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 리
사랑했습니다. 단지 사랑했기 때문에…26살이라는 나이차도, 노란 머리의 미국인이라는 것도,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친 신부라는 것도…그 어떤 것도 전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전쟁과도 같은 운명적인 사랑은 결국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치열하게 사랑했던 만큼, 일 또한 누구보다 멋지게 해내 최첨단 홍보사업을 통해 ''''국제 비즈니스계의 퍼스트레이디''''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서울올림픽을 세계에 알리고 전투기를 팔러 다니고,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멋지게 해치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쯤 부드러운 모습으로, 자신과 주변을 돌보고 있습니다. 굶주림에 지쳐가는 세계 각국 어린이들을 돕고, 불평등에 시달리는 여성을 위해 일하며 베푸는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일거수 일투족 세상을 뒤흔들어대는 태풍을 몰고 다니던 여자, 소설 같은 인생을 살아온 여자, 조안리를 6월 27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잊고 살아온 많은 것들을 찾게 해준 병마와 시련[BestNocut_R]▶ 예전에는 강한 카리스마가 정말 매력적이셨는데 지금의 모습은 온화하고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던가요? (웃음)
나이 먹어 가면서 아마 철이 드는 것 같습니다. (웃음)
▶ 근래에 건강 때문에 고생을 좀 하셨다고 들었어요. 요즘은 좀 괜찮으신 건가요?
몇 년 전에 뇌출혈로 수술을 받으면서 굉장히 고생을 했고, 그 후에도 2년간 넘어지고 다치면서 고생을 좀 했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 갑자기 뇌출혈이 오셨어요? 너무 과로하셨나 봐요.
제가 워낙 잘 넘어져요. 외국에 출장을 갔다가 목욕탕에서 미끄러졌는데 그때는 갈비뼈만 부러졌다고 생각해서 그 치료만 했어요. 그런데 그때 부딪친 머리에서 서서히 피가 세기 시작했던 것을 모르고 3개월을 그냥 지낸 거예요. 정말 하늘나라로 갈 뻔하다가 돌아왔죠. 정말 조심해야 해요.
▶ 정말 놀랐겠어요. 저도 워낙 잘 넘어져서 한번은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칠까 봐 팔로 떨어졌는데 팔이 부러져서 몇 달을 고생하기도 했어요.
요즘은 누가 넘어졌다고 하면 무조건 가서 MRI부터 찍으라고 해요.
▶ 정말 정신없이 바쁘다가 갑자기 몸이 그렇게 되셨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그때 제가 처음으로 쉬어봤는데 그러면서 인생철학이 많이 바뀌었던 것 같아요.그때까지는 계획세우고 그대로 옮기면서 제가 모든 것을 다한다고 생각하면서 오만하게 살았죠. 쉬면서 드는 생각이 수술이 잘 못 될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잘 돼서 살았고, 그러면서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를 잊고 살아왔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전까지는 항상 긴장하고,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든 것을 창조주 앞에 내려놓으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고통과 실패라는 것이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정말 필요한 것이구나 하고 느꼈지요.
◇ 백신 하나를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천만 명의 어린 영혼들▶ 여성신문 이사장을 3년간 하시다가 지금은 명함을 보니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이사''''로 되어 있네요.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해마다 백신 하나면 살 수 있는 천만 명의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어요.이라크 전쟁이나 테러보다 훨씬 더 많은 아이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지요. 그런데 후진국의 어린이들에게 걸리는 전염병의 백신을 선진국의 제약회사에서는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안 만들어요. 또 백신 하나 개발하려면 돈이 엄청나게 드는데 그것에 비해서 효과가 낮으니까 더 그럴 수밖에 없죠.
그래서 UN에서는 비영리를 하는 국제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UNDP(국제 연합 개발 계획,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가 주동이 되어서 IVI(International Vaccine Institute), 국제백신연구소를 만들었죠. 백신 개발을 연구하기 위한 유일한 국제기구예요. 한국, 일본, 인도, 중국 등 여러 정부가 경합을 벌였는데 한국이 최초로 본부유치에 성공했죠.그래서 지금 서울대학교 내에 본부가 있고, 20개국에서 120명 정도의 과학자와 행정인원이 모여 연구를 하고 있어요.
