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일
전 국민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우리는 흔히 국민가요라 부른다. 1970년대 후반 서울 강남의 개발과 함께 막 아파트가 각광받기 시작한 시기였다. 1982년에 나온 노래, 아파트는 지금처럼 아파트가 도시의 숲을 이룬 때도 아니었을 때 나온 노래이다.
가수 윤수일은 장발 단속과 대마초 파동 등으로 그룹사운드가 급격히 와해되던 77년도에 등장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이후 ''''사랑만은 않겠어요''''라는 노래로 데뷔했고 10여년 동안 정상급 인기가수로 군림했다.
록이면 록, 트로트면 트로트, 댄스면 댄스..작사에 작곡까지.. 그 모든 분야를 소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수 중 가수였다. 1980년대 윤수일은 검은 선글라스에 가죽옷을 걸친 채 마이크 대를 잡고 다리를 흔들며 노래하는 이미지로 지금도 팬들에게 강열하게 남아 있다.
지난해 21번째 앨범 ''''숲바다 섬마을''''을 들고 다시 활동을 시작해올해는 윤수일 청춘일기 전국투어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는 가수 윤수일 씨를 5월 25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다.
[BestNocut_R]
◇ 군데군데 터져 나오는 ''''오빠''''함성, 놓치지 않는 센스!▶ ''윤수일 청춘일기 전국투어''중이시죠? 많이 바쁘실 텐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나 도셨나요?
반쯤 돌았는데 지난 12일에 거제공연을 마지막으로 계속 진행 중에 있습니다.
▶ 관객들의 반응이 어떤 가요?
좋아요. (웃음) 사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제가 노래를 시작한 지 30년이 넘고 이런저런 노래로 20여장의 앨범을 내다 보니 빠른 곡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고, 발라드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고... 이렇게 되다 보니까 공연을 하면서 다양한 팬 여러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셔서 참 감사를 드려요.
▶ 노래라는 것이 참 좋은 것이 팬도 그 노래, 그 가수와 함께 나이를 들어가잖아요. 그러니까 그 가수를 보면 내 옛날 생각이 나고 추억이 떠오르고 그러다 보니 늘 같이 가고 그 팬도 영원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이번에도 그런 팬들 많이 만나보셨죠?
아무래도 처녀시절, 더 앞으로 돌아가면 학창시절에 저를 관심 있게 보셨던 분들이 이제는 그야말로 불혹의 나이를 다 넘기고 자녀들도 다 성장시키고 심적인 여유가 좀 생겼다고 할까요... 그래서 공연장을 많이 찾으시는 것 같아요.
▶ 여전히 ''오빠~, 오빠~'' 그러나요? (웃음)
오빠 소리가 군데군데 나오는데 제가 또 그걸 절대 안 놓칩니다. (웃음)
▶ 옛날에 윤수일 씨를 속으로 짝사랑했던 분들이 꽤 많이 있었을 걸요? 얼마나 잘생기고 멋집니까. 노래는 또 얼마나 잘하고요. 혹시 요즘 와서 옛날에 윤수일 오빠 짝사랑했다고 고백하는 분들은 없나요?
가끔 홈페이지에 댓글도 올려주시고 카페에 그런 글들을 올려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도 잠시나마 그 글들을 보면서 옛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 배우도 마찬가지지만 가수는 그런 박수를 먹고사는 직업 아닙니까?
그럼요. (웃음)
◇ 오빠부대의 해결사는 어머니 ''''날래 가라우''''▶ 혹시 그 많은 팬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팬이 있다면 이야기해줄 수 있으세요?
''사랑만은 않겠어요.'' 라는 곡이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여학생 팬들이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아예 신문지를 깔고 제 얼굴 보고 간다고 집에 가지도 않고 ''윤수일 나와라!''... 그래서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했지요.
▶ 그럴 때는 어떻게 하세요?
제 모친이 해결사세요. (웃음) 어머님이 나가셔서 설득을 하시지요. 이북 분이시라 카리스마가 있으셔서 처음에는 잘 달래다가 ''돌아 가라우~''하시면 다들 도망가곤 했죠.
▶ 해외공연도 많이 다니셨죠?
