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중
27년 전 오늘, 1980년 5월 17일… 정부는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고 민주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전남대 학생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였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당시 전남대학교 2학년이었던 김원중 씨, 사실 그는 그다지 전투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1980년의 광주는,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위에 참여했고 불의에 항의했지만, 결국 삶이 더 귀했기에 외가로 도망을 쳐야 했다.
그 후, 김원중 씨는 살아남은 자가 갖는 ''''빚진 마음'''', 죽음의 현장에 있던 자의 ''''증언의 마음'''', 노래로 세상을 변화시켜 보고자 하는 ''''예술가의 열정''''으로 바위섬을 불렀고 민중가요를 불렀다.
이제는 시를 쓰는 마음으로 평화를 노래하고 싶다는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 씨를 17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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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 자라듯 솟아나는 자유와 열정▶ 김원중 씨의 노래는 많이 아시지만 방송활동을 잘 안 하시기 때문에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요. 머리를 기르셨네요. 늘 그렇게 기르고 다니시나요?
90년대 후반부터 머리를 기르고 다녔어요. 처음에는 멋있어 보여서 길러봤는데 생각이 자유로워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전에는 절제되어있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기가 쉽지가 않았는데 머리를 기르고 나니까 행동도 자유로워지는 부분들이 있고 방종과는 다른 의미에서 마음이 열리는 여유와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BestNocut_R]
▶ 저는 반대로 머리를 빡빡 깎아볼까 하는 마음이 있어요. 임수경 씨가 언제 한번 머리를 빡빡 깎고 왔는데 굉장히 신선해 보이더라고요. (웃음)
더워서 묶었는데 머리가 목을 덮으면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것 같아요. (웃음)
▶ 그동안 공연은 꾸준히 하셨지요?
공연도 하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거의 쉬지 않고 노래를 해왔는데 방송과의 접촉이 없으니까 일반 사람들이 요즘 뭐하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 방송을 일부러 피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인연이 안 닿으신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요, 제 노래가 어울리는 자리에 서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렇게 고르다 보니까 제 생각과 맞지 않는 프로그램에 가 있으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되고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피하다 보면 제 생각과 맞는 프로그램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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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래가 어울리는 자리에 서고 싶은 버릴 수 없는 욕심▶ 5.18 기념 공연을 하시고 계신가요?
그것은 매년 해왔고 저의 이름을 걸고 있는 공연은 에너지가 모아지면 몇 년 단위로 한 번씩 돌아가면서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음반작업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중이고 10여 년 전부터 일본과 교류를 하면서 공연을 하고 있는데 연말에 공연계획이 있습니다.
▶ 1980년에 전남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셨죠?
수업도 잘 빠지고 공부도 잘 안하고 노래만 좋아했던 대학생이었죠. 기타치고 노래하고 인기도 좋아서 공부는 뒷전이었죠.
▶ 5.18과 전남대는 뗄 수 없는 관계인데 2학년이었으면 현장에 있었겠네요? 17일, 18일의 모습을 듣고 싶습니다.
군인들이 정치를 하러 나온다는 불안감이 전국적으로 돌고 있어서 학생들의 반대시위가 심했었고 그 선봉에 대학생이 있었죠. 광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학생들이 연일 도청 앞에 모여서 시민들과 함께 시국토론회 형식으로 현 상황에 대해 자각을 시켜주는 시국강연회 형식의 집회들을 하고 있었어요.
▶ 과격한 집회는 아니었군요?
그렇게 평화적인 시위는 없었다고 보여 집니다. 경찰들도 막고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16일에 횃불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시위를 주도했던 지도부 측에서 곧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만약 다음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거나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도청 앞으로 모이자고 약속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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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으로는 할 수도, 볼 수도 없는 5월의 참상▶ 직접 참여를 하셨어요?
그때는 광주시의 학생들이나 시민들이 거의 다 참여를 했습니다. 특별하게 사회의식이 있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운동권이든 아니든 오랜 군사독재시절을 마감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공통된 의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특별하게 의식이 있었던 학생이 아니었거든요. 그 다음 날인 17일에 학교를 갔더니 착검을 한 군인들이 정문에서 학교를 못 들어가게 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때서부터 소위 피를 보게 되는 투석전이 시작됐고 굉장히 겁이 나고 무서웠죠.
▶ 그때는 군인들이 발포를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나요?
학생들은 학교에 들어가려 하고 군인들은 막으면서 투석전이 벌어졌는데 그때는 발포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미 밖에서는 다른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흉흉한 얘기들이 돌고 있었죠.18일에 본격적으로 친구들과 만나서 시내에 나갔더니 그날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어요.
▶ 그 광장이 금남로 인가요?
