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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의 숨겨진 주역, 바리케이드 건너 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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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일반

    "6월 민주항쟁의 숨겨진 주역, 바리케이드 건너 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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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6월 항쟁 20주년 기념 특집 ''우리에게 6월은''
    <제 2부 - ''바리게이트 건너 편에선....''>


    6월항쟁

     

    1987년 영등포 구치소 안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조작됐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반대 편 안에서 남 모르게 민주화운동 편들기를 하고 있던 사람들, 은밀한 동조현상까지 다 담아내야 우리 민주화 운동의 제 모습이 드러난다"며, 그동안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바리케이드 건너 편 사람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부영 전 의장은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FM 98.1 Mhz, pm 7:05-9:00, 진행 : 명지대 신율 교수)이 6월 민주항쟁 20주년 특집으로 마련한 <우리에게 6월은 - 제 2부 ''바리케이드 건너편에선...''>에 출연해 유신 시대 유신 진영 내부에서 있었던 유신 헌법 개정 시도와 6월 민주항쟁에 대한 강경진압에 반대했던 5공 내부세력, 민주화인사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던 이종찬 씨 등 이른바 ''적진 내부에서'' 민주화운동을 은밀하게 지원했던 사람들과 평범한 시민들의 역할을 제대로 평가해야만 "한국민주화운동의 총체적인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이부영 전 의장은 7, 80년대에 위험을 무릅쓰고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해줬던 도계 흥국탄광의 박윤배, 이선휘 씨의 사례를 소개하며, "이 분들이 탄광업을 하면서 매달 민통련에 활동자금으로 300~500만원을 대줬다"고 회고했다. 이 전 의장은 "이런 분들이 지금도 어렵게 사시는데, 그런 분들에게 상장 하나 주는 사람이 없다"며 아쉬움을 나타내고 노령에도 불구하고 고영구 변호사를 대신해 감옥살이를 했던 이돈명 변호사와 이돈명 변호사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한겨울을 냉방에서" 지낸 고영구 변호사의 모습을 "가장 귀감어린 모습"이라며 감사를 전했다.

    한편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2년차 경찰기자로 시위현장을 취재했던 KDI 김동률 박사(전 경향신문 기자)는 6월 민주항쟁 당시 백골단에 쫓기던 대학생을 자신이 운전하던 버스에 태우고 승객들과 함께 끝내 그 학생을 보호했던 "33번 진화교통 버스를 운전했던 기사분의 공로를 고마워하고 싶다"며, 백골단의 포위에서 풀려난 버스가 광교 위 고가차도를 올라갈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면서 우는 것"을 목격했던 "그 감격이 지금도 뚜렷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동률 박사는 또 6월 27일 시위군중이 광화문 사거리에 집결했을 때 "당시 이순신 장군 동상의 경찰 바리케이드가 넘어지면 발포를 하게 돼 있었다"며,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경찰출입기자들이 경찰 간부들을 설득했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신율 (명지대 교수/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 출연 : 이부영 전 의장 (87년 당시 영등포 구치소 수감) / 소설가 서해성 (87년 당시 국본 활동) / KDI 김동률 박사 (87년 당시 경향신문 기자)


    - 2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상황을 돌이켜본다면?

    이부영 전 의원> 지난 20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독재세력이 체육관에서 자기들 맘대로 주물렀던 대통령을 이제는 국민이 직접 뽑을 수 있게 됐다. 또 대통령이나 집권자들이 못마땅해도 아무 말 못했던 국민들이 이제는 어떤 주장을 해도 괜찮은 세상이 됐다. 요즘 민주화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됐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이 그런 주장을 해도 아무 탈 없이 지낼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민주화 덕이라는 것을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김동률 박사> 나는 6월을 생각하면 늘 조바심이나 안타까움이 솟는다. 오늘날 대학생들이 6.10 민주항쟁을 잘 모르는 데 대해 안타까움이 있고, 그런 면에서 늘 다음 세대에 뭔가를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다. 6월이 되면 방독면이나 눈물, 재채기, 죽음, 좌절, 우울, 체념, 환희, 그리고 최근 들어 실망 등의 단어가 떠오른다.

