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엽
1982년 2월 6일 서울극장 <애마부인>이라는 애로영화가 상영됐습니다. 그해 6월11일까지 무려 넉 달간 장기상영하면서 31만 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들였습니다.
개봉관 상영이 끝나면 재개봉관에 걸리던 당시 극장의 상황이나 인구비율을 염두에 둔다면 오늘날 서울관객 100만 명에 맞먹는 결과였습니다. <애마부인>은 그해 한국영화 가운데 최고 흥행작이 됐습니다.
정면으로 성을 주제로 다룬 영화가 본격적으로 나온 신호탄이기도 했고그 때문에 온갖 오해와 비판을 한 몸에 받은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정인엽 감독입니다.
정인엽 감독은 그 전에는 예술성과 주제의식이 높은 영화를 만들어 온 분이기도 했습니다.강우석, 강제규 감독에게 흥행영화 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연출 시절 가르쳐준 감독이기도 합니다.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으로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정인엽 영화감독을 6월 30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원로 영화인의 정관 제 1조 ''''한국영화 발전'''' [BestNocut_R]▶ 건강은 어떠세요?
좋습니다. 청년 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습니다.
▶ 특별히 운동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골프도 치고, 산에 자주 다니고, 체육관에도 가고 합니다.
▶ 일부에서는 42년생이라고도 하고, 또 38년 도쿄출생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게 맞습니까?
38년 도쿄출생이 맞고요, 한국에 온 것은 해방 직후에 나왔습니다.
▶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은 언제 취임하셨어요?
1년 반 정도 되었는데요. 2006년 3월 24일 날짜로 감독총회에서 23대 감독협회 이사장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 지금 영화감독협회에서 하고 있는 가장 큰 일은 어떤 게 있습니까?
우선 영화감독협회에서는 친목을 위주로 하고 있고요, 한국영화 발전 도모가 저희 정관 제 1조로 되어 있습니다. 회원들은 약 280명이 있고 전국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회원으로 되어 있는데 한 작품만 만들어도 회원입니다만, 요즘은 젊은 감독들이 가입하지 않은 감독들도 있습니다.
저희 협회에서는 춘사 나운규 선생을 기리는 영화제도 있고 또 신상옥 청년영화제도 금년에 있는데, 협회의 제일 중요한 일은 영화진흥법의 잘못된 부분들을 개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스크린 쿼터가 없어졌잖아요. 그래서 지금 한국영화계가 상당한 위기입니다. 한국영화의 위기가 어제, 오늘은 아닙니다만 한국영화 70년사에 개인적으로는 세계 경쟁력에 어느 정도 진입은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FTA 협상 때에 스크린 쿼터를 없애는 것을 하나의 무기로 삼았죠. 저희로서는 상납했다고 보는데 그 이후로 스크린 쿼터가 73일로 줄었고 올해 외화가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한국영화 흥행이 굉장히 안 되고 있습니다. 1년도 안 돼서 영향을 받고 있는데, 미국 정부에서는 아직 FTA가 상원, 하원의원의 인준을 받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실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소고기도 들어오고 했으니 했다고 봐야죠. 스크린 쿼터가 73일로 정해져 버렸어요. 그런데 그마저도 극장에서 73일을 안 지켜줍니다. 그러니 한국영화는 설 자리가 없고 외국영화만 판을 치는 거죠. 영화도 산업인데 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 한국영화, 이제는 거품을 걷어내야 할 때▶ 일부에서는 스크린 쿼터에 대비해서 한국영화가 잘 될 때 왜 준비를 하지 못했는지 의아해하는 시각도 있거든요.
그 부분에 대해서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영화 역사가 70년사지만 세계 경쟁력에 뛰어든 것은 불과 4~5년입니다. 병아리가 이제 조금 닭이 되려고 하는 그런 과정인데 스크린 쿼터를 없애버렸어요. 그러니까 자생력이 없는 거죠.우리도 미국처럼 메이저 회사가 되고 힘을 갖는 영화인들이 조금 있으면 나오겠지만, 고 신상옥 감독님은 생전에 영화는 산업화가 되어야 한다, 영화인이 제작자가 되어야 하고 돈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전부 투자자, 재벌들이거든요. 재벌의 생리라는 게, 장사 안 되면 보따리 싸는 거죠. 지금도 많이 보따리를 싸고 있고 그래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 한국영화의 위기가 물론 스크린 쿼터가 큰 이유이겠지만 그 외에도 거품이 너무 심하다는 의견도 있어요.
