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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 없는 것은 국민의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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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섭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 없는 것은 국민의 불행"

    • 2007-04-1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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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만섭 前 국회의장

    이만섭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지금으로부터 47년 전, 그러니까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마산 김주열 열사 변사사건의 특종의 주인공이다.

    워낙 바른 말 잘하는 스타일이라서 5.16 군사쿠데타 와중에 육군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리고 나이 32살 때, 박정희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6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지금까지 국회의원 8선을 한 원로 정치인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가지고 있던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해임을 요구하면서 3선 개헌에 반대했던 대쪽같은 성격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국회의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정치의 산 역사이며 증인이기도 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4.19 혁명 47주년에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만나 보았다.

    ◇ 방송의 공정성 항상 눈 여겨 봐

    ▶ 늘 한결 같으신데, 건강관리를 잘 하시는 것 같아요.

    나이가 드니까 여기저기 아픈 데가 생기는 것 같아요. 항상 만보기를 차고 있는데 4천보~5천보는 걷고 있어요. 지금 동부 이천동에 살고 있어서 한강 고수부지까지 아침에는 게을러서 못하고 점심에 주로 걸어요.

    ▶ 몇 시에 일어나세요?

    아침 6시에 KBS를 틀고 7시에는 MBC로 돌리면서 양쪽 뉴스를 비교해 봅니다. 그리고 저녁 8시에는 SBS뉴스 틀고 어느 방송이 공정한가 보고 있어요.

    ▶ 술, 담배는 안 하시나요?

    담배는 20년 전에 완전히 끊었고 술은 지금도 와인을 마시고 있어요.

    ▶ 친구 분들은 자주 만나시나요?

    친구보다도 뭔가 자꾸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생겨요. 예를 들면 오늘처럼 CBS에 온다든지 대학의 특강에 간다든지 그런 일들이 생기죠.

    ◇ 4.19 망각은 기성세대의 책임

    ▶ 오늘이 4.19기념, 47주년인데요. 지난해 원광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4명 중에 1명꼴로 4.19 혁명을 잘 모른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이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이 4.19에 대해서 설명을 자꾸 해줘야 해요. 더욱이 오늘이 4.19니까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아는 대로 설명을 해 주고, 불의에 항거하던 학생들의 올바른 정신을 이야기해 줘야 해요. 그런데 기성세대들이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전수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 그래요.

    ▶ 그 당시 이만섭 전 국회의장께서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하셨는데 몇 년도에 입사하셨어요?

    언론계는 56년 9월에 동화통신이 처음 창간되었을 때 그곳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고, 2년 후에 동아일보에 스카우트가 돼서 58년부터 63년까지 있었어요.

    ▶ 정치부를 담당하셨으니까 주로 국회에 출입하셨겠네요.

    당시에는 정치부가 국회나 정당을 다 커버했어요. 더욱이 정치부 기자생활을 할 때 4.19나 5.16 같은 격동기를 겪었기 때문에 내용을 잘 알고 있죠.

    ◇ 날치기 개헌 아래 짓밟힌 정의에 울분 토해

    ▶ 그때가 자유당 말기인데 당시의 사회상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간단히 요약하자면 생활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국민소득 100불도 안되었을 때니까요. 아니, 국민소득 100불은커녕 국민소득이라는 말 자체도 없었을 때니까요. 그런데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48년도에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헌법을 두 번이나 고쳐가면서 장기집권을 했어요. 그러니 자연히 무리가 가면서 독재를 하게 되고 생활은 어렵고 국민들은 희망이 없었어요. 54년 3대 국회에서는 이른바 유명한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 즉 초대 대통령은 종신으로 할 수 있는 길을 열었어요. 헌법도 국회에서 이미 부결된 것을 다음 날 통과되었다고 망치를 쳤다고요.

    ▶ 사사오입개헌에 대해 잠시 설명해주시겠어요?

    헌법개정안이 국회에 통과되려면 국회의원의 3분의 2가 동의해야 해요. 예를 들어 136명이 있어야 3분의 2인데 135.67 이렇게 소수가 나왔다고 치면 이건 당연히 부결이에요. 사람은 몸을 나눌 수 없으니까 소수가 될 수 없는데도 사사오입해서 136명으로 다음 날 통과를 시켰다는 거죠.

    이것도 처음에 자유당 출신 최순주 국회부의장님이 부결되었다고 망치를 쳤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사사오입하면 통과되는 거 아니냐고 해서 다음 날 개헌을 통과시켰어요. 그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사람이 당시 서울대 수학교수 최 모라는 얘기도 있고 내무부 장관이 청와대 들어가서 제시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어쨌든 국회가 발칵 뒤집혔죠.