데뷔 이래로 일 년에 한두 번씩 정기공연을 했었고 이번에도 계획을 했었는데 버지니아 공대 사건도 생기고 해서 일정을 관망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 가지로 교포사회가 충격 속에 있는데 무리하게 공연일정을 잡는 것보다는 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 지난해 3월에 한강 유람선 공연을 하셨는데 어떻게 유람선을 생각하셨어요?
신곡 발표회를 가졌는데 제가 평소에 강, 바다를 선호하다보니 딱딱한 장소보다는 오랜만에 선뵈는 자리라서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었어요. 의외로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정말 뜻 깊고 감사한 자리였죠.
▶ 굉장히 로맨틱하고 낭만적이었을 것 같은데 타이틀곡이 ''''숲바다 섬마을'''' 이예요. 콘셉트가 뭔가요?
제목 그 자체죠. 숲과 바다, 섬과 마을이라는 콘셉트인데 그동안 제가 물론 ''''사랑만은 않겠어요.''''는 예외지만 ''''아파트'''', ''''제2의 고향'''', ''''황홀한 고백'''', ''''도시의 이별''''처럼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이별과 눈물과 정서를 많이 담아서 노래를 작곡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변하는 것 같아요. 제 마음도 그렇고 제 삶도 조금씩 변하고 또 시대적으로도 물론 지금도 아파트는 방송이나 매스컴에서 화두가 되지만 이제는 아파트를 하나 지어도 주위 환경을 생각하는 아파트를 짓잖아요. 그래서 친환경적이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하는 그런 희망적인 생각들을 하시는 걸로 생각했고 사실 제 자신도 전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아파트가 아닌 바닷가 통나무집에 살아 ▶ 아파트에 안 사세요? (웃음)
강화도 건너편에 있는 대곶이라는 바닷가에 살고 있습니다. 김포인데 공항도 가깝고 기동력도 있겠다 싶어서 2000년도부터 통나무로 집을 만들기 시작해서 살고 있죠.
▶ 마당도 있고 바다도 있고... 그래서 그런 노래가 나왔나보네요.
제 자신에 변화도 있고 해서 그런지 음악적인 성향도 콘크리트 문화에서 숲과 바다를 노래하는 목가적인 분위기로 변하는 것 같아요.
▶ 연륜을 따라서 변하는 것도 참 필요할 것 같아요. 유람선 공연에 많은 분들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어떠셨나요?
7년이라는 음악적 공백이 있었는데도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축하해주시고 격려해 주셨어요. 그 사이에는 사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그것에 시간을 많이 뺏겼고 그러다가 음반을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이 드니까 한 3년이 걸리더라고요. 친구들이 오래간만에 나오니까 힘을 보태줘야겠다고 아나운서 왕종근 친구를 비롯해서 테너 임웅균 친구, 강지원 변호사 내외분도 오시고... 다들 30년 지기인데 참 감사하죠.
▶ 이건 여담인데, 임웅균 선생님은 얼마나 성량이 풍부한지 엔지니어가 녹음을 하는데 기계가 끝까지 올라간다고 그렇게 목소리 큰 분은 처음 봤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워낙 목소리가 커서 자기는 십만 대군을 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로 다스린다고 하는데 제가 요즘은 목소리 큰 것보다는 마이크 시스템이 잘되어있다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웃음)
▶ 오랜만에 준비하려면 떨리지 않으세요?
많이 설레지요. 솔직히 제 음악이 이제는 낙후된 음악이 아닐까 걱정도 되요. 음악도 잠깐만 한눈팔면 굉장히 낙후하고 고루해져요. 특히 제가 가사도 쓰고 작곡도 하는데 작곡기법이라든가 가사의 내용 같은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다든가 고루해지기 쉬워서 우리가 흘러간 가수라는 소리를 듣잖아요. 웬만한 가수 분들이 그런 소리를 듣는데 그래도 몇몇 분들은 그걸 뛰어넘기도 하죠. 손 선생님 처럼요. (웃음) 항상 예술에 첨단의 앞서가는 것들을 창출해 내는 것이 저의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연기도 그렇지만 노래도 몇 년 쉬다가 나오면 확실히 감이 떨어지잖아요.