신약개발도 중요하지만 소위 오픈-드럭(Open-Drug)이라고 해서 일단 발명됐다가 잘 안 쓰이고 있어서 그냥 내쳐진 약들을 다시 끄집어내서 연구하고 있고 또,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이것을 싸고 안전하게 어린아이들에게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들이고 있습니다.그리고 옛날에 없어졌던 전염병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잖아요. 우리나라에도 폐결핵을 비롯한 홍역 같은 질병이 다시 생겨나고 있다고 하는데, 현재 국제백신연구소(International Vaccine Institute: IVI)에서는 환경이 열악하고 물이 나빠서 생기는 주로 장티푸스, 이질, 콜레라 같은 것으로부터 개발도상국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어요.
▶ 그러려면 결국은 돈이 가장 필요할 것 같은데...
지금 현재 38개국이 협정조인 국으로 되어 있고, WHO(세계보건기구, World Health Organization)가 멤버로 되어 있는데 유치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운영비의 30%를 대기로 했어요. 그 조건으로 들어와서 운영비 30%를 대는데 사실, 연구기관이기 때문에 운영비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연구를 해야 하거든요. 그 연구비를 조달하는 것을 물론 국제사회가 도와주기도 하지만 이제는 우리 국민들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자원봉사 하겠다고 나섰는데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힘드네요. (웃음)제가 사업하면서도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이것 때문에 다니니까 왜 쓸데없이 구걸하고 다니느냐고 욕까지 먹어가면서 주위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웃음)
여성신문을 사임한 것도 여성신문은 마케팅이고 이것은 자선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건수보다는 조안리가 부탁하니까 한 건 도와주자는 이런 분들이 많았어요. 그렇다고 한 손으로 이것도 좀 도와주시고, 저것도 좀 도와주십시오, 할 수는 없으니까 한쪽에 주력하기로 했지요.
▶ 저도 가끔 공익사업을 후원하면서 내가 왜 보는 사람마다 부탁을 해야 하나 싶다가도 ''''이걸 내가 먹나, 다 어려운 사람 돕자는 거니까 창피할 일 없다...'''' 이런 식으로 최면을 걸어요. (웃음)
저는 옛날부터 국제적으로 돌아다니면서 국제사업을 해봤기 때문에 얼마나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할 일이 많은지를 절감합니다. 이 일은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하는데 정말 힘들어요.
▶ ''''월드 미스 유니버시티 세계조직위원회'''' 위원장도 하시죠?
이것도 세계평화 사절단을 모집하는 세계대회인데, 1986년도에 세계대학총장협의회(IAUP) 회장을 하셨던 우리나라의 조경식 박사가 1986년을 세계평화의 해로 지정하고, 평화의 날을 만들면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여대생 중에서 지(智), 덕(德), 체(體)를 갖춘 여대생들을 뽑아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하자 하는 뜻으로 시작을 하셨어요.벌써 올해로 21년째네요. 많은 사람들이 미인대회라고 생각을 하는데 미인대회와는 성격이 좀 다르죠. 어떤 곳에서는 미인을 뽑아야 홍보가 되지... (웃음) 이렇게도 얘기를 하는데 저희는 봉사활동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또 재학 중인 대학생만 뽑아요. 올해 11월에도 한국에서 그 세계대회가 있습니다.
▶ 저도 갔었어요. 제주도에서 저희 ''''아름다운 가게''''와 함께 했었죠. 정말 열심히 하더라고요.
맞아요. 아름다운 가게를 하셨지요. 학생들이 정말 예뻐요. 마음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그 친구들에게 백신에 대한 홍보도 좀 하라며 백신홍보대사로 임명을 했더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내가 우리나라에서 뭘 했으면 좋겠느냐,''''는 문의들이 오고... 정말 마음이 예쁜 아가씨들이에요.
조안 리2
◇ 돈 버는 일보다 더 어려운 십시일반 후원의 손길▶ 자기네 민속 옷을 입고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한국말까지 배워서 ''''사세요! 사세요!'''' 하는데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런 봉사정신을 가르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할 것 같아요.
올해도 11월에 오면 자선바자를 하고, 이번에는 백신연구소를 위해서 모금을 할까 합니다. (웃음)
▶ 이제는 완전히 나누는 일에 발 벗고 나서셨는데 원래 지론이 ''''일이 편하면 그만둔다.'''' 인가요?
일이 편해지면 떠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편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도전에 대한 것이 없어지고 익숙해졌다는 것인데 그럴 때쯤 되면 떠나야 하는 것 아닌가.... 옛날서부터 그랬는데 나눔이라는 것은 편해지는 것이 아니고, 자꾸 계속해서 더 가야지 되는 것 같아요. (웃음)
▶ 어려서부터 도전정신이 강하셨어요?
전 뭔가 편하고 쉬우면 불안했어요. (웃음) 그래서 항상 저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고 그랬는데 어떻게 보면 잘했던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저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때는 잘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러네요.