도청 앞에 분수대가 있고 광장이 있는데 원래는 차도인데 차가 안 다니면 광장이 되었던 거죠. 실제로 광주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한 블록 옆의 충장로라는 거리입니다. 그 거리로 나가봤더니 계엄군들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두들겨 팼어요.무자비하고 몽둥이 자체도 컸어요. 굉장히 타격의 힘이 강해서 때리면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서 피를 쏟지요.
▶ 다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사람들이 병원으로 끌고 갔는데 의사인 선배들 얘기가 환자가 너무 많아 이름을 확인할 수가 없어서 매직으로 얼굴에 번호를 썼다고 하더라고요.
▶ 김원중 씨는 어떠셨어요?
겁이 났습니다. 럭비선수들처럼 얼굴에 망을 썼는데 착검을 한 총 자체의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몽둥이 길이가 길고 제가 확인할 걸로는 얼굴들이 붉었어요.
▶ 술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가까이 가서 확인은 못 했지만 흥분해서 그런지 제정신으로 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저희 집은 광주 서구였는데 제가 그 당시 서 있던 위치가 동구였는데 도저히 겁이 나서 서구로 넘어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동구에 있는 외가로 가서 외할머니의 보호 아래 부끄럽게도 집 밖을 나갈 수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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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 몽둥이, 총소리... 그리고 붉은 죄책감▶ 외가에 계시면서 상황에 대한 소식은 들으셨나요?
대충 들려오는 소리가 있죠. 물론 시민군들이 무기를 탈취해서 하늘에 쏘는 총소리도 있었을 것이고 계엄군의 총소리도 있었을 것인데 여하튼 총소리가 끝나지 않고 들렸어요. 연달아나가는 총소리는 계엄군들의 총소리였는데 화력이 워낙 셌죠.
▶ 친구들과는 연락이 안 되셨어요?
전혀 안 되었죠. 친구들도 부모님 보호 아래 못 나오는 경우가 많았고 겁이 나서...이게 도대체 뭔가, 이럴 수가 있는가... 그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 그 순간은 겁만 나지 어떤 것도 생각할 여력이 없었을 것 같아요. 저는 그때 영국의 런던에 있었는데 뉴스로 다 봤어요. 트럭에서 뛰어내려 사람들을 패고, 사람들을 발가벗겨서 뒷짐 지게 하고 개 끌듯이 끌고 가는 것을 다 봤거든요. 전쟁이 났나 해서 서울에 전화를 했는데 아이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거예요. 그 당시 광주는 정말 섬처럼 고립되어있지 않았나 싶어요.
전혀 외부와 연락이 안 되고 차도 끊기고 저희 외할머님 이야기가 과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하셨어요. 시 외곽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니까요.
▶ 얼마 만에 나오셨어요?
끝날 때까지 집에 가지 못하고 5월 27일 이후에야 움직일 수 있었는데 아버님이 저를 데리러 오셔서 아버지와 같이 꽤 긴 거리를 걸어서 갔어요. 광주 방림동에서 화정동까지 차로 20,30여 분 되는 거리를 걸어갔거든요.기억에 남는 것이 실종된 아들 사진을 가지고 우는 어르신이 계셨는데 제복 입은 것을 봐서는 무슨 해양대인가 그런 것 같았는데 아주 잘 생겼더라구요. 저희를 붙잡고 울면서 찾을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모습이에요.
▶ 거리풍경이 어땠어요?
제가 지나가는 길은 그렇게 난장판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실은 마지막 날의 경우는 도청을 중심으로 상황이 집중적으로 벌어졌기 때문에 화정동 외곽지역에 바리케이드를 쳤던 것이 그대로 있었고 타이어 같은 것들이 타는 잔해들을 보면서 지나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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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살아남은 자의 하루하루▶ 도청까지 가보셨어요?
나중에 가봤는데 지금도 가기가 싫어요. 정확하게 보는 것이 아직도 힘들고 겁이나요.
▶ 나중에 친구들 소식을 들어보면 다치거나 죽은 친구들도 있었겠어요.
많았죠. 연락이 끊긴 친구들도 있고 수배로 피신 중인 경우도 많았어요. 사실 5월의 이야기를 하면 현장에서 피를 쏟고 돌아가신 분들도 마음이 아프지만 그 이후에 정신적 후유증으로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삶을 사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분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조명이 좀 덜 되는 것 같은데 지금 현재도 계속되어지고 있는 부분들이거든요. 정신착란과 고문 등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거의 없을 겁니다.
이후로도 많이 끌려갔고 한동안 사람들이 못 돌아왔어요. 고등학교 때 예뻤던 여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무서운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남아서 대자보를 만들고 그러셨어요. 제게는 정말 여신처럼 아름답게 보았던 선생님인데 수배로 피해 다니시다가 결국 정신착란으로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노숙자처럼 지내신다고 들었는데 자신이 없고 겁이 나서 차마 찾아뵙지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분을 위한 공연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품고 있습니다.