과거 저희 시대에는 규모나 시장이 좁으니까 제작비도 철저하게 썼는데 지금은 거품이 많습니다. 요즘 보통 평작이 40억원입니다. 평작이 이렇게 되니까 마케팅비가 20억, 제작비가 20억인데 이 거품을 없애야 한다고 해서 제작자협회나 젊은 후배들이 이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비해서 연기자가 차지하는 개런티가 너무 큽니다. 5억, 10억 이야기가 나오니까요. 그래서 이 부분에서 거품을 빼야 한다는 지적이 많아서 이것 역시 운동을 하고 있고요.
▶ 어려운 시절부터 영화제작을 해 오신 정인엽 이사장님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정말 영화제작할 때 빼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어떤 것들이 있으세요?
영화는 종합예술이거든요. 물론 감독예술이기는 하지만 스텝끼리, 우리 영화 하나 만들자 하면 무보수라 하더라도 만드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친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철저하고 너무 개인적이고 필요 없는 이상의 것들을 요구하고 펼쳐놓아요. 연극도 배우예술이기는 하지만 몇 개월에, 몇 년에 걸쳐서 연습하고 무대에 올라가서 감동을 주듯이 영화도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아픔도 겪고 고생도 하고 작품을 만들면서 그러한 영화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황금만능주의라고 하면 저항을 느끼겠지만 우선 그것부터 먼저 생각하는 걸 보면 영화정신이 있어도 저희 때와는 다른 거죠. 그런 정신이 아쉬워요.
▶ 어떤 영화 원로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요즘은 스텝을 20명이면 충분한 걸 40명을 쓴다고 해요.
지금은 100명이에요. 자동차 한대 세워놓으면 50대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휘발유 값이며 또 한 컷 찍기 위해서 차 50대가 왜 옵니까? 미국 할리웃도 그러지 않습니다.제가 70년대에 미국 할리웃을 가서 애마부인이라는 영화를 찍게 된 동기도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제가 해외연수를 1년 갔는데요, 미국은 영화정신이 굉장히 투철합니다. 준비는 2년 동안 하고 3개월 만에 찍습니다. 준비가 촬영, 완성이라 그겁니다.그런데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찍으면서 준비해요. 물론 한류가 있습니다만 그것도 신상옥 감독 등 이미 선배들이 한류를 다 만들어놨었어요. 그게 꽃을 피운 건데 마치 인기스타가 한류인 것처럼 후배들이 착각을 해요. 그래서 일본에서 판권을 얼마 가져가면 내 개런티는 얼마를 달라고 해서 20억, 15억 이렇게 받으니까 이런 면에서 위기가 온 것도 있습니다.
▶ 작년에도 배우 출연료가 거품이라고 해서 옥신각신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 변화는 좀 있었나요?
제 밑의 조감독 출신이었던 강우석 감독이 들고 일어났지요. 한국영화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요. 당시에는 변화가 없었는데 지금 조금씩 오기 시작합니다. 연기자들도 개런티를 덜 받겠다고 하고요.
◇ 화려한 명성 뒤엔 극심한 생활고...겸업은 필수▶ 화려한 명성 뒤에 어렵게 사시는 감독들도 많이 계시지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부끄럽기는 하지만, 저희 선배들 중에 일생동안 두 작품이나 한 작품 하시고 감독으로 기다리고 있는 분들도 계세요. 예술정신이나 작가정신으로 끝내 포기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가족들한테 미안하죠. 어렵게 생활하시는 분이 한 두 분이 아니에요. 저는 다행스럽게도 60여 편을 만들었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행운을 못 얻은 동료나 선배, 후배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감독협회에 와서 포기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만들어요.
▶ 정인엽 감독님도 부업을 하시지요?
저희 아이를 통해서 조그만 식당을 2개 정도 하고 있습니다.
▶ 일부 스타들을 제외하고 배우들도 부업을 많이 하나요?
대부분 연기자들이 부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7,80%라고 알고 있어요.
▶ 부업도 없이 어렵게 사시는 배우들도 있나요?
영화감독 부인들이 고생을 많이 하지요. 부업을 통해서 남편인 영화감독을 위해서 헌신을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만 그런 여성들이 있지요,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겁니다.선배 부인들 중에는 존경할 만한 분이 많이 계십니다.