    자유당이 이럴 수가 있냐고 자유당을 탈당한 사람이 수십 명이 돼요. 예를 들면 김영삼 의원 등, 이런 분들이 그만두게 됐어요. 이때가 54년도니까 내가 당시에 대학생이었어요. 그리고 58년도 4대 국회에서는 2.4 보안법파동(야당과 언론탄압을 위한 수단으로 신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도모하려던 정치적 사건), 이 보안법을 자유당에서 통과시켰는데 야당이 국회에서 농성을 했어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있었는데 무술 하는 경찰전문학교 경찰들 300명을 모아놓고 하루아침에 국회 경위 옷을 입혀서는 12월 24일 포위해서 들어와서 본 회의장에 농성하고 있는 야당 의원들을 전부 끌어냈어요. 시멘트 바닥에 짐짝 나르듯이 질질 끌어다가 문 밖에다 던지고 그랬어요

    그때는 정치부 기자였으니까 현장에 있었는데 눈물이 나서 볼 수가 없었어요. 자유당이 완전히 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때는 광화문 국회인데 국회 현관과 양식당으로 통하는 복도에 전부 감금을 시키고 자유당끼리 앉아서 통과를 시켰어요.

    ▶ 언론의 자유가 보장이 되지 않았을 텐데, 기사로 쓰실 수 있었나요?

    물론 기사로 썼지요. 당시 언론의 자유도 없었죠. 걸핏하면 체포하고 구속하고 했으니까요. 밤낮 형사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협박했지만 용감했어요. 그래서 신문기자 생활할 때 독립투사 같은 기분으로 기자생활을 했어요. 데스크에서도 압력이 들어와도 삭제하지 않았어요. 그 후에 언론이 약해져서 강한 정부에게는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약한 정부에게는 쓰게 됐는데 우리는 강한 정부일수록 강하게 맞섰다고요.

    ▶ 무술 경관들은 정말 경찰인가요, 아니면 깡패들을 데려온 건가요?

    2.4 보안법 파동 때는 전국의 무술 하는 경찰들을 부천에 집합시키고 국회 직원인 것처럼 발령을 다 내서 덕수궁에 집합시켰다가 새벽에 국회의사당에 들어가서 야당을 끌어냈던 거죠.내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민주당이 국회 휴게실 2층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을 찾아갔어요.

    조병옥 박사, 박순천 여사 이런 분들이 죽 계셨는데 내가 그랬어요. ''''이제 무술 경찰들이 와서 국회의원들을 모두 끌어낼 테니까 지금부터 책상정리를 하고 농성을 풀어서 의사진행발언을 얻어가지고 시간을 끌어주세요. 그러면 우리 언론이 크게 보도해서 막아보겠습니다.'''' 그분들이 듣더니 일리가 있다고 농성을 풀고 앉아있는데 무조건 들어와서 끌어냈어요.

    ◇ 부정투표, 뒤바뀐 투표함 "야! 이 표 도둑놈들아!"

    ▶ 나중에는 부정투표도 하고 투표함도 바꿔치는 일도 있었죠.

    58년 5월 2일에 4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완전히 엉터리에요. 예를 들면 대리투표, 3인조, 5인조 투표, 야당 참관인 추출, 심지어는 투표함도 바꿔치기를 했죠. 군대에서는 2층에서 정보요원들이 보고 있어요. 완전히 원천적인 선거부정이었죠.

    선거가 끝난 그해 9월에는 하도 부정선거 때문에 여론이 시끄러우니까 경상북도 영일군에서는 재선거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도 갔더니 여관 옆방에 깡패들을 대기시켜 놓았더라고요.

    개표 도중에 민주당 표, 자유당 표를 구분해서 모아놨는데 전기 불을 정전시키더니 깡패들이 들어와서 민주당 표만 싹 가지고 가버리는 거예요. 민주당 대변인이 ''''표 도둑이야!!'''' 해서 나도 ''''이 표 도둑놈들아!!!'''' 하고 뛰어나갔어요.

    신문기자는 밖에서 취재만 하면 되지만 참을 수 없어서 표를 막다가 깡패들한테 많이 얻어맞았어요.몇 시간 후에 개표를 다시 했는데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밤에 사과를 돌리더라고요.