    서해성 교수> 6월항쟁이 없었으면 오늘 우리가 없었다. 6월항쟁은 단군 이래 한반도의 모슨 사람들이 악을 향해 싸웠던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걸 컨텐츠로 만들어서 후대들이 평소에도 늘 즐길 수 있게끔 하는 데 소홀했다. 사실 그런 일을 하고 싶었지만 역량이 닿지 못한 부분도 있었고 지원이 받지 못한 부분도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후배들과 간극이 벌어진 것 아닌가 싶다. 이런 게 지금 세대들이 6월항쟁을 마치 과거 얘기처럼 듣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사실 6월이 오면 죄스러운 마음이 더 많이 든다.

    - 요즘 학생들은 4.19나 6월항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서해성 교수> 그때만 해도 3.15 부정선거나 4.19 혁명 같은 것들은 당시 독재 치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민주화가 된 지금 더 거룩해야 그것이 오히려 빛이 바라고 있다. 그래서 더욱 6월항쟁의 가치를 콘텐츠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을 중심으로 놓고 보는 게 아닌지. 바리게이트 건너편에 있었던 사람들의 진실도 아우르는 6월항쟁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를 밝혔던 당시 상황에 대해 말해 달라.

    이부영 전 의원> 내가 87년에 영등포 교도소에 격리된 사동에 갇혀있었는데, 1월 17일 새벽에 그곳으로 고문경찰관 두 명이 왔다. 그런데 이들은 처음부터 행동이 이상했다. 한 사람은 계속 찬송가를 부르고, 다른 한 사람은 계속 울부짖으면서 가족들이 면회 오면 자기들은 주범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공수사단 상사들이 이들을 찾아와서는 ''입 다물고 우리가 시킨 대로 하라, 1억 원짜리 입금된 통장을 두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가족들 걱정 마라, 빨리 재판을 진행시켜서 조기에 석방시켜주겠다, 만약 각본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가족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고 너희들이 석방되더라도 이 나라 안에서 살 생각 말아라''라고 회유와 협박을 했다. 그 사람들이 가고 나면 나에게 그 정보가 다 취합됐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억울하고 사건이 조작이 됐다면 이 사실을 검찰에 재조사하도록 요구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이 요구해서 검찰이 수사를 나왔는데, 검사는 ''당신들 신상에 이롭지 않을 테니 그냥 접어두라''면서 계속 이 사람들을 회유했다. 이런 일까지 내가 다 밖으로 알렸다.

    당시 두 경찰관을 면회시키는 교도관들이나, 검사들이 이 사람들을 만날 때 입회하는 간부들이나, 대공수사단 사람들이 와서 만났을 때 입회하는 교도관 간부들은 다들 나와 막역한 관계였다. 그 팀들은 각각 하는 일만 알고 있지만 정보 취합은 다 나에게 됐다. 이렇게 되니까 불안을 느낀 정부 당국에서 이 사람들을 그냥 놔두지 못하고 의정부 교도소로 이감 보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나에게 필요한 정보가 넘어와서 한재동 씨를 통해 전병용 씨를 거쳐서 김정남 씨에게 전달돼있었다. 나는 사실 그게 폭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잘못돼서 역추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꼼짝없이 감옥 안에 갇혀서 당하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도 있었다.

    - 당시 어떻게 교도관들과 막역하게 지낼 수 있었나?

    이부영 전 의원> 서울구치소 등 몇몇 군데에 있는 교도관들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유신체제를 거치면서 수많은 정치범들을 겪어봤다. 나만 해도 다섯 번이나 구치소를 들락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우리 처지를 잘 이해하고 동지가 됐다. 그리고 우리가 나오면 같이 산에 가거나 소주를 마시면서 고민도 털어놓고, 그 사람들 가족이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같이 해결해주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도 그런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그분들이 거의 퇴직했지만 지금도 인생의 친구가 돼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밝혀내는 데에는 여러 사람의 용기가 필요했는데?

    김동률 박사> 엘리베이터에서 주고받은 사소한 한 마디가 폭로됐었다. 당시 참 힘들었다. 이재오 의원의 경우 당시 민중민주연합 대표를 했는데, 한 장짜리 성명서를 써오면 그것을 지면에 소화할 땐 1단으로 갔다. 그런데 1단에 500~600자를 30자로 압축해서 넣어야만 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단순히 기사를 전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이것을 압축해서 전해야 하느냐,라는 고충이 있었다.