▶ 이건 사담인데요, 둘째딸이 결혼할 때 사위될 사람이 영화감독이 꿈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자네, 영화감독하려면 결혼 안 시킨다고 했어요.(웃음) 꼭 영화감독 하고 싶으면 벌어서 밥 먹을 거 해 놓고 하라고요.
저도 영화감독을 했습니다만, 아이들 둘 유학도 시키고 한 걸 보면 행운아입니다. 저는 제작도 하면서 프로듀서도 겸했거든요. 흥행도 시켰는데 상업영화를 만들었죠.처음 김기영 감독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소위 작가정신을 배웠는데 3~4년을 어렵게 지내다가 어느 날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상업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어요.흥행을 시키고 나니까 비로소 감독으로서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이 없었어요.사실 상업영화가 쉬운 것 같지만 어렵거든요. 관객을 극장 앞까지 끌어들인다는 건 일종의 흥행영화인데요. 소위 오락성을 겸비한 상업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물론 여러 가지 장르가 있지만 오락영화를 장르로 선택한다는 것은 관객을 1시간 40분 동안 재미있고 메시지도 줘야 하고 작품의 질도 높이는 등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니까 상당히 어려운 거죠.요즘 우리 후배들은 영화를 잘 만듭니다. 그래서 천 만 관객도 동원하잖아요.아까 왜 한국영화의 위기라고 했냐 하면, 투자자와 스텝과의 관계가 잘못 되어 있습니다. 할리웃과는 다르게 스텝들은 보장되어 있지 않아요. 투자자들이 8:2 정도로 가져가 버려요. 그러니 천만 관객이 들어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영화인이 살쪄야 한다는 게 이런 의미죠. 신상옥 감독님의 말씀처럼 영화인들이 영화사를 가지고 있어야 영화에 미친 사람이 그 자리에 다시 남지, 장사꾼들은 벌면 떠나버리면 그뿐이잖아요. 그래서 이런 경우가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시의 신상옥 감독님의 정신이었어요.
▶ 지금도 영화를 만든 영화인들이 필름을 갖고 있지는 않잖아요.
지금 메이저가 될 만한 후배들은 시네마 서비스 강우석 감독, FNH 차승재 대표 , MK픽쳐스 강제규 감독 정도에요. 이 셋을 빼놓고는 메이저라고 할 수가 없어요. 전부 프로덕션이죠.재벌이 떠나버리면 영화계는 전부 공터입니다. 이것을 정부가 알아서 스크린 쿼터를 지켜주고 영화계에 새로운 안정을 주면서 없애야 하는데, 물론 정부에서는 FTA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있겠지만 저희들은 이 정부를 굉장히 원망을 하고 있어요.
▶ 영화발전기금도 있지 않나요?
영화발전기금은 정치에 이용하는 발전기금이죠. 제가 감독협회 이사장으로써 발전기금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검토도 해 보았지만 발전기금이 아닙니다. 영화계에 생전 들어오지 않는 정치꾼들 2,3명이 들어와서 우리 영화 발전을 저해시키는 일들이 있었어요.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몇 몇이서 나눠먹는 형식이 되어버렸지요.
◇ 도전하라, 청년이여! ''''공주 천마 청년영화제''''▶ 고 신상옥 감독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1년 반이 되어 가는데요, 신상옥 청년영화제가 열린다고 하셨는데 정인엽 이사장님께서 어떤 일을 맡으셨어요?
신상옥 청년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전국에 있는 청소년을 비롯해서 29세의 일반인까지, 영화를 좋아하고 또 입문하고 싶어하는 천재들을 찾는 영화제입니다.
▶ 정식 명칭이 ''''2007 공주 천마 신상옥 청년영화제'''' 인데 공주에서 열리나요?
공주에서 8월 10일~14일까지 열립니다.
▶ 왜 청년영화제로 이름 붙이신 건가요?
영원한 청년정신을 갖고 있는 고 신상옥 감독님은 멋쟁이십니다. 항상 청년답게 카메라 앞에서 옷을 어떻게 입든 촬영을 하든 영화에 미쳐 사셨어요. 부를 누리지 않는 청년정신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제가 청년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영상대학교를 제가 알아보고 깜짝 놀랐는데 우리 영화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는 것도 전국의 연극영화학과, 영상학과가 130개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문화가 여기까지 왔구나 생각했죠.