▶ 일이나 모든 것에 대해서 항상 자신만만하셨던 것 같아요.
자신만만이라기보다는 겁이 없었어요. 사람들이 겁나지 않느냐고 그러는데 저는 겁난 적이 별로 없었어요. (웃음)
▶ 저하고는 완전 반대시네요. 저는 겁이 많아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못하는 경우가 참 많거든요.처음에 했던 비즈니스가 ''''국제 홍보기획''''이었나요?
저는 해외에 가 있으면서 한국의 이미지에 대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요즘은 물론 한국의 이미지가 굉장히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개선의 여지가 많죠.그런데 30년 전만 해도 해외에 돌아다닐 때는 정말 어디 가서 한국인이라는 얘기를 하기가 창피했었어요. 알아듣는 사람도 없고, 어딘지도 모르고, 더군다나 그 당시엔 사업한다고 해외 돌아다니는 한국여자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초기에 외국을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가 한국을 대표한다고 생각을 했었죠.
저도 그런 의무감을 가지고 다니면서 한국을 밖에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에 오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제대로 알리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비즈니스를 하러 오는 외국 기업들, 외국 정부들, 이런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고, 한국에 자기네들을 제대로 알리고... 그래서 한국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는 제가 그쪽에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그 일을 했어요.
▶ 호텔 홍보 일을 하셨는데 공부를 그쪽으로 하셨습니까?
저는 심리학을 했어요. 호텔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호텔은 국제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제가 가서 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맨 처음에는 호텔이 전문업이라고 생각을 안 하고 뭐, 내가 손님도 해보고 다 해봤으니까... (웃음) 호텔을 알리는 일이 어렵지 않을 거라고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보니까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 당시 조선호텔은 한국의 영빈관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모든 외국의 원수들이라든지 비즈니스맨들이 와서 지내고 갔어요. 한 4년을 열심히 일하면서 계속 그 사람들과 겪는 과정을 통해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해 주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죠.
◇ 일이 편해지면 떠날 때가 온 것, 나눔은 떠날 때가 없는 일▶ 좋은 분들도 굉장히 많이 만나셨을 것 같은데 에피소드라든가 실수담 같은 것도 많았을 것 같아요.
그 당시는 장관들도 너무 많이 몰려왔기 때문에 외무부장관 아니면 어떤 때는 그냥 제칠 때도 있을 정도였어요. (웃음)그 당시 정말 많은 인맥을 형성했었고 나중에 비즈니스를 할 때 도움이 많이 됐죠.
▶ 그때만 해도 여자가 사회생활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직원들과의 갈등은 없었나요?
초기에 많이 부딪쳤지요. 제 말을 흘러가는 이야기로만 듣지 상사가 하는 이야기니까 해야 하겠다는 생각들을 안 하는 거예요. 메모가 가도 제 것은 아무 통용가치가 없는 메모가 돼 버리더라고요.제가 장끼라면 장끼고, 단점이면 단점인데 정말 몰랐던 것이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대우 받으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어요.
▶ 그전까지 그런 걸 안 당해보셨어요?
네, 저는 당당하게 남하고 똑같이 일한다고 생각을 했지 여성이니까 다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했기 때문에 처음 6개월 동안은 일이 진행이 안 되는 거예요. 각 부서에 일을 줬는데 일을 안 하니까요. 제가 왜 이렇게 일을 안 하지.... 그러니까 저랑 같이 일했던 남자 세일즈 직원이 아직도 모르느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뭘 모르느냐고 했더니 ''''당신이 여자인데 가서 예쁘게 애교도 떨고 부탁도 하고 좀 그래야지 그렇게 건방지게 메모만, 더군다나 그것도 영어메모만 돌리고 그래서는 그걸 누가 하겠느냐...''''
의외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라서 아니 이런 게 어디 있어 했지만 그래도 일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아양은 제 체질에도 안 맞고 자존심이 허락지도 않아서 아양 떠는 대신에 제도적으로 직원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일을 그때 제가 처음으로 했죠. 홍보기획일이라 더 가능했기 때문에 주동이 되어 조선호텔에서 직원들을 위한 프로그램 PR을 막하고 그랬어요.
▶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어요?
그때까지는 없었는데 직원들 생일파티를 해준다든지, 집안의 대소사에 뭘 보내준다든지... 이런 걸 막하니까 처음에는 뭐 그러려니 하다가 그 여자가 오더니 없던 게 생기고 자기네들한테 나름대로 괜찮았던 거죠.