김원중
▶ 27년이면 강산이 3번째 바뀔 시기인데 아직도 무서워하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그때의 상황이 기가 막혔을까 생각이 들어요. 사실 겪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르잖아요. 제 가슴이 너무나 아픈데 그 이후의 김원중 씨의 삶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제가 특별하게 사회과학적인 인식이 있던 학생이 아니었거든요. 누가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상황들이 노래 속에 그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것들을 심게 하는 것 같아요. 그 이후로 노래가 가지고 있는 힘이 상황의 진실들을 얘기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는 공연장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내가 어느 곳에 사회적 시선이 닿았을 때 노래를 불러야 할 상황이 온다면 피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죠. 저는 한 번도 제 입으로 민중가수라고 이야기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때그때 갈등이 있고 힘들어하는 곳에 힘을 줄 수 있는 노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했던 것인데 그런 것들을 다른 가수들의 활동과 구별해서 좋게 이야기해주시는 것 같아요.
▶ 제가 정리를 좀 하자면 가수 김원중 씨는 특별히 민주화 운동을 하고 그래서 민중가수로서의 부르짖는 가수가 아니라 그때 그 상황에 있었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인데 지금도 그때 현장에 있었던 분들이 모이면 그 이야기 하는 것을 어려워하세요?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아요. 무서워한다기보다는 학술포럼이나 자기의견 발표하는 자리가 아닌 이상은 특별히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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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극복기장''''속에 묻힌 부끄러운 자화상▶ 바위섬이 광주를 형상화한 노래라고 알려졌는데 어떻게 만드셨죠?
저는 80년 5월 이후로 다음해에 군대에 가서 고초를 좀 당했어요. 군사기밀일 텐데..(웃음) 그 당시의 광주 시민들은 빨갱이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선임병들은 비상령이 내려졌을 것이고 고생을 많이 했을 텐데 그 당시 제대하는 모든 병사들은 국난극복기장이라는 훈장을 하나씩 다 받고 나갔어요.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 그때 군대 분위기는 어땠어요?
우리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시선이 곱지는 않았죠. 연일 계속되는 비상근무를 해야 했으니 실제로도 그랬을 거예요. 진실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특히, 전남대 학생은 더 했지요. (웃음) 그분들이 사회에 나가서 다른 상황들을 접하면서 알았을 수는 있지만 군 제대 전까지는 철썩 같이 그렇게 믿고 있었을 겁니다.
▶ 그게 더 심각하네요.
현역마치고 제대해서 5월은 제게 잊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고시공부를 했는데 일주일의 6일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주말은 기타치고 노래하면서 놀았어요. 어떤 가게에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노래를 부르다가 광주의 색깔이 담겨있는 음반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애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타이틀로 옴니버스앨범을 하나 만들었죠. 그 안에 광주를 형상화했던 외로운 섬 같았던 ''''바위섬''''이라는 곡을 제가 불렀었지요. 그 음반을 만들어서 발표할 때만 해도 가수의 길을 가려고 발표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84년 1월 7일에 방송이 되더니 갑자기 많이 알려지면서 인생이 바뀌게 되었죠.
▶ 내용을 알면서 방송을 했었던 건가요?
전혀 몰랐죠. 저도 의도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어요. 사석이나 공연장에서는 했었지만 나중에는 노래를 노래로 듣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어서 얘기를 안 했는데 오히려 듣는 분들이 해석을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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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보다 날카로운 노래의 진정성▶ 노래가 사회를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렸을 때부터 가수의 꿈을 가지고 그 꿈을 키워왔던 사람이 아니라서 ''''바위섬''''을 발표하고 ''''직녀에게''''라는 노래를 발표한 이후에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가수가 먼저 되어버리고 가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때부터 고민을 하게 된 것이죠.이전까지는 노래를 유희의 대상 이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 인생을 던져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어요. 가수는 노래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다른 것을 하면 더 잘할 것 같고 그랬어요. 그런 생각들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음반을 만들지 못하고 그랬죠.
▶ 나는 가수라는 자각은 좀 나중에 하시게 되었군요. 고시공부는 왜 접으셨어요?
3년간 방송을 하면서 소위 방방 뜨는 가수가 되었잖아요. (웃음) 사람들도 많이 알아봐 주시고 그런 것은 재미있더라고요. 인생이 달라지는 느낌도 들고 그런 단맛들에 정신없이 바빠서 스케줄 소화하기에 급급했죠. 그 이후에 고민을 하게 된 거예요.