이번에 상금을 1억원을 걸었어요.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의 장학금이에요. 사실 영상대학이 130개인데 갑자기 만들어놓으니까 카메라도 한 번 만져보지 못하고 졸업하는 후배들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그러고는 조감독으로 찾아와요. 서울의 사대문 안에 있는 대학을 졸업했는데 카메라 한 번 못 잡고, 한 컷도 못 찍고 졸업하는 게 어디 있냐? 그래서 이번 영화제를 통해서 카메라를 한 번 찍어봐라, 포스터나 찌라시를 만들어서 각 대학에 보내면서 학과장들에게 영화는 현장교육이다, 지금 이론도 중요하지만 영상대학의 4년을 그냥 보내지 말고 수업을 해서 보내라고 했어요.
미국 같은 경우 UCLA, USC, NY 등을 보면 제가 견학을 다녀봐서 압니다만, 유명한 프란시스 레이 코플라 감독은 UCLA출신이고 스티븐 스필버그는 USC출신입니다. 그런데 서부의 양대 학교에서 졸업 작품을 내면 그걸 보러 할리웃의 프로듀서들이 옵니다. 보통 30분짜리 극영화인데, 와서 그걸 보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스카우트를 합니다. 그래서 코플라가 감독이 된 겁니다. 저도 그 졸업 작품을 봤는데 그런 의미에서 훈련을 해야 하는 겁니다.거기에 인생을 다 바치고 그 속에서 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졸업하면서 다시 시작해야 해요. 요즘 영화가 호황이니까 영상학과를 만들자 해서 만들었는데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이론만 시키니까 애들이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 다시 공부해야 합니다. 조감독으로 들어오면 아무 것도 몰라요. 이론으로 영화를 만들면 실패하고 해서 이번 영화제는 상금을 걸면서 카메라로 찍어와 봐라, 너희들이 동아리를 만들든 누구하고 만들든 직접 영화를 만들어 봐라 해서 7월 말까지 기간을 줬어요. 그걸 심사해서 수상을 하는 거죠.
▶ 단편입니까?
30분짜리 단편입니다. 왜냐하면 제작비가 많이 드니까요. 8미리, 16미리, DVD, 디지털로 찍어도 좋고요. 그래서 학교 단위에서 각 영상학과에서 예산을 들여서 영화를 만들어 봐라, 소재는 자유니까, 이렇게 뭔가 대한민국의 영상학과가 바뀌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제가 영화감독으로서 바꿔보려고 생각합니다.신상옥 감독님이 영화산업의 선구자입니다. 홍콩에도 카메라 하나 들고 가셔서 당시 동남아를 석권하고 있었던 ''''란난쇼''''를 찍기도 하시고 또 영화를 국내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저도 홍콩에 따라 간 일이 있습니다. 그런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이번 신상옥 감독님의 호를 따서 공주 천마(天馬) 영화제를 개최했습니다.
▶ 상이 여러 가지가 있네요. 그 중에서 안성기 상, 박중훈 상은 어떤 상인가요?
물론 다른 단편영화제는 상금도 있지요. 저희가 그렇게 한 것은 뭔가 축제가 되어야겠다, 영화계는 프로니까 받는 상에서 주는 상으로 바꾸자. 그래서 ''''안성기 상'''' 같은 경우는 안성기씨가 나이가 50이 다 되었고 대종상만 5번을 탔으니까, 안성기씨가 청소년들에게 꿈을 주는 상으로 바꾼 거예요.기금은 본인들이 내고 싶으면 내고 안내면 감독협회에서 내서 1억원을 만들었죠.
▶ 받는 분들이 굉장히 기분이 좋겠어요.
거기에는 ''''강제규 상''''도 있고 ''''강우석 상'''', ''''안성기 상'''', ''''박중훈 상'''', 지금 섭외중인 김혜수, 최민식 등 톱스타이면서 의식 있는 배우들이나 과거의 대종상을 탄 연기자상들을 제정하려고 해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받았으니까 후배들과 새로운 신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서 주려고 나머지는 섭외중입니다.
▶ 기금이 만만치 않게 들 텐데 어떻게 마련하셨어요?