그리고 그 당시 회사에서 영어를 해야 하는데 영어를 하는 분이 그렇게 많지가 않으니까 맨 처음에는 저를 곱지 않게 보고 있다가 나중에는 저에게 총지배인한테 편지를 보내야 하는데, 메모를 보내야 하는데, 이것 좀 봐달라고... 그래서 열심히 도왔죠. 결국 그런 것으로 호감을 좀 샀어요. (웃음)
그리고 총지배인(General Mnager)이 이탈리아 사람이었는데 자기는 나보다 현명해서 여자 매니저를 하나 뽑아놓고 과연 어떻게 하는가, 아마 궁금했던 것 같아요. 제대로 되나 안 되나...그래서 저는 가서 그랬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여태까지 여자라는 핸디캡 때문에 일이 안 됐던 것을 잘 몰랐다, 이제는 알아서 어떠한 프로그램을 하려는데 당신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일을 진행하되 무조건 메모를 보낼 때 그전에는 관련된 것만 보냈는데 관계가 있든 없든 당신 이름을 내가 사용하겠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볼 때 당신이 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가끔가다 문제가 있을 때 제기를 하면 나를 써포트 해라,'''' 그랬더니 자기는 너무 재미있는 거죠. (웃음) 그래서 OK....그 뒤로 정말 했어야하는데 그쪽에서 안 했을 때, 제가 매니저미팅에서 들고 나와서 얘기를 하고 총지배인이 뒷받침을 하면서 순조롭게 잘 돌아갔죠.
▶ 몇 년 만에 그야말로 장악을 하신 겁니까? (웃음)
6개월 동안 모르고 헤매다가 일단 그렇게 하고 나니 얼마 안 걸리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그게 권력이나 권력에 붙어서 어떤 건지는 몰라도 또, 어떻게 보면 진심이 통했던 것 같아요.
▶ 한국 사람들은 일단 마음을 열면 적극적이잖아요.
아마 초기에 제가 입사할 때 정식으로 인사부를 통해서 간 것이 아니고 총지배인이 뽑아서 내보낸 것이었기 때문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다 풀리면서 괜찮아졌죠.
◇ 체질에 안 맞는 아양 대신 선택한 균형과 정도의 길▶ 그러다가 자기사업은 언제부터 시작하신 거예요?
호텔에서 4년간 일하면서 맨 처음에는 재미있기도 했지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느라 너무 힘들어서 3㎏이 빠지고 그랬어요. 그러다 4년이 되니까 일이 너무 쉬워진 거예요. 그래서 이러다가 올라가 봤자 총지배인 되는 길밖에는 없는데 그 당시에 제가 가정생활을 했기 때문에 안 맞는 일이다 싶어서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독립을 했죠.
그래서 만든 것이 ''''스타 Executive-service''''라고 호텔에 오는 비즈니스맨들을 위한 서비스회사를 차렸죠. 그 당시 한국에는 전혀 없었어요. 79년 정도라 전화도 없고 팩스도 없고 텔렉스 할 때예요. 그러니까 외국에서 한국에 한번 오려면 너무들 힘들고 연락도 안 되고 편지를 해도 한국 사람들은 대답도 안 해요.
▶ 지금으로 말하면 소위, 비즈니스센터를 만드신 거네요.
제가 호텔의 비즈니스센터를 맡아서 하겠다고 해서 비즈니스센터를 열었죠. 그때는 웃기는 것이 ''''조선호텔, 조안리, 서울, 코리아...'''' 그러면 저한테 메일이 들어왔어요. (웃음) 그 정도로 각국에서 필요하면 그곳으로 연락이 오고, 그래서 도와주고 그랬죠.
▶ 돈은 좀 버셨나요? (웃음)
그때는 좀 많이 벌었는데 제가 보니까 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투자를 잘해야 하는데 저는 투자를 잘 못해서... (웃음) 제가 전혀 그 방면에 노하우도 없었고 혼자 일해 버릇을 해서요. 요즘 어린아이들에게 경제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게 너무 맞는 것 같아요.우리는 그때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경제상식이 너무 없었고 그냥 열심히 일해서 버는 것만이 잘하는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투자를 하느냐가 관건이더라고요.
▶ 실패하시고 나서 그런 마인드가 생기셨어요?
정말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인데 너무 쉽게 없어지더라고요.