저희들은 음을 다루기 때문에 음에 대한 예리한 판단력이나 감성이 낙후되지 않으려면 매일 연습하는 수밖에는 없어요.
◇ 한강 유람선에 퍼지는 도시의 아리아▶ 그 빛나는 가수가 왜 노래를 안 하고 사업을 했어요? 제 생각에는 잘 안될 것 같아요. 이쪽 계통의 사람들은 사업 감성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웃음)
관리능력에 문제가 있지요. 저도 요번에 뼈저리게 느꼈죠. 제가 데뷔를 하고 뮤직스쿨과 후배양성, 레코드 회사를 병행해오다가 IT관련해서 친구의 소개로 회사를 인수한 것이 불찰이었어요. 겁도 없이 인수해서 그 회사가 갑자기 커지니까 같이 병행하려던 틀이 무너지는 거예요. 한쪽이 커지니까 그것을 관리해야하고 그러다 보니까 거기에 시간을 뺏기게 되는 거죠. 결국 이래서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서 정리를 했지요.
▶ 그래서 다시 돌아오셨는데 노래를 만들려고 한 2, 3년 간 칩거하셨죠?
작곡이라는 것은 평소에 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오늘 하자고 해서 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모든 작곡가 분들의 공통점이겠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다가 번뜩이는 영감을 메모해 두었다가 또, 차를 타고 가다가 메모해서 그것을 다시 꺼내 편곡하면서 거의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죠. 그리고 저의 30년 지기인 윤수일 밴드를 불러서 같이 의논하고 사운드를 만들고 그랬습니다.
▶ 작업하는데 외롭지는 않으셨어요? 뭔가 뒤처진 것 같고... 예술가들은 좀 예민하잖아요.
고독과의 싸움이라고 하죠. 그런 기간이 없으면 뭔가가 나올 수가 없으니까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의식적으로 저를 고독하게 만들 필요도 있고요.
▶ 그것이 작품을 위한 진통인데 잘못 견디면 정말 어려워지지만 이렇게 잘 견뎌서 다시 나오신 것 아닙니까. 그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멋지고, 잘생기셨고, 옛날 모습 그대로 세요. 운동은 따로 하시나요?
열심히 합니다. 조깅을 참 좋아해서 30년 이상을 매일 하는 편입니다. 친구들과 가끔 골프도 즐기고요.
▶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날려야 할 것 같아요. 가수도 사실은 육체노동 아닙니까?
제일 신경 쓰는 부분이 폐활량이에요. 유산소운동이 가수에게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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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가요는 시대를 대변하는 거울▶ 소리를 7년 만에 내보시니까 옛날하고는 다른, 어떤 변화들이 있던가요?
많이 흔들려요. 연극도 오래 쉬면 대사부분에서 그 감정과 톤의 고조가 잘 안 나오는 것처럼 저희들도 음이라는 예민한 부분을 다루기 때문에 흔들려요. 호흡도 그렇고요.또, 저희들 노래도 이상한 버릇이 생깁니다. 자신의 노래를 계속 녹음해서 되짚어보지 않으면 거울을 보면서 빗질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헝클어지듯이 노래도 그렇게 되요. 이상한 버릇이 독버섯처럼 자라나는데 그걸 삭제하는 연습을 해야 하죠.
▶ 연극이야 연출가가 있어서 어느 정도 그런 것이 되지만 가수는 혼자서 해야 하니까 참 힘들겠어요.
그룹들과 함께 하는 이유가 그런데 있습니다. 여럿이 함께 하면 불편한 점은 있지만 서로가 협력하면서 뭐가 문제인지 찾을 수 있거든요. 저의 거울이 그 친구들이에요. 가사는 시인 친구 몇 분에게 조언을 많이 받아요. 대중가요지만 너무 낙후된 표현이나 저급한 말은 쓰지 말아야하니까요.
▶ ''''아파트''''라는 노래를 82년에 직접 작곡하셨는데 그 당시는 아파트가 대중화되지도 않았을 때 아닙니까. 어떻게 ''''아파트''''라는 노래를 생각하셨나요?