최은희 여사님도 여기에 참여를 해 주셨고 신영균 이사장님도 참여를 해 주셨어요. 그리고 공주시에서 예산의 8,90%를 지원받았습니다. 또 최소한 5,6억원이 들어서 저희가 추가로 내지요. 가수도 나와서 축제 분위기를 띄우고, 그래야 영화제가 되니까요. 저희로서는 신 감독님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최선의 축제 분위기를 만들고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고 마치 예전의 대학가요제를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 연극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신상옥 감독님이나 최은희 선생님을 잘 모르더라고요.
영화역사를 가르쳐야 하는데요, 그래서 이번에 신상옥 감독님의 고전영화인 ''''빨간 마후라'''', ''''폭군 연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3편을 상영합니다.
◇ 헐리웃 키드, 충무로에 입성하다▶ 정인엽 이사장님과 신상옥 감독님은 어떤 인연이 있으신가요?
제가 50년대 말에 김기영 감독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 배우도 했었어요. 그때는 대부분 감독지망생들이 배우도 지망했었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배우의 꿈을 갖는데 누구나 이 꿈을 갖았을 거예요. 영상을 통해서 극장에 가면 나도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했는데 저도 그 꿈을 가지고 김기영 감독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십대의 반항''''이라는 영화에 출연했었어요.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작품우수상도 탄 영화인데 거기에 황해남씨, 전세권씨도 같이 출연했죠. 59년 작이에요. 그리고 나서 김기영 감독님의 영향을 받아서 감독을 하게 되었어요. 김기영 감독님이 너는 배우하지 말고 감독하라고 하셔서 그때부터 감독공부를 시작해서 64년도에 영화감독 데뷔를 했습니다. 그래서 데뷔를 했는데 신 감독님이 제 영화를 보셨는지 저를 스카우트를 하셔서 당시 ''''신필름''''이라는 영화사에 들어가서 영화를 만들었어요.조감독이 아닌 감독으로 스카우트가 되었는데 당시 대학 졸업하고 엘리트 의식 있는 감독으로 신 감독님이 보신 거예요. 뭔가 새로우니까, 제가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신 감독님 뵙고 6편 정도를 만들었어요.
▶ 옆에서 보신 신상옥 감독님은 어떤 분이세요?
그분은 영화에 항상 도전하시는 분이셨어요. 다른 데 도전하신 게 아니고 영화에 도전하셨어요. 평생을 영화만 하시다가 가셨어요. 사생활에 대해서는 혹자는 인간성이 어떻다고 이야기하는데 영화작가는 영화에 미치다 보면 그런 이야기도 나올 수 있습니다.
▶ 64년도에 첫 영화를 만드셨는데 제목이 뭔가요?
데뷔작은 ''''성난 영웅들''''이란 영화였어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한국에도 석유가 나온다고 해서 난리가 났었어요. 박대통령이 포항에서 석유가 터졌다고 8.15 경축사에서 말씀하셨는데, 기사내용이 뭐였냐 하면 어떤 분이 포항출신이고 서울대 지질학과를 나오셨는데 이 분 생각은 우리나라 단군할아버지는 뭔가 우리에게 유산을 주었을 것이다, 꼭 미국에게만 준 것이 아닐 것이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서울대 지리학과와 전국을 누비다가 영일만에서 석유가 났다는 거예요. 하지만 석유는 끝내 나오지 않았지요.그런데 석유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영화 주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주제가 뭐냐 하면, 아메리카 젊은이는 파면 석유가 나왔지만 한국의 젊은이는 파도 석유는 안 나왔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올 것이다. 그건 내 후세에게 또 파게 할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죠. 그래서 오늘날 GNP 1만$ 시대를 넘어간 게 아닌가 봅니다.
▶ 배우는 누가 하셨어요?
신성일, 김혜정, 이대엽 등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송재호씨가 거기 단역으로 나오던 시절이에요. 송재호씨가 지금은 TV에 주인공으로 아버지 역으로 많이 나오는데 그때 제 영화에 부산에서 올라온 첫 출연작이었어요.
▶ 중, 고등학교 시절에 영화를 많이 보셨나요?
미치광이였죠. 헐리웃 키드 이상이었어요. 그때 저희들은 프로그램이라는 게 있었잖아요. 그걸 전부 모아서 이튿날 상영하는 영화 평도 써 놓고 그랬는데 아버님이 전부 다 불 지르고는 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상업학교를 나왔는데, 서울에서 영화가 개봉하면 개봉 첫 날에 봐야 하니까 학교 두 시간을 빼 먹는 거예요. 집은 부산 범일동이었는데, 학교를 안 가고 조조할인을 봐요. 그러고 두 시간을 빼먹고 오후에 학교를 가는 거죠.