▶ 그 일 이외에 비행기를 파셨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맨 처음에 Executive-service로 시작을 하다가 전문화 시키면서 국제 홍보에 초점을 맞췄죠. 국제행사 대행도 저희가 먼저 시작해서 엄청나게 큰 행사도 많이 했어요.그 당시 비행기를 팔러 다닌다고 말이 그렇게 났는데 사실은 그때 FX(Fighter Experimental, 차세대 전투기)프로그램, 한국에서 율곡사업이라고 하는 어느 전투기를 한국에서 구입을 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맥도널 더글라스''''라는 회사에서 저희에게 F-18을 홍보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사실 그게 재미있는 건데요. 그전에는 무기거래라고 하면 굉장히 숨겨진, 어두운 속에서 이루어지는 암거래 식으로, 로비스트도 등장하면서 지난번에 린다 김처럼... 이런 식으로 정말 인상이 안 좋았죠. 그랬는데 맥도널 더글러스라는 회사는 굉장히 바른 회사예요. 우리는 아직 방산업이라고 하면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 그 당시에 회장은 정말 정직하고 고지식한 분이었어요. 로비스트를 써서 이렇게 하는 것은 미국법에 저촉이 되니까 PR회사를 선정해 정식으로 홍보를 하자고 해서 한국에 수소문을 해 그중에서 제일 났다고 소문난 ''''스타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저희 회사에 일단 기획서를 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아마 다른 세 곳에서도 기획서를 받았던 것 같아요.
맨 처음 연락이 와서 갔더니 우리 기획서가 제일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제일 좋으면 당연히 우리를 쓸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계속 결정이 안 나는 거예요. 그리고 맥도널 더글러스사의 부사장 및 VIP가 열심히들 오는데 올 때마다 저를 만나고, 떠들고, 밥 먹고 가고, 그렇게 석 달이 지났어요. 그래서 제가 도대체 결정이 언제 나느냐고 미국에 물어봤더니 한참 주저주저하다가 하는 말이 이것이 무기 방산업이고, 더군다나 한국사회가 남자의 세계라는 것을 많이들 알고 있는데, 여자가 사장으로 있는 PR회사를 써서 과연 맥도널 더글러스사의 이미지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 때문에 자기네들 내부에서 계속 논의 중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는 사람마다 저를 한 번씩 보고가고.... 선보러 왔다는 거예요. (웃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제가 너무나도 화가 나더라고요. 한국에서는 한국 사회가 그래서 그렇다지만 미국은 제가 잘 아는데 미국 내에서 그렇게 얘기했다간 큰일 나거든요. 너무 화가 나서 전화에 대고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당신네들 문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으니까... 이제는 끝난 얘기니까 당신네들이 결정을 하면 나한테 연락을 해라. 그 대신에 앞으로는 나와서 나를 또 보고가고 하면 그때는 내가 차지를 요구하겠다. 변호사처럼....'''' 그 당시 시간당 300불인지 할 때거든요. 이제부터 나를 만나려면 돈 낼 생각을 하고 오라고 얘기하고 딱 끊어버렸어요.그리고 저는 정말 잊어버렸어요. 여자라니까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그런데 일주일 후에 우리를 쓰겠다고 전화가 왔어요.
조안 리3
◇ 돈과 명예를 한칼에 잘라낼 수 있는 조안리 식 비즈니스 마인드▶ 그런 일도 있었군요.
그래서 내가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왜 여태 미루다가 하느냐고 했더니 자기네들도 우리 같은 PR회사로서는 엄청나게 큰 돈이라는 것을 알죠. 이게 길고 오래가는 일이고 하니까요.그런 막중한 돈과 명예를 한칼에 잘라낼 수 있는 여자 같으면 할 수 있다... (웃음) 그런 거예요.
▶ 그것은 여자니까 할 수 있을 걸요. (웃음)
그래서 참 좋은 교훈을 얻었는데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릴 때, 가차 없이 하는 것에, 얻는 것이 있구나하고 깨달았죠. 그리고 참 열심히 했어요.
▶ 그래서 돈을 많이 버셨나요? (웃음)
네 많이 벌었습니다.(웃음)
▶ 조안리 선생님 같은 분이 길을 닦아 놓고 그래서 지금은 정말 우리 사회가 많이 좋아졌어요.
지금도 새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젊은 여성들이 저에게 자문을 구하면 항상 그 얘기를 해요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목적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하려는 본인의 원칙을 세워라.'''' 저는 사실 스타커뮤니케이션을 시작을 하면서 그때 정말 사무실 하나에 저하고 비서 하나로 시작을 했지만 그 당시 제가 세 가지 원칙을 정했어요. 하나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겠다. 무조건 돈이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하겠다는 거죠.