    언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언론이 조롱받는 점도 있었지만 나처럼 20대의 소장기자들은 대게 돈을 받지 않고 그렇게 했었다. 최근 한국정치학회의 6.10 민주항쟁 기념 세미나에서 민주화를 가져온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료를 보면 역시 언론이 압도적으로 1위다. 우리의 기대치가 높아서 언론에 실망하고 있지만 당시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은 선후배나 동료 기자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절대다수 민중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소식 전달의 역할은 정의감에 불타는 기자들이 했을 것이고, 그들도 이부영 의원이나 그런 교도관들 못지않게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서해성 교수> 당시 언론에 있던 분들은 두 가지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와 만났을 때는 이해를 하지만 막상 데스크 앞에 들어가면 느끼는 좌절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상황에서는 언론에 전적으로 의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우리가 유인물을 인쇄하는 일 자체도 큰일이었다. 언론이 그렇게 나오기 시작했던 것은 5월부터였고, 그전에는 주로 유인물에 더 의존했던 말 그대로 찌라시의 시대였다.

    - 전직 교도관 전병용 씨는 어떤 분인가?

    이부영 전 의원> 교도소 안 교도관들의 민주화 운동에서 가장 중심인물이다. 60년대 후반부터 이런 문제에 대해 계속 우리와 관계를 갖고 활동했었다. 전병용 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1976년에 김지하 씨 양심선언을 밖으로 운반한 것이다. 양심선언이 운반돼서 김지하 씨가 살아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죽이려고 했으니까. 김지하 씨의 양심선언이 어떻게 운반됐는지에 대해서는 김정남 씨의 <진실, 광장에 서다>라는 책이나 김지하 시인의 회고록 <흰 그늘의 길>에 잘 나와 있다. 얼마나 정교하게 계획돼서 운반됐으며, 그것이 외국에 나가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이런 일뿐 아니라 전병용 씨 자신이 양심수 장기표 씨를 집에 숨겨놨다가 범인은닉혐의로 잡혀서 ''자기는 자기 할 일을 했을 따름''이라고 당당히 주장해서 징역도 살았다. 참 일을 많이 한 사람이다. 요즘도 우리는 자주 만나는 평생 친구가 됐다.

    - 사건의 진실이 폭로되는 과정에서도 기여한 부분이 있나?

    이부영 전 의원> 김정남 씨도 수배 중이었으니까 내가 김정남 씨에게 전달을 하려고 해도 알 길이 없었다. 당시 나는 민통련 활동자금을 민통련 사람들에게 전해줘야 했기 때문에 김정남 씨를 만나다가 붙잡혔고, 김정남 씨는 도망갔다. 그러니까 김정남 씨와 전병용 씨가 연결되니까 자연히 한재동 씨는 전병용 씨를 찾아서 메모를 전달해줬고, 전병용 씨는 김정남 씨에게 전해줬다. 그런데 메모 두 통을 한꺼번에 받아서 전병용 씨가 김정남 씨가 전해준 뒤 이틀 만에 잡혔다. 그 메모를 주머니 속에 넣고 있다가 잡혔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이 사건도 묻혔을 거고, 나도 줄경을 치지 않았을까.

    - 학생운동이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전두환 정권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해 달라.

    김동률 박사> 당시 나는 사건기자로 연세대를 주력했었는데, 군인들이 휴가 나와서 양심선언을 하고는 연세대 학생회관에서 떨어져서 투신자살하는 등 굉장했었다. 그런데 내가 놀랐던 건 취재기자나 경찰들도 다 그렇진 않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한편이 된 경우가 왕왕 있었다. 6월 7일에 군중 50만 명이 시청에 모여서 시위를 하면서 교보 앞 이순신 장군 동상 앞까지 갔었는데, 당시 이순신 장군 동상의 경찰 바리케이드가 넘어지면 발포를 하게 돼있었다. 세종문화회관이 넘어지면 효자동으로 가서 청와대로 넘어가기 때문에 발포하게 돼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찰청장, 당시로는 치안본부장인 조종석 씨가 우리에게 와서는 상황이 심각하다고 했다. 그래서 경찰 출입 기자들이 시경 간부들과 경부들을 다 불러서 ''발포하면 이 나라는 끝장이다, 이러면 안 된다, 비록 군부의 명을 받고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벌고 설득을 해서 해산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이미 경찰이 밀릴 때였다. 그런 와중에서 취재기자들이 보이지 않게 경찰간부들과 연합이 형성돼있었던 것이다. 결국 2시에 최루탄을 쏨으로서 해산됐다.