▶ 당시에 영화관을 가면 정학 같은 건 안 당하셨어요?
담임선생님이 봐 주고 그러셨어요. 제 꿈이 앞으로 영화배우가 되겠다, 그때는 어렸을 때니까 감독이 되겠다는 이야기도 했겠죠. 우리 담임선생님을 잊지 않고 있는데 그분께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 형제는 어떻게 되세요?
7남매입니다. 누나들만 위에 있고 제가 장남이에요.
▶ 부모님이 7남매를 데리고 해방 후에 일본에서 부산으로 나오신 건데, 일본에서 뭘 하셨어요?
생선장사도 하시면서 저희들을 키우셨죠. 넉넉하지는 않았습니다.
▶ 영화를 하겠다니까 부모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부모님은 반대하셨죠. 그런데 일본에서 사시는 누나가 저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영향을 많이 주셨죠. 제가 고등학교를 상업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졸업하면 은행에 바로 취직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밤중에 몰래 서울로 기차타고 올라왔죠.당시 서울의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들어갔다고 거짓말하고 영화 쪽으로 빠졌어요.
▶ 서라벌 예대를 다니셨어요?
그렇습니다. 집에서는 동국대를 다닌 줄 알았어요. 그때 연극도 하고 그랬어요. TV에서 사극을 많이 연출했던 김재형PD라고 있는데 대학 다닐 때 그 친구는 성우를 했고 저는 연극을 했어요.
▶ 학비는 어떻게 하셨어요?
누나가 몰래 부쳐주면 그걸로 다니고 그랬죠. 이번에 제 첫 아들을 장가를 보냈는데 많이 감동을 하시더라고요. 제 영화가 주로 부산에 많이 개봉을 했거든요. 그러면 누나가 자기 친구들을 새벽밥 먹여서 줄 세우고 그랬어요. 저에게는 어머니 같은 분이죠.
▶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정일성 감독님하고 인연이 있으세요?
제가 그 분은 선배로서 존경하고 좋아하고, 이번 청년영화제에도 ''''정일성 촬영감독상''''이 있죠. 김기영 감독님 조수로 있을 때 알게 되었는데 그런 관계에서 선배세요. 저희 영화 촬영을 두 서너 작품 해 주신 일이 있어요.김기영 감독님이 서울대 치대를 나오시고 정일성 감독님은 공대를 나오시고 그런 인연인데 제가 그 밑에 들어간 거예요.
◇ 한국영화 에로티시즘의 신호탄! 영화사의 획을 긋다▶ 82년도에 애마부인으로 일약 스타가 되셨는데, 당시에 어떻게 그 영화를 만들게 되신 건가요?
문희, 윤정희, 남정임이라는 배우를 아시죠? 트로이카 시대라고 불리는 이 세 여배우를 영화에서 다 출연시켰는데, 제가 20대에 이 영화를 만들었어요. 그때 신성일씨가 무스탕을 탔었는데 그 무스탕을 주제로 해서 알랭들롱이 젊을 때 유명했던 것처럼 신성일씨도 그렇게 해서 ''''결혼교실''''이라는 영화를 찍었는데 그때 제가 스타덤에 올랐어요.
그 전에는 메시지영화, 예술영화만 만들다가 흥행이 안 되었는데 이 영화로 인해서 상당히 흥행에도 성공을 했어요. 국도극장에 기마병이 동원될 정도로 흥행을 했죠.그때부터 제가 상업영화 감독으로 전기를 맞이하면서 보통 단관에서 개봉했을 때 10만, 20만이 들면 아주 호황이거든요. 제가 10만 짜리 이상을 치면 홈런이라고 하고 30만을 치면 장외홈런이라고 했어요. 제 영화 역사의 60편 중에서 그런 작품을 20여 편을 만들었죠.
그런데 우리 한국 영화 작가들은 군사 문화에 젖어서 검열이라는 목걸이를 차고 만들 때입니다. 감독협회 기금으로 해외연수를 가게 되었어요. 당시 영화를 성공시킨, 최고 흥행 히트작인 ''''꽃순이를 아시나요'''' 라는 정윤희 주연의 영화가 있었는데 그게 전국을 휩쓸면서 최고 히트작이 되니까 저를 미국의 할리웃으로 연수를 보내줬어요. 그게 70년대인데 미국을 처음 간 거죠. 최무룡 선생님이 거기에 계시더라고요. 사업을 하시다가 잘 안 되셔서 미국에 머물러 계실 때였는데 노래를 잘 하셨어요. 그래서 최 선배님을 찾아갔어요.