막 붐이 일어날 때라고 봐지네요. 동부이촌동에 아파트에 막 생기기 시작해서 그곳에 살면서 지금 시대적으로 화두가 되는 것이 뭔가를 생각했고 대중가요가 시대를 대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 화두가 되고 있는 ''''아파트''''를 가지고 노래를 하나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외국공연을 다니는데, 사실 외국에는 아파트들을 참 아름답게 지어요. 강변에, 숲 속에,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는... 그런 아파트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와서 아파트 짓는 것을 보면 사실은 좀 삭막하죠.
그래서 아름다운 아파트에 대한 생각이 집약되면서 그 내용 자체는 러브스토리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친구의 러브스토리가 아주 서글프더라고요. 군대 갔던 친구가 휴가를 나와서 애인이 사는 아파트의 벨을 눌렀는데 소리 소문 없이 온 가족이 이민을 떠나버렸다는 겁니다. 자기한테는 속상할까봐 말도 못하고 그냥 떠나버린 그런 이야기와 하소연을 듣고 바로 이거다 싶었죠. 바로 만들었는데 10분도 안 걸렸어요. 번뜩이는 것이 생기면 금방 이루어지잖아요.
▶ 윤수일 씨의 ''''아파트''''는 외국을 상상해서 그런지 정말 별빛이 흐르고 그렇게 아름다운데 사실 우리나라 아파트는 그런 풍경은 아니잖아요.
우리나라 아파트도 좀 그렇게 지었으면 하는 희망을 담았지요.
▶ 그야말로 ''''아파트''''가 히트를 쳤는데 선견지명이 있어서 아파트에 투자를 했다면 어땠을까요? (웃음)
그냥 노래로 만족합니다. (웃음)
◇ 비틀즈와 버클리 교재들로 쌓은 기본기▶ 작곡공부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중학교 때부터 기타를 만지기 시작했는데 서울에 상경해서 그룹 활동을 시작해보니 제 실력이 너무 보잘것없다고 느껴졌어요. 그 당시만 해도 신중현 선생님이 이끄는 이런 그룹의 분위기가 ''''산타나''''라든가 외국의 유명한 그룹들의 음악을 버금가게 연주도 하고, 그룹 ''''키보이스''''라든가 ''''히식스''''라든가, 노래도 ''''해변으로 가요''''라든가 좋은 곡들이 많았잖아요. 그런 곡들을 하는 수준인데 제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유학 갈 여건은 안 되니까 친구들을 동원해서 버클리에 있는 교재들을 수소문해서 보내달라고 했죠. 그것으로 공부했던 것이 지금까지 작곡을 무난히 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아파트''''가 노래방 애창곡 1위라는 것은 아시죠? 노래방가면 꼭 그 노래를 듣게 되고 나중에는 합창으로 끝내더라고요. 그렇다보면 저작권료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요? (웃음)
저작권 제도가 저희들로서는 너무 감사한 제도죠. 퇴직금도 안 나오는데... (웃음)
▶ 그런데 가수들에게는 안 나온다면서요?
이제는 그런 제도도 생길 예정이라고 합니다.
▶ 가수들은 참 좋겠어요. (웃음) 가끔 노래방도 가시나요?
가끔 갑니다.
▶ 가시면 이 노래도 하세요?
그럼요. 사실 저는 너무 많이 불러서 부르기 싫지만 같이 간 동료들을 위해 팬서비스 차원에서 부릅니다.
▶ 점수는 몇 점정도 나오세요?
노래방 기계는 고함도 치고 그러면서 불러야 점수가 나오는데 곧이 곧대로 부르기 때문에 점수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잘 나와야 80점, 85점 그렇습니다. (웃음)
▶ 같이 간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겠어요. (웃음)
웃죠. 자기들이 부르면 100점이 나오니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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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울산의 모교에선 ''''아파트''''가 제2의 교가
▶ 제가 지난번에 윤수일씨의 고향인 울산에 공연을 갔더니 학성고등학교 학생들은 재학생이건, 졸업생이건, 동창생이건, 모두 다 모임이 끝나면 마지막 노래가 ''''아파트''''래요. (웃음) 그 이야기 듣고 한참을 웃었는데 혹시 알고 계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동기생들이 ''''아파트''''가 제2의 교가라고 이야기해주더라고요. 정말 너무너무 감사하죠.
