이슬람 국가에서는 간통하면 돌로 투석형을 하는, 아주 끔찍한 형이 살아있다.
결국은 이런 정치 지도자들이 이 좋은 종교적 가치를 악용하면서,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민도도 문제고 여성의 자각과 자기 권리를 못 찾는 사회적 인식도 빨리 깨야겠다.
◈ 정치적 악용을 벗고 이슬람 원래의 빛을 찾아야 해▶ 그중에서 교육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혹시 이슬람 전문가로서 이슬람을 옹호하지만 이런 점은 싫다는 것도 있을 것 같다.
너무 오만하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의 신앙과 신념만 옳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과 관용하고 공존하는 그런 마음 자세가 좀 부족한 것 같다.
▶ 그 오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유목생활, 전쟁과 약탈의 과정에 있으면서 남에게 비굴한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담 후세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미국에 1%의 승산 가능성도 없으면서 버텨보는 것이다. 이 오만함이 정말 무지하고 순수한 국민들에게 큰 피해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고, 그 좋은 종교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인의 독재나 정권 연장에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지금 이슬람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민주주의의 낙후인데 이슬람사회가 빨리 민주화가 되고 시민사회가 형성 돼야 이슬람의 가치도 원래의 빛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웃음)
▶ 고향이 어디인가?
경남 밀양인데 초등학교까지 밀양에서 공부했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
아버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셨고 굉장히 유교적 전통이 강한 집안에서 억눌러 사셨다. (웃음) 이를테면 제가 밀양초등학교를 다니고 3,4,5학년 3년을 시골분교에서 다녔는데 그 이유가 할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3년 상을 하시기 위해서 내가 학교를 옮겼다. 30대 엘리트 공무원이 사표를 내고 효도를 하시겠다고 하는 것이 어린 나이로서 이해하기가 참 힘들었다. 덕분에 4학년 때 산골에서 전교어린이 회장을 했다. (웃음)어머님은 집안에서 살림만 하시는 전통적인 유교 집안의 주부셨다. (웃음)
▶ 아버님이 아직 생존해 계신가?
아주 건강하시다. 요즘은 많이 개화되었고, 연세에 비하면 상당히 진보적인 편이다. 자식들이 맘 놓고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셨고, 아버지의 생각에 자식들을 묶어두지 않으셨으니까 제가 이슬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3남 1녀 중에서 내가 장남인데도 20여 년 동안 계속 해외에 돌아다녔는데도 한 번도 걸림돌 역할을 하시지 않으셨다.
▶ 장영희 교수를 비롯한 우리 시대 공부의 달인 30명의 이야기를 실은 책 ''''공부의 즐거움''''에서 중학교는 재수, 고등학교는 삼수를 하셨다고 했는데 아니, 학생회장까지 하신 분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웃음)
정말 시험 운이 지독하게 없는가 보다. (웃음) 나는 시험만 치면 붙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저는 대학교수가 된 이후에도 15년째 우리 학생들을 시험 보면서 평가해보지는 않았다. 한번은 모 대학에서 교양과목에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고 사유서까지 제출했으면서도 저는 결코 그 원칙을 저버리지 않았다. (웃음)
그 순간에 시험을 치고 교실밖에 나오면 다 잊어버리는 공부, 제가 경험했던 좌절의 아픔 때문에 우리 학생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시험을 치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과제를 찾아서 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는 지금도 아이들에게 시험을 치르지 않게 하고 있다.
◈ 모두가 미국행을 택할 때 반대편 행을 탈 수 있는 용기▶ ''시험울렁증''이 있나 보다.(웃음) 공부 잘하다가도 시험지만 보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그게 아니라 공부를 안 했다.(웃음) 왜냐하면 초등학교 시골분교에서 있던 아이가 중학교 부산에 유학을 갔고 3년간 절에 있었다. 어머니가 사춘기 시절 빗나갈까 봐서 포충사(褒忠祠) 주지 스님에게 말씀드려서 부산에 있는 조그만 암자에 저를 맡겨놓으셨는데, 3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예불치고, 종치고, 그래서 내가 지금도 동생들보다 키가 작다. (웃음)
철저히 육식을 금하면서 3년간 거의 수도생활하면서 경남고등학교를 갔는데 통학시간이 매일 3시간씩 걸리니까 도저히 못 다니겠더라. 그래서 학교 옆에 하숙을 했는데 그동안 못 누렸던 자유를 만끽하게 된 것이다. 매일 하숙생들과 어울려서 다니고, 공부보다도 너무 좋더라. 자유의 맛이라는 게 (웃음)
▶ 뭐하고 놀았나?