    그런 경우를 보면서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을 이끄는 건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 비록 경찰의 제목을 입은 사람들이나 안기부 등 여러 조직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보이지 않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 6월 민주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보이지 않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부영 전 의원> 민주화운동의 총체적인 모습이 어떤 것이냐를 생각해본다.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들만의 민주화운동은 아니라고 본다. 드러난 부분과 독재진영이라고 생각했던 반대편 안에서 민주화운동 편들기를 하고 있던 사람들, 은밀한 동조현상까지 다 담아내야 우리 민주화운동의 제 모습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사람 중심으로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만 정리하고 있는데, 그것이나마 하는 건 다행이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예를 들어 유신시대 때 유신진영 내부에서 유신헌법 개정 시도가 있었다. 김재규 씨 같은 분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5공 전두환 시대 말기에 제2광주학살이라도 저지르겠다는 강경파들의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저지하려고 노력했던 5공 내부세력의 노력이 있었다. 6월항쟁을 계엄령으로 짓밟고 군을 동원해서 박살내려고 했던 것을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집권세력 스스로 ''이렇게 하면 집권세력이 무너진다''라는 조바심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나라가 끝장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집권세력 내부에도 있었다. 이를테면 민주화운동의 핵심인사들 가운데 정말 고문으로 죽을 지경이 된 사람들에 대한 계획을 집권세력에서 하고 있는데, 이종찬 씨 같은 분은 70~80년대에 집권세력에 속해있었지만 이걸 미리 알려서 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호영 씨가 마지막 순간에 계엄령을 막기 위해 애쓴 것도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했느냐''고 물어봐야 한다.

    김재규 씨가 1976년에 정보부장이 된 다음에 제일 먼저 나타난 현상은 긴급조치9호 등으로 붙잡혀 들어간 사람들의 형량이 대폭 낮아졌다는 것이다. 1~2년, 길어봐야 3년으로 낮아졌고, 수감자들을 계속 줄여나갔다. 이런 걸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나는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걸 체감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나와서 얘기를 들으니까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와서 자기의 고통스러운 심경을 여러 차례 고백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 세력 내부에서 20~30만 명을 탱크로 깔아 엎어서 분쇄해버릴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김재규 씨가 이걸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이 10.26 거사록에 나타난 것 아니냐고 내 나름대로 추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도 연구가 안 되고 있다. 민주화운동에 나선 사람들만의 운동이 아니라 전 국민의 운동, 심지어 독재세력 내부에서도 민주화를 지향했던 사람들의 모습까지 담아내야 한국 민주화운동의 총체적인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서해성 교수>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깊게 기록하지 못했고 폭도 넓지 못했다. 내가 6월항쟁을 중심으로 한 인터뷰 다큐멘터리를 만든 적이 있는데, 그때의 관점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6월항쟁을 젊은 세대들에게 기억하게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부영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런 것들을 기록하고자 했지만 많이 부족했다. 6월항쟁 당시 많은 전경들이 강제로 가기도 하고, 군대를 덜 고통스럽게 가기 위해 전투경찰로 가기도 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전투경찰들이 대학을 다니다가 갔고,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시위 진압에 나오게 됐다. 그 6월항쟁 즈음에 전경들의 최루탄 발사 기계에 꽃을 꽂아주는 일이 시작됐는데, 나는 그때 어떤 전경이 방독면 안으로 울고 있는 걸 봤다.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일치해서 느끼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은 최루탄을 정면에 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많은 최루탄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걸 겪었다. 그런 일반 소시민의 참여도 굉장히 많았다.