5월이 되면 광주에는 오동나무 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화염병들이 날아다닙니다. 5월의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자각들이 생기는 것이죠. 시민들의 옹호 아래 그런 시위들이 계속 일어나면서 전투경찰들이던 백골단과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 격한 대립이 일어납니다. 참 비극적 상황이에요. 어제까지 대학에서 친구로 지내다가 군대에서 백골단으로 척출되어 친구들과 적이 되는 상황이 되니까요.
부지기수로 죽고 다치고 분신도 하고 그랬죠. 사람들은 왜 죽느냐고 이야기하지만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그분의 절박함도 있었을 거예요. 연일 최루탄 날리고 피 흘리고 일방적으로 학생들이 무자비하게 다치는 것을 보면서 잊고 싶었던 80년 상황이 생각나고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미안했어요.
그래서 80년 말에 기타 하나 들고 거리에 나가서 노래를 시작했어요. 노래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였기도 했고요. 살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했는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노래를 듣고 가슴속의 응어리들을 같이 노래했어요.
그것을 십수 년 동안 매년 5월이면 해왔어요. 처음에는 거리공연이라고 해서 혼자 시작했다가 노래하는 선배들과 같이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전국적으로 광주를 위로하고 광주의 정신을 이야기하려는 노래하는 친구들과 함께하게 됐어요. 더 나아가 세계화도 되어서 필리핀에서 저항적인 노래를 하는 분들을 모셔다가 같이하고 있죠.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면서 노래가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내가 노래 속에 진실, 진정성만 담을 수 있다면 노래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것이 모아지면 사회도 바꿀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그 이야기는 바꿔 말하면 노래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겁니다. 그만큼 힘이 있는 것이죠.
전에 노래에 인생을 던질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한 번에 해결이 됐어요. 던질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우스워졌죠. 다 던져도 부족하다는 그런 순간이 와서 노래를 더 무게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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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잎 꽃잎처럼 흩어지는 5월의 애닮은 함성▶ 수많은 거리공연으로 응어리를 덜어내면서 사연도 많았을 텐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을 것 같아요.
주변에서 저에게 무모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49일 동안 밤에 망월동 묘지에 가서 나름대로 혼자 진혼제를 드렸습니다. 묘역이 막 조성됐을 때 진혼의 노래를 49일 동안 불렀는데 그 소식을 듣고 매일 저녁 100여 명이 오는 거예요. 민중가요도 했지만 망자들이 살아있을 때 많이 불렀을 법한 노래들을 했는데 사람들이 지독하다고 했었어요. 그것을 하려면 다른 곳에 갈 수도 없고 다른 공연도 할 수가 없으니까요. 사실 힘들어서 비라도 오면 안 하려고 했는데 비가 한 번도 안 오더라고요. (웃음)
▶ 응어리가 좀 풀리셨어요?
그것이 응어리가 풀리고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사회적인 동의의 개념에서 선진국과 선진국이 아닌 것으로 비교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제가 부르는 노래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이 귀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나눌 수 있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 금강산에서도 공연을 하셨어요?
2001년 금강산 대토론회를 통해 공연을 했고 그 이후로 간혹 북쪽에 가서 노래를 했습니다.
▶ 북쪽에서도 ''''바위섬''''노래를 알고 있어요?
신기했는데 어떤 시사주간지에서 김일성 대학의 학생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남쪽 노래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묻자 당연히 ''''바위섬''''이라고 했더라고요. (웃음) 한번은 평양에 있는 호텔에 가서 종업원에게 혹시나 해서 ''''바위섬'''' 노래를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안다면서 앞 소절을 따라 불러서 깜짝 놀랐는데 남과 북이 이념적인 것을 떠나서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많아지면 통일도 빨라지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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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에 통일의 염원을 담아▶ 혹시, 독신주의자세요?
아닙니다. (웃음) 4년 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많이 서운해 하셨어요. 나중에 화해를 했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하기 싫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일부러 결혼을 위한 결혼은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독신주의는 아닌데 결혼을 생각할 시기에 아빠가 되고 남편이 되는 것이 겁이 나더라고요. 안 한다고 한 번도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웃음) 어느 순간 겁이 없어지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데 결혼이 목적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 새 음반도 나올 예정이죠?
그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도 생기고 해서 준비 중입니다.
▶ 그 이야기도 5월과 관련이 있나요?
별개로 생각합니다. 5월과 관련된 음반은 제 정규앨범과는 다릅니다.
▶ 시인들과 굉장히 친하다고 들었어요?
99년에 3번째 앨범을 만들면서 시인들과 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때 작업했던 시인들과 ''''나팔꽃'''' 이라고 하는 ''''시를 노래로 만드는 동인활동''''을 만들어서 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정기적인 공연들을 병행하면서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