축구부 만들고, 동네 산성에 친구들과 어울려서 막걸리 마시러 다니고, 옆에 있는 부산여고나 남성여고 학생들과 짝짓기해서 데이트도 하고, 원도 없이 놀았다.(웃음) 그런데 저희 고등학교 480명 졸업생 중에서 그해에 132명이 서울대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엄격한 아버님의 분위기에서 서울대학에 응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거였다. 나는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아버님 눈치 때문에 서울대학을 계속 봐야 했다. 3번 떨어지고 그러다 군대에 가야 하니까 마지막 선택으로 외국어대학에 갔는데 가장 경쟁률이 덜한 과를 고르다가 터키어과에 들어갔다. 터키어과 졸업생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웃음)
▶ 터키어과를 들어가니까 아버님이 뭐라고 하시던가?
그때는 이미 포기하셨다. (웃음)
동기생들과 3,4년 차이가 나니까 제 동생 동기가 제 대학동기가 됐다. 아저씨가 물 흐린다고 미팅이나 데이트에 끼워주지도 않더라. (웃음) 그러니까 할 것이 공부 밖에 없었다. 그때는 70년 내내 유신체제하에서 대학이 휴교상태니까 학교에서 놀면서 공부해도 저는 올 A였다. 딴 사람들은 휴교라고 노는데 저는 조금씩 공부해도 최고 점수가 나오는 것이다.
공부 밖에 할 것이 없어서 공부를 했지만 이제는 뭐 고시공부하고, 대기업 시험공부하고, 유학가고, 결국 내 동기들과 3,4년 뒤처진 인생이 되니까 그건 정말 싫었다. 그래서 남들이 철저히 안 하고 버려진 분야가 뭘까 고민했는데 그때 석유파동 직후의 이슬람이라는 존재가 웃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사람들이 싫어하고 미워하고 버려둔 것이 저한테는 예쁘게 보이더라. 그래서 이슬람을 끌어안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그 안에 들어가고, 너무 좋아서 아직까지 놓지 못하고 있다.
수능을 앞둔 학생들에게 강의를 해달라고 하기에 ''왜 남들이 다가는 틈새 경쟁과 무한경쟁 속에서 그 에너지와 능력을 소비하느냐, 세상에는 고개만 돌리고 생각만 바꾸면 어떤 진공의 상태에서 여러분을 기다리는 무한 공백지대가 있다. 그걸 공격해서 그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게 훨씬 유리하지 않느냐'' 제 경험을 이야기해 줬다.
▶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됐다?
그때는 국내에서 제 분야를 지도할 수 있는 교수가 없었고, 특수한 분야이다 보니 주로 어학을 하시는 분들이 교수로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 전공자는 없었다. 나도 미국을 가려고 미국의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Temple University)에 유명한 팔레스타인 교수에게 편지를 썼는데 첫해는 장학금을 주기 어렵고 비행기 표도 자비로 오라는 거다. 그때 4남매가 다 대학생이라 형편상 포기를 했는데 82년도에 터키대통령이 와서 문화교류협정이 체결되고 첫 국비유학생 공고가 났다. 그래서 시험에 응시를 하고 이스탄불대학에 가게 됐다. 내 친구들이 다 미국 가는 비행기를 탈 때 저는 반대편 비행기를 탄 것이다. (웃음)
▶ 응시인원이 몇 명이었나?
나는 많이 올 줄 알았는데 강당에 시험을 응시하러 갔더니 아무도 안 왔다. 그래서 나 혼자 시험을 쳤다. (웃음) 그때 유학생 과장이 시험 감독으로 들어왔는데 내 이력서를 보더니 성적도 좋고 해서 미국의 웬만한 대학도 갈 수 있고 교육부에 주선도 해줄 수 있는데 왜 터키를 가느냐고 5분간 설득을 하더라. 나는 뜻한 바가 있어 가야 하니까 시험을 치게 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웃음)
▶ 혼자서 시험 보고 당연히 합격해서 이스탄불 대학으로 유학을 갔나?
이스탄불대학이 콘스탄티노플(옛 비잔티움, 지금의 이스탄불) 이어받은 대학이기 때문에 설립연도가 1453년이다. 영국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대학보다 150년 먼저 세워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의 하나였다. 그 대학 530년 역사에 내가 첫 한국유학생이 된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너무 좋아했다. 그렇게 한국을 좋아하는 줄 몰랐다. 나는 솔직히 고백하건데 이스탄불 한 8년 가까이 살면서 한 번도 외국인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다 형제같이 대해주고 총장도 내 성적을 학기마다 관심 가져주고.
◈ 왜곡된 편견을 바로잡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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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까지 된 건가?