    김동률 박사> 당시 청계천에 33번 진화교통 버스가 있었는데, 한 대학생이 시위를 하다가 33번 버스로 도망을 갔다. 그래서 시경 백골단이 그 대학생을 끌어내려고 하는데, 거기 탔던 운전기사와 승객 20여명이 창문을 닫고 열어주질 않는 것이다. 6월이라 굉장히 더웠는데도 창문을 닫고 열어주질 않았다. 전경들이 포위하고 시민들과 대치하는 상황이었는데, 시민들은 아무래도 힘이 없지 않나. 근데 내가 당시 보도완장을 달고 가까이 가니까 경찰 입장에선 곤란하지 않겠나. 게다가 다른 기자들까지 모이니까 결국 시경의 높은 경무관이 와서 자초지종을 듣고는 고민하더니 그 대학생을 보내주더라. 그 버스가 광교 위 고가차도를 올라갈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면서 울었다. 대학생 한 명을 시민들이 구했다는 것이다. 그 감격은 지금도 뚜렷하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운전기사가 치안본부에 끌려가서 엄청 맞았다고 한다. 그날 33번 버스를 운전했던 기사분의 공로를 고마워하고 싶다.

    이부영 전 의원> 내가 80년대 초에 민민협이나 민통련 운동을 했는데, 누가 우리에게 돈을 대줬겠나. 그래서 거의 굶으면서 일을 했는데,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에 탄광업을 하던 도계 흥국탄광의 박윤배 씨, 이선휘 씨 같은 분들이 매달 민통련에 활동자금으로 300~500만원을 대줬다. 20년 전이니까 지금 돈으로는 3000만원 가까이 되는 활동자금을 비밀리에 운반했다. 그 돈으로 유인물도 만들고, 간사들 지방출장이나 연락도 다니고, 도피자들 도피자금으로도 줬다. 이런 분들은 지금도 어렵게 사시는데, 이런 분들에게 상장 하나 주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내가 5.3 인천항쟁 배후조종을 했다고 수배 받아서 고영구 변호사 댁에 숨어있었다. 그런데 당시 고영구 변호사는 80세가 넘은 노모를 모시고 있었고, 부인도 몹시 아팠기 때문에 만약 내가 잡혀서 고영구 변호사가 구속되면 이 집안이 풍비박산 나니까 좀 안전한 분의 집에 숨어있다고 얘기해서 고영구 변호사를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돈명 변호사가 당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이었으니까 그 집에 숨어있었다고 해도 고령인 이돈명 변호사를 구속이야 하겠나, 조사 정도 해주고 말겠지, 싶어서 내가 붙잡혔 때 이돈명 변호사 집에 숨어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노인을 덜컥 구속해버린 것이다. 내가 징역살이를 여러 번 했지만 그해 겨울은 너무 고통스러운 징역살이였다. 고영구 변호사는 그 고통스러움 때문에 한겨울 내내 불을 때지 않고 냉방에서 잤다고 한다. 지금 이돈명 변호사가 80세 중반이 넘으셨는데, 그때 생각을 하면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서해성 교수> 당시 연로하셨던 분들 중에서 보여줬던 가장 귀감어린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돈명 선생님이 몸이 좋지 않으신데 꼭 일어나시길 바란다.

    - 그 시절의 정신이 지금 제대로 투영됐다고 보나?

    이부영 전 의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핍박과 배제를 당하고 살아서 상대방은 옳지 않고 나는 옳다는 독선과 이분법적 사고에 젖어있다. 또한 산업화 세력은 자신들이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이룩해냈고, 민주화운동 세력은 이를 방해한 불순한 세력이라는 냉전적 배타적 사고에 젖어있었다. 그런데 40년 이상의 세월을 뒤돌아보면 결국 민주화와 산업화가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전 세계에서 우리만큼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는 유래가 없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배치된 게 아니라 상호보완이고, 앞으로 함께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갈 미래의 중요한 경험과 가치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관용의 정신이 필요하다.

    김동률 박사> 최근 들어 민주화세력에 대해 실망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지금처럼 실망이 큰 만큼 똑같이 비례해서 희망 또한 크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앓고 있는 실망과 좌절은 우리나라를 보다 완벽한 민주주의로 가는 통과의례적인 성장통이라고 생각한다.

    서해성 교수> 기본적으로 민주화운동은 독립운동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양심과 억압자에 대항해서 싸우는 건 언제든 유효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은 끝난 게 아니라 그 가치는 계속 지속되는 것이다. 가령 오늘날 양극화 문제나 인권침해 문제가 있다면 그런 것들과 끝없이 싸우는 정신이야말로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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