▶ 가수를 모셨으니 노래를 한 곡 들어봐야지요. 이번에 새로나 온 ''''숲바다 섬마을'''' 부탁합니다.
파도 소리 들려오네 아련하게 밀려오네 노래 소리 들려오네 철새들의 노래 소리섬 너머 노을이 붉게 물들면 기러기떼 울며 가고두 손에 닿을 듯 한 별들을 따서그대에게 드릴 꺼야 숲바다 섬마을 살고 싶네 숲바다 섬마을 가고 싶네
봄이 오면 꽃 피고 여름이면 초록 바다가을이면 잎새 지고 겨울이면 하얀 나라수정 같이 해맑은 바람 불어와 들꽃 향기 날리우고정 들지 못하는 도시를 떠나 그대와 살고 싶어숲바다 섬마을 살고 싶네 숲바다 섬마을 가고 싶네
숲바다 섬마을에 밤이 깊으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이 밤이 새도록 그대와 함께 사랑을 태울 꺼야 숲바다 섬마을 살고 싶네 숲바다 섬마을 가고 싶네
▶ 전 노래는 잘 모르지만 굉장히 신나네요.
비트가 있다고 하고 음악적 용어로는 그루부(groove)가 있다고 합니다.
▶ 그렇게 따지면 이 곡은 어떤 장르에 속하는 겁니까?
코리안 팝이라고 할 수 있어요.
▶ 그러면 트로트 곡은 어떤 건가요?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트로트 곡이죠.
◇ 구석에 슬쩍 밀어 넣었던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대박행진으로 이어져▶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첫 곡이었는데 히트를 친 거네요. 첫 곡이 히트 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데 그때가 언제였죠? 그때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77년도입니다. 그 당시는 그룹음악이 가장 꽃을 많이 피운 전성시대라 요즘 1년에 한 번 하는 각 방송국의 가요제 같은 것이 없었고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라는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당시 제일 수준 있고 훌륭한 연주를 하고 명성이 있었던 히바이브, 히식스, 검은나비 등등의 유명했던 분들이 대거 출전하는 그런 대회에서 제가 골든 그레이브스(Golden Grapes)라는 그룹의 제일 막내로 출전을 해서 좋은 성적을 거뒀죠.
그것을 기회로 그 당시 작곡가였던 안치행 선생님이 저를 잘 보셔서 앨범제의를 하셨어요. 그분도 ''''등불''''로 유명한 ''''영사운드''''라는 그룹의 리더였는데 ''''사랑만은 않겠어요.''''라는 걸쭉한 곡을 써서 저에게 권하시더라고요. 그때는 제 음악적 성향이 비틀즈의Yesterday나 Let it be를 연주하고 노래하던 시절인데 ''이렇게도 사랑이 괴로운 줄 알았다면..''''.하는 트로트 곡을 주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생각하고 음반을 하나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열 곡 정도가 들어가는데 9곡이 제가 좋아하고 제 친구들인 골든 그레이브스(Golden Grapes)구성원들이 좋아하는 곡이었고, 주신 분의 성의가 있으니까 마지막 곡으로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담은 거예요. 정말 그야말로 대충대충 했습니다. 아이고... 그분 들으시면 화내실라... (웃음)
우리는 레코드 작업이 끝나면 어떤 곡을 타이틀곡으로 할 것인지 냉정히 분석을 합니다. 그 회의석상에서 갑론을박이 시작되는 겁니다. 기획사 측에서는 아무리 노래가 그래도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정감 있지 않느냐고 하고, 저를 비롯한 그룹친구들은 세련된 비틀즈의 음악으로 가자고 해서 팽팽하게 맞선 겁니다. 저는 노래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고생을 좀 했죠.