둘째는 그 과정에서 내 종교적인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겠다.셋째로는 그 당시 한국사회에서 있었던 학연, 지연, 혈연 하는 그 ''''연'''' 없이 내 실력으로 한번 해보겠다. 그 세 가지로 제가 어떻게 한다는 목표를 정하고, 그리고 50세가 되면 그때쯤에는 돈 버는 것은 그만두겠다, 그때까지도 돈을 못 벌면 사람 추해지는 거다. (웃음) 그렇게 그걸 딱 정했어요.그렇게 비즈니스를 해오면서 사람들이 제가 사업을 하고 그러니까 술도 잘 마시고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술도 안 해요. 노래도 음치죠. 여자에다가... 더군다나 그러니까 사업하는 데는 정말 잘 안 맞는 거죠.
그런데 제 나름대로 제가 정한 것을 지켜가면서 여태까지 해 왔다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본인의 원리원칙이 있으면 그렇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아요. 술을 배우려면 배우겠지만 그것으로 비즈니스는 안한다는... 실력으로 해보겠다는 원칙이 있었죠. 아마 초기 비즈니스의 거의 100%가 외국회사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도 있었다고 봐요.그 당시에 한국기업 두 곳을 하면 꼭 연결이 안 되는 것이, 뒷돈거래가 없기 때문에 다음 연결이 안 되더라고요.그래서 요즘 창업하고, 사업하는 여성들에게 당신들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모른다는 얘기를 해요.
▶ 그런데 그렇지 않은 여성 사업가들도 있더라고요.
정말 안타까워요.우리 사회는 과정을 굉장히 무시하거나 경시하는데 저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결과만큼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저는 그 이야기를 젊은 후배들에게 계속 얘기하죠.
◇ 목적과 본인만의 원칙으로 사업해야 ▶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정말 세기적인 사랑이었어요. (웃음)
남들이 그렇게 붙인 거지요. (웃음)
▶ 정말 불가능한 사랑을 하신 것 같은데 일단 나이 차이가 많이 나잖아요. 26살 차이의 서양인이셨고 학교설립자에 신부님이셨죠. 어떻게 만나서 결혼까지 하시게 되셨나요?그것도 도전정신이신가.... (웃음)
맨 처음에는 학생과 학장님으로 뵈었어요. 성심여고 3학년 때 같은 천주교 계통이니까 교장 수녀님께서 저를 데리고 서강대학교에 가셨어요. 그 당시 학장이시던 킬로렌(Kennenth Killoren, 한국명 길로연) 신부에게 ''''내가 사랑하는 학생인데 자꾸 서울대학교에 간다고 그러니까 당신이 설득을 좀 시켜서 서강대학으로 오게 하시오...'''' 그래서 그때 처음 뵈었죠.
저는 뵙는 순간 온 세상을 만난 것 같았어요. 너무 그분이 크고, 물리적으로도 크시지만 하시는 말씀이나 그런 게 너무 좋아서 정말 마음이 바뀌어 서강대학으로 갔어요. 입학식 날 입학 순위가 좋아서 장학금을 받았는데 장학생만 입학식이 끝나고 총장실에 가서 차 한 잔 마시며 인사할 기회가 있었죠. 두 번째 뵙는데 저를 기억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친구들보다는 먼저 알게 됐고 그 당시 그분이 한국어공부를 하고 싶어 하셨어요.
나중에 그러시는데 다른 장학생들은 자기를 총장으로 대하고, 신부로 대하고, 굉장히 한국사회가 그렇듯 어려워하는데, 저는 옛날부터 아무리 높은 사람을 보거나 유명한 사람을 봐도 주눅이 안 들어요. 그냥 나랑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지 특별히 그런 게 없었기 때문에 그날도 아마 그랬었는지 제가 자기를 너무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굉장히 인상 깊게 남으셨대요.
미국인으로서, 신부로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거룩하게 생각하고 떠받드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맘에 드셨나 봐요. 그래서 어느 날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부르시더니 본인이 한국말을 배우고 싶은데 가르쳐주면 어떻겠냐고 하시는 거예요. 저에게는 정말 꿈같은 얘기지요. (웃음)너무 좋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매일 아침 한 시간씩 학장실에 가서 한국말을 가르쳐 드리고 또, 그 당시 한국에서 굉장히 유명하셨기 때문에 동아일보니 조선일보니 그런 데 칼럼을 쓰셨어요. 그래서 그 칼럼을 영어로 쓰시면 제가 번역을 해서 그게 신문에 나가고, 뭐 그런 과정에서 굉장히 친해지고 가까워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당시 제 생각에 그게 이성적인 사랑이었다고 하면 아마 무서워서 도망갔을 텐데 그냥 저는 무조건 하나님같이 믿고, 의지하고, 너무 좋고, 뭐 그래서 따라다니는 그런 상태였었죠. 어린아이들이 놀다가 누가 밖에서 얘기하면 눈이 뜨는 식으로 그분도 초기에 그런 생각이셨다면 아마 안 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정말 우리가 순수했기 때문에 전혀 모르고 그러고 다니다가 일 년이 지나고 나니까 주위에서 말이 나기 시작했어요. 총장이 너무 한 여학생하고만 다닌다,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산도 같이 다니고 매일 뭐 스스럼없이 그랬으니까요.