찾아갔더니 잘 왔다면서 술도 사주시고 밥도 사주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시더니 ''''칼리큘라''''라는 영화가 있어요. 소위 펜트하우스에서 만드는 영화인데요.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만든 ''''감각의 제국''''이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 한참 후에 들어왔죠. 그 영화가 미국에서 70년대에 상영을 하고 있었는데 이걸 꼭 보고 가라고, 보고 가서 한국영화에도 이런 장르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저희는 에로티시즘이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죠.
전두환 정권 때도 검열이 똑같이 이어져 왔어요. 제가 감각의 제국을 보고 이런 장르의 영화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작가 조수비씨라고 계셨는데 그분이 쓴 중편소설 ''''애마부인''''이 있었어요.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착안해서 에로티시즘인 애마부인을 만들게 된 거예요.안소영씨라는 신인배우를 기용해서 찍었는데 요즘 소위 말하는 대박이 터진 거죠. 서울 극장 한 극장에서만 6개월을 상영했어요. 그 영화로 인해서 서울극장이 알려졌고 안소영이라는 배우도 탄생했어요.
에로라는 것은 잘 못 표현된 거예요. X필름, 포르노 영화를 에로 영화라고 하고, 이건 에로티시즘이라는 건데 저희는 부부의 가치관, 성을 주제로 한 거예요. 그때 강남을 보니까 교회와 여관만 있더라고요. 강남이 도시 개발 직전이었는데 남산에서 보니까 불이 교회 십자가와 여관뿐이에요. 이 도시는 잘못된 도시다.그리고 저희들이 콘티를 여관에서 하는데 당시에 성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오니까 가치관이 흔들리는구나. 당시 산업화가 돌아가던 시기였으니까 중동으로 돈 벌러 가던 시대였지요. 거기서 주제를 부부의 가치관이라는 성의 주제를 끄집어냈어요.거기다가 주제를 놓고 만드니까 여성들이 상당히 대리만족을 느낀 것 같아요. 노라가 그냥 집을 뛰쳐나간 게 아니라 이유 있는, 집을 뛰쳐나가 이혼을 선언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죠.사흘이 멀다하고 집을 비우는 남자에게 너와 똑같이 하겠다. 80년대에 이야기하기에는 캐릭터가 상당히 강했죠.
▶ 당시가 전두환 정권의 광주학살이 있었을 때라 3에스(S)정책이 있었잖아요. 섹스(Sex),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그 산물이 아니냐는 평가도 있었거든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검열을 내 준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KBS에서 금년 구정에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과 이 ''''애마부인''''을 케이블이 아닌 공식 채널에서 방영을 했습니다. 한 컷도 안 잘리고 다 나왔거든요.그때 왜 제가 개목걸이를 차고 있었냐 하면 검열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저희들이 찍을 때 대사 한 마디도 ''''XX야'''' 그러면 잘립니다. 그런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런 억압 속에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스포츠는 전두환 정권 때 그렇게 내줬다고 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건 제가 증명을 합니다.
◇ ''''과''''와 ''''실''''의 평형을 이루고 싶어▶ 앞으로 영화를 하시거나 남은 임기 동안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제가 감독협회 이사장으로서 3년이 임기인데, 이 임기동안 해야 할 일이 15회째를 맞이하는 ''''춘사 나운규 영화제'''' 영화정신을 충실히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고 이번 ''''신상옥 천마 청년영화제''''를 성공리에 마쳐야겠죠.그리고 저는 작품을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올해 10월쯤이면 크랭크 인을 할 것 같습니다. 사극인데 완성도 있는 영화를 해서 선배로서 우리에게 맞는 영화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고 또 하나 제일 중요한 것은 영화진흥법을,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까지 우리 영화가 원래대로 하면 영화진흥공사였는데 진흥위원회로 영화법이 바뀌었죠. 거기에는 ''''과''''와 ''''실''''이 있습니다. 어떤 정권이든 과도 있지만 실도 있습니다.그래서 잘못된 것은 고치고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저희 감독협회에서 앞장서서 영화진흥법을 개정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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