그렇게 결론을 못 내리고 3일을 집안에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듣고 또 듣는데 ''''이렇게도 사랑이 괴로운 줄 알았다면... 그 시절 그 추억이 또다시 온 다해도 사랑만은 않겠어요..'''' 이 대목에서 대중적인 뭔가를 느낀 겁니다. 제가 그때 21살이었는데 어차피 대중가수의 길을 걸어야하고 기획사에서 의도하는 바도 있고 해서 그쪽으로 귀결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을 설득했어요. 음악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이 노래가 제 모친의 노래잖습니까? 정말 제 어머니가 혈혈단신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미 공군 조종사와 사랑해서 낳지 말아야할 저를 낳고, 아버지는 나 몰라라 미국으로 가버리고... 그런 어머니의 러브스토리와 이 노래가 그야말로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득을 하니까 친구들도 다 따라왔죠. 그래서 그 노래로 방송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 그랬더니 그게 대 히트를 친 거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기획사에서 보는 것은 비즈니스 면을 본 것이고, 그룹사운드 쪽에서는 예술 쪽을 본 것 같아요. 늘 그것 때문에 부딪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대박''''이 난 거죠. 그 당시 난리가 낳잖아요.
그 노래가 그 당시에는 심금을 울리는 노래였죠.
▶ 그 노래는 지금도 좋아요. 노래를 듣고 어머님의 반응은 어떠셨어요?
적적하실 때마다 저 몰래 눈물을 글썽이며 읊조리곤 하셨죠.
▶ 어머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하네요.
보통 이북 분들이 피난 내려와서 살다보면 강해지잖아요. 그분들처럼 어머니도 강력한 정신력을 가지셨고 또,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저를 키우셨어요. 그 당시 미군들이 많은 혼혈아를 만들었는데 그 수습을 미국정부에서 해야 했기 때문에 본국으로 강제 입양을 시켰어요. 쉽게 말해서 다 거두어들이겠다는 건데 장교들이 가가호호 찾아다니면서 거의 부모와 실랑이를 해서 반강제적으로 미국으로 보냈죠. 저희 어머님도 수차례에 걸친 미군의 설득과 강요가 있었지만 다 물리치셨어요. 저에 대한 애정이 강하셨고 호적에 올리고 공부도 시켜야했기 때문에 양부를 만나서 저를 하나의 대한민국국민으로 만들어 주셨죠.
◇ 강인한 어머니의 이북식 세상살이와 자식사랑▶ 그 뒤로 동생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저 혼잡니다.
▶ 정말 대단하시다.... 윤수일 씨는 어떤 아들이었어요?
그렇게 고분고분하지는 않았어요. 제 자신에 대한 상황을 5, 6살 되니까 알겠더라고요. 주변으로부터 받는 시선을 통해 평범한 삶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밖에만 나가면 사람들의 관심거리와 구경거리가 되고, 그러다 보니 점점 폐쇄적인 아이로 변해 가는데 어머니가 설득을 하시면서 강하게 타이르셨어요. 미국으로 저를 버리고 간 아버지에 대해서 서로 함구하자고 하셨고 중요한 것은 현재이니 과거는 다 잊고 용서하자고 하셔서 그 후로는 어머니의 아픈 부분을 묻고 싶지 않아서 아버지 이야기는 묻지도 않고 하지도 않았죠. 그리고 나은 정보다는 기른 정이라고 양부를 친아버지 이상으로 모셨고 양부도 저를 친아들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기타를 치고 음악 좋아하는 것은 싫어하셨어요.
▶ 딴따라 될까봐... (웃음) 그 시절에는 그랬어요. 양부는 윤수일 씨가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셨어요?
그 당시는 공무원도 될 수 없었고 군대도 갈 수 없었어요. 요즘이야 다문화가 인기지만 그때는 조직에 들어가서도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죠. 설사 제가 공부를 잘해서 뭐가 된다고 해도 결격사유가 많다는 것을 어렸지만 직감적으로 알았어요. 그래서 그런 것을 탈피하면서 뛰어넘는 방법이 무엇일까 사춘기와 성장기 때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 스포츠나 예술하고는 제가 잘 맞더라고요. 음악선생님께 상의도 드리고 지금도 연락을 드리는데 제가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노래 부르는 것을 보시더니 가수의 길을 조언해 주셨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을 걷기로 다짐했죠. 양부는 반대하셨는데 심사숙고 끝에 내린 제가 내린 결론이라서 반대하신다고 못 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관망하셨어요. 제가 노래 부르고 음악 좋아하는 모습을 보시고 조금의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관망하시더라고요. 열심히 하라는 말씀은 하셨어요.
▶ 운동도 하셨어요?