졸업하고 한국을 가야 하는데 나를 받아줄 대학이 없지 않나? 하루는 총장이 불러서 진로를 물어보는데 귀국을 해도 이 과목을 가르칠 대학도 없고 강좌 하나 개설하기가 어렵다고 하니까 총장님이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국비로 왔으면 당연히 한국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그래서 총장이 앙카라에 있는 한국대사관의 대사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아마 대사가 한국은 다 사립대학이라서 공부를 시키는 것은 한국정부 책임이지만 그 이후는 본인의 책임이라고 얘기를 했나 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총장이 지도교수에게 내가 이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길을 강구해보라고 했다. 사실 내가 했던 분야가 필요한 것은 한국이지 터키는 아니지 않나? 그 곳에는 전문가가 수백 명이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역사학부 교수가 15명이 있었는데 젊은 교수들이 자기네들 자리 문제도 있으니까 끝까지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두 달간 논쟁하다가 결국 무기명 비밀투표를 해서 9대 6으로, 찬성 9표를 얻어서 내가 첫 동양인 교수가 됐다.
▶ 정말 이 교수 이야기는 무슨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은데 유학생활 동안 학생으로 공부하면서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언어와 문화적 차이도 있고 현지 학생들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처음 유학을 가서 2년 반 정도는 정확하게 4시간 이상을 자본 기억이 없다. 그때는 이스탄불 600만 인구 중에 한국 사람이 제 가족들 밖에 없었다. 문화를 공부하러 갔고 한국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24시간 항상 터키사람처럼 생각하고 그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깊이 있게 문화를 공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결혼을 하고 유학을 갔나?
유교 집안이니까 어머님이 분명히 외국 며느리 볼 것 같다며 앓아누우셨다. (웃음) 그래서 6월에 선을 봐서 석 달 만인 9월에 결혼을 하고 유학을 갔다.
▶ 문화충돌 같은 것은 없었나?
많았다. 예를 들어 그 사람들은 왼손을 사용하지 않고 오른손을 쓰지 않나? 식탁에 가면 항상 큰 컵에 물을 담아놓는다. 손을 씻는 물인데 목이 말라서 벌컥벌컥 마셨다가 식탁 분위기를 깨트린 적도 있었고 (웃음)
또, 3시부터 4시까지는 티타임인데 그곳은 이웃집에 차를 마시러 가도 항상 정장에 온갖 보석을 하고 간다. 그런데 집안에서 입는 평상복 차림으로 갔다가 집사람이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혼난 적도 있다. 그리고 라마단 단식기간일 때는 새벽 4시가 되면 사람들이 다 불을 켜고 단식준비를 하는데, 우리는 모르니까 불을 끄고 잤다.
하루는 동네에 나갔더니 아이들이 돌을 던지면서 사탄의 집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하나님의 천벌을 어떻게 견디려고 단식기간에 아직도 불을 끄고 자느냐고. 자기 문화권에 왔으면 외국인이든 누구든 그 문화를 지켜줘야지 저 외국인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마을 전체가 불경스럽게 됐다고. 그래서 한참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아침에 일어나면 불을 켜놓고 잠을 더 자고, (웃음) 두 번째부터는 그 사람들 문화를 존중해 주자는 차원에서 같이 단식을 했다. 같이 단식을 하니까 우리 지도교수도 너무 좋아하고 동료들도 초청해주면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어서 훨씬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 지금도 가면 옛날 친구들도 만나고 그러겠다.
지금도 가면 벌써 스케줄 다 맞춰놓고 친구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웃음) 학교 다닐 때 나한테 ''형, 형'' 하던 2년 후배는 지금은 터키 수상이 되었고 이번에 대통령 출마하는 외무장관은 제 2년 선배이다. 나와 동문수학하며 학교 다니고 함께 어울리고 차 마셨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 사회적, 정치적 중심인물이 돼있고 해서 저는 터키에 가면 한국보다 대접을 더 잘 받는다. (웃음)
▶ 이슬람 전공자로서 우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
아직 이슬람은 편견이 많은 종교이다. 그 사람들도 참 따뜻한 사람들이다. 지구촌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석유와 천연가스를 포함해서 우리 에너지 자원의 90%를 아직 이슬람 사회에 의존한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해외건설 플랜트 수주 1위 지역이고 최근에는 상품시장의 65%까지 한국제품이 차지하면서 열풍이 일어나고 있다.
''겨울연가''나 ''대장금''이 들어가서 한류열풍이 몰아치고, 이란에서 ''대장금'' 시청률이 82%라고 한다. 완전 국민드라마이고 그 시간대에는 시내에 자동차가 한 대도 안 다니고 범죄율이 제로라고 한다. 드라마 보느라고 도둑도 없다고 한다. (웃음)
이렇게 15년, 20년 장기적인 에너지 석유 공급해 주고, 정말 20억 불, 30억 불 큰 공사를 한국회사에게 수주시켜주고 또, 한국 물건만 골라서 사주고, 문화적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싶어 하는데 우리는 국민 전체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편견을 좀 뛰어넘어서 정말 우리 친구로서, 국가적 파트너로서 들여다보는 그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 같고, 다른 것보다는 같은 것을 많이 찾아서 좀 친구로 끌어안는 그런 인식이 절실한 과제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