▶ 학교가 거의 뒤집어 졌겠네요. (웃음)
주위에서 그렇게 하고 저희를 떼어 놓았지요. 신부사회라는 것이 굉장히 복종의 사회 아닙니까? 서강대학교 관구에서 총장님을 광주에 있는 대건 신학대학교의 총장으로 발령 내렸어요. 그래서 광주로 내려가셨죠. 저는 서울에 있고요. 요즘은 서울에서 광주가 별거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굉장히 먼 거리였어요.
주위에서 그렇게 얘기를 하고, 물리적으로 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 가만히 생각을 하다 보니까 이게 사랑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떻게 보면 거리가 우리 관계를 더 가깝게 했죠. 왜냐하면 밤낮 볼 때는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고 그랬는데 거리가 생겨서 편지를 쓰기 시작하니까 글에는 얼굴로 못하는 깊은 얘기가 나오잖아요. 더구나 그분은 날마다 일기 식으로 오늘은 뭘 했는지 날마다 편지를 썼기 때문에 오가는 편지에 사랑이 묻어나고 오히려 더 숙명적인 사랑이 되고....
그분의 얘기 중에 정말 가슴에 와 닿았던 얘기가 정말 자신의 영혼을 뒤져가면서 고민하던 끝에 나왔던 얘기 같아요. 자기가 신부를 뭐 이렇게 했는데 교회는 결국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의 사랑이 이렇게 진실인데 이것을 교회가 막으려고 할 수가 없을 거다, 그러니까 모두가 안 된다고 하지만 교회의 허락을 받는 길이 있을 거다, 교회의 허락을 받을 수 있다면 나와 결혼을 해주겠느냐....
▶ 몇 학년 때셨어요?
4학년 때요. 저는 그 편지를 받고 한 달을 고민했어요. 그 당시로 봐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분의 명예와 그분이 닦아온 길, 그런 것을 내 말 한마디에 그럴 수 있는가, 내가 잘하는 것인지 아닌지, 하나님 앞에 죄짓는 것은 아닌지, 정말 나름대로 엄청난 고민을 하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그 말씀이, 이게 진정한 사랑인데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이 마다할 수 있고, 이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느냐는 그 말씀에 저도 정말 이거다 싶어서 한 달 후에 그렇게 하겠다고 편지를 보냈죠. 그 편지 받으시는 날로 바로 사표를 내셨어요.
◇ 나이와 인종과 신분을 뛰어넘는 세기의 사랑(Out of sight, into the mind)▶ 제 가슴이 다 떨리네요. 그러나 엄청난 반대가 있었지요?
학교와 교회는 발칵 뒤집혔고, 그 당시에 그분의 명함이 꽤 컸어요.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에 큰 재앙이 되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급하니까 가톨릭성모병원 정신과에 일단 집어넣었죠. 이것은 정상적인 의사결정이 아니니 생각 좀 하면서 상담을 받아봐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동안에 출국준비를 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국적을 바꿔서 한국시민이셨거든요. 그래서 다시 미국으로 보내는 작업을 하느라 3주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오만가지 진정제니 약이니... 정말 멀쩡한 사람도 이상하게 되는 그런 기간을 갖고 미국으로 출국을 시켰죠.
▶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 한 번도 못 보셨어요?
저더러 가지 말라고 막았죠. 그 당시에 그분의 담당 의사가 저희 심리학 가르치셨던 교수님이셨기 때문에 저는 교수님께 정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의논하러 갔어요. 그분 대답이 ''''네가 어떻게 신자로서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식으로 그분이 헷갈려 하시니까 그분 눈앞에 띄지 말아라...''''였어요.