마침 학성고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어서 잠깐 했는데 1년 만에 해체돼서 하고 싶어도 접어야했죠. (웃음)
◇ 6개월 시한부에서 천명을 다한 어머님의 순애보▶ 노래 잘하고 인물도 좋아서 학교 다닐 때 인기가 많았을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가 되면서 코가 좀 커지기 시작했어요. (웃음) 사람도 때가 있듯이 고등학교 때가 피부도 제일 좋고 한참 필 때잖아요. 잘생겼다기보다는 개성이 있었어요. 70년대 초반이라 개성 있는 사람이 관심을 끌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고 그러면서 관심을 좀 더 받았죠. 그리고 교내에 ''''엔젤스''''라는 그룹을 만들어서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주변에 여고가 많아서 축제 때마다 특별출연 제의가 들어왔어요. 그때도 개런티를 받았던 것 같아요. (웃음)
▶ 그러다가 서울에 올라와서 가수가 되셨는데 어머니가 맘고생 말고도 경제적으로도 고생을 하셨나요?
많이 하셨죠. 양부도 일본 북해도 탄광에 끌려가셨다가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한 분이셨어요. 혈혈단신인데 한국에 재산이 있겠습니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저를 키우실 때도 굉장히 빡빡한 생활을 하셨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정말 운 좋게 가수에 입문을 하니까 어머님이 굉장히 기뻐 하셨어요.
▶ 효도 좀 하셨어요?
그게... 호강을 좀 해드릴 만하니까 데뷔와 함께 암 선고를 받으시더라고요.''''사랑만은 않겠어요.''''로 전국이 난리가 났는데 저는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죠. 어머니께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는데 추운 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분이라 그런지 체력이 암을 이겨내실 정도셨어요. 방사선 치료니 뭐니 얼마나 힘든지 다 아시잖아요. 머리도 다 빠지고 빼짝 마르고.. 그런데도 6년을 거뜬하게 사시고 86년에 암이 아니라 노환으로 돌아가셨어요.
▶ 그래도 아드님 스타가 되는 것도 보시고 여한은 없으시겠어요. 아버님은 언제 돌아가셨나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의 러브스토리가 정말 눈물 나는 이야기인데 어머님이 6년을 버티시는 마음의 일부분 속에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양부는 팔순이 넘었고 어머님은 칠순 중반이셨는데 아버님 돌아가시고 바로 식음을 전폐하시더니 일주일 동안 물 한 모금을 못 드시더라고요. 그렇게 일주일 만에 돌아가셔서 시쳇말로 줄초상을 치른 겁니다.
◇ 아들과 함께 걷는 새로운 음악인생▶ 하인즈 워드 덕분에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보기엔 과도기 같은데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월남에 가서 미군처럼 똑같이 그랬지만 우리는 거두지 못 했잖아요. 윤수일 씨는 혼혈 1세대여서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이제는 정말 그런 편견과 폐쇄적인 생각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시대는 변했고 또, 변해야하지요. 저는 데뷔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불만 같은 것들이 그때까지가 끝이라고 생각하고 노래라는 것으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과분하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고 저와 같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친구들이 받는 고생도 점차적으로 개선되어 가리라고 봅니다. 한 때는 그런 모임에 회장직도 자처해서 3년을 하면서 이 땅의 현실에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필요한 사람이 되면 더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하인즈 워드처럼 미국이라는 큰 전쟁터에서 한 분야에 일등을 해서 온 국민이 박수 쳐주고 그랬던 것처럼 필요한 사람이 되자고 열변을 토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아드님도 음악을 하시나요?
음악공부를 하고 있는데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적 감각이 있어요. 곧 새로운 음반이 나올 텐데 좀 더 대중적이면서 음악적인 부분을 살려서 만들어 보려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리고 있어요.
▶ 곧 새로운 가수가 탄생될 텐데 윤수일 씨가 보시기에는 어떠세요? 큰 그릇이 될 것 같나요?
요즘은 노래만 잘 한다고 되는 시대는 아닌 것 같아요. 작곡, 작사, 음반을 만드는 프로듀싱...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해야 하니까 스튜디오를 만들어서 현재 칩거를 하고 있는데 뚜껑은 열어봐야 아니까 제가 뭐라고 말은 못하겠네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