그러겠다고 하고 의사실에서 나오는데 이건 아니다 싶은 거예요. 의사로서의 역할이 아니고 천주교신자로서 나를 떼어놓는 역할밖에 한 것이 없으니 그분의 의견을 존중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면회사절도 무시하고 무조건 병실로 뛰어 들어갔죠.그랬더니 약을 너무 많이 복용시켜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저도 제대로 못 알아보시더라고요. 그렇게 뵙고 성모병원에서부터 집에 가는 동안 내내 울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때야 비로소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그리고는 3주 뒤에 학교에서 연락이 왔어요. 한 시간 내로 킬로렌 신부가 미국으로 떠나는데 잠깐 와서 뵈라는 거예요. 저는 떠나는 것도 몰랐지요. 당시 제가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가서 보니까 그냥 떠나보내려는 것을 가는 것에 복종할 테니 보고 가겠다고, 안 보면 못 떠난다고, 그날 아침까지 실랑이를 하고 겨우 승낙을 얻어낸 것이었어요.
떠나기 전에 뵙는데 뭐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때가 9월이고 4학년 2학기가 막 시작할 때였는데 가서 연락하시겠다고 하고 떠나셨어요.그렇게 떠나시고 학교에서는 저를 퇴학시킬 명분이 없으니까 너무 힘들지 않느냐며 학교를 그만두라고, 자진퇴학을 유도하고, 여러 가지로 학교에서 말들이 많았죠.
한번은 너무 괴로워서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오기가 발동해서 ''''내가 그만두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잘못한 것 없고 학교는 일단 시작한 것이니 끝마쳐야겠다.'''' 싶어서 끝까지 다녔죠. (웃음)
▶ 말씀이 그렇지 그때 다니실 때 심정이 어땠겠어요. 나중에 연락을 하셨어요?
신부직을 떠날 때까지는 교회에 복종 하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가자마자 한 달의 피정, 또 한 달의 피정이 이어졌어요. 피정이 끝날 때까지는 편지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편지도 못 하시고 저도 혹시라도 누가 될까 봐 안 했어요. 그리고 석 달 만에 편지가 왔어요. 신부직을 사직하겠다고 예수회에 얘기를 하겠다고... 이것이 얼마나 걸리고, 될지 안 될지도 모르지만 함께 기도하면서 해보자.... 그때 교황청에서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죠.
그리고 1년 만에 교황청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런 경우가 많지 않다고 해요.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저는 읽지는 못했는데 혼배성사라고 교회 안에서 결혼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었죠.
▶ 성당에서 결혼을 하셨어요?
네, 그 대신 이것을 사회에 알리지 말라고,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면 안 되니까 결혼할 때 혼배성사를 주되 외부초청과 가족초청은 허락을 안 했어요. 외국은 성당이 엄청 큰데 그 큰 성당에서 누가 들어올까 봐 문을 걸어 잠그고, 그 교회 수녀님 한 분과 신부님 두 분이 증인을 하는 가운데 저희 둘은 그렇게 결혼식을 했어요.
◇ 짧은 결혼생활과 긴 이별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과 존경▶ 몇 년을 함께 사셨어요?
18년이요.
▶ 후회는 안 해보셨어요?
후회는 안 했어요. 제가 86년에 혼자가 됐으니까 벌써 22년 됐는데 나이 차이가 난다는 것, 사별이라는 것이 정말 힘이 드는구나 알게 되었죠.
▶ 어떤 남편이셨어요?
저는 18년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정말 제가 제일 존경했던 분이에요. 또 부부간의 생활이라는 것이 그냥 로맨틱한 것이 아니라... 정말 노력하고 또, 서로가 배려하고 헌신하는 것이라는 것을... 정말 그분한테서 배웠어요.
▶ 따님만 둘이신데 엄마와 아빠의 그런 사랑을 알고 있나요?
큰애가 14살, 작은 애가 12살에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사회생활하면서 계속 언론을 접하니까 자기들이 언론에 익숙해져서 우리 애들은 언론과 관계되어 어디서 뭐가 왔다 하면 ''''엄마 우리 사진 필요해 안 필요해'''' 하고 물어봐요 (웃음) ''''안 필요하면 우리 나가고'''' 그러면서요.
▶ 둘 다 결혼했나요?
큰아이는 미국에 사는데 중국계 미국인과 결혼했고, 작은 아이는 프랑스사람과 결혼해서 스위스에서 살고 있어요.
▶ 엄마 따라서 대대로 국제결혼을 했네요. (웃음) 지금은 선생님 혼자 서울에서 독거여인으로 당당히 살아가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고 계시는데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이사님이시니까 많은 분들이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기독교계가 좀 도와주시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더군다나 우리가 도와주는 나라들이 굉장히 가난한 나라들이고 제가 알기로는 선교활동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는데 사실 생명 구하는 것보다 더 큰 선교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IVI(국제백신연구소)와 함께 하는 그런 것을 좀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