    그래서 나쁜 놈들이라고 사과를 던진 기억이 있는데, 서울에 올라왔더니 자유당에서 이만섭 기자를 선거개표를 방해했다 해서 선거법 위반혐의로 구속하라고 해서 열흘간 피해 다녔어요. 원천적인 부정선거다 보니까 그게 3.15로 이어진 거예요.

    ▶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공부하신 민주주의가 뭔지를 아시는 분이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부정선거를 할 수가 있었을까요?

    우리나라 속담에도 아는 사람이 더하다고 하잖아요. 나만이 대통령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 정부통령 선거가 3.15였죠. 3.15선거 때 본격적으로 부정투표를 시작한 거잖아요.

    1960년 3.15 부정선거였죠.

    ▶ 부정선거로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이 당선되었다고 선포가 났어요.

    1960년 정부통령 선거 때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선거 전인 2월 15일에 돌아가셨어요. 위궤양 때문에 미국에 치료하러 가신 건데 가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어요. 영어로 ''''Give me, fair chance." 공명정대하게 선거하자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갔지만, 수술결과는 괜찮았는데 뇌출혈인가로 바로 돌아가셨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대통령 공고 이후에는 후보를 바꿀 수가 없어요. 야당 대통령 후보가 죽었으니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이미 당선된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부통령은 야당은 장면씨이고 여당은 이기붕씨인데 그 전에도 장면 박사가 부통령을 했고 굳이 이기붕씨가 부통령이 될 필요는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든지 부통령에 당선시키려고 자유당에서 애를 썼어요. 나쁜 꾀를 내고 무리수를 두다가 사고가 난 거예요.

    ◇ 눈에 박힌 최루탄 … 채 피지도 못한 꽃

    ▶ 4.19혁명의 시초는 마산에서 시작된 건가요?

    마산의 3.15 부정선거 시위가 제일 먼저인데 그보다 앞선 2월 28일에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들고 있어났어요. 장면 부통령 후보를 비롯한 야당 유세가 일요일에 대구 수성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걸 못하게 하려고 일요일에 학생들을 등교시켰던 거죠. 그러니까 고등학생들이 모여서 ''''이럴 수가 있는가, 학생들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이렇게 시작된 시위가 그러면서 대구의 모든 고등학교의 시위로 번졌죠. 그게 2월 28일이에요.

    마침 내가 야당 유세를 취재한다고 대구에 내려가 있었는데 학생들의 시가행진을 경찰관들이 곤봉으로 막 때리는 거예요. 대구시청 뒤에 무도관이라고 있었는데 그 옆 골목에서 경찰관이 학생을 너무 때리니까 내가 멱살을 잡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밀고 당기면서 싸움을 한 기억이 나요. 그 날이 바로 대구학생 의거사건이에요. 그리고 나서 3.15 투표 때 마산에서 학생들이 일어나고 시민들이 일어난 거죠.

    ▶ 김주열 군의 시신은 언제 발견이 된 건가요?

    김주열 군의 시신은 4월 11일에 발견이 됐어요. 시신이 발견되기 전에 나는 마산에 미리 가 있었고요.부정투표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투표하러 갔는데 내 투표용지로 다른 사람이 이미 투표를 했어요. 사전 투표를 한 거죠. 그리고 투표하러 갈 때 3인조, 5인조씩 붙여서 서로 감시를 하는 거예요. 또한 야당을 찍을 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이미 투표해서 투표용지도 없어요. 야당 참관인은 내쫓고 이러니 이게 말이 되겠어요?

    그래서 결국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나고 시민들이 호응해서 3월 15일부터 계속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가행진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는 과정에서 경찰관들이 진압하기 위해 총을 쏘고 실탄을 쓴 거죠. 그러다가 4월 11일에 바다에서 시체가 하나 떠올랐는데 그게 김주열 군이었어요. 그런데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였어요. 그러니 시민들이 격분하지 않겠어요.

    경찰들이 시체를 마산 도립병원에 옮겨서 병원 앞에 삼엄한 경계를 폈어요. 내가 마산 도립병원 앞을 지키고 서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 삼엄한 속에서 김주열 군의 시체를 빼 돌릴 것이라는 예감도 있었지만 그런 얘기들이 빈번히 나돌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비는 부슬부슬 오고 어두워지니까 차에 싣고 남원으로 도망가는 거예요. 김주열 군의 고향이 전북 남원인데 마산에 올라와서 공부를 했거든요. 아마도 집에 갖다 주려고 한 거겠죠. 그래서 내가 동아일보 차를 타고 추격을 했어요.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경찰관들이 막더니 못 가게 하는 거예요. 옥신각신 하는 와중에 남원으로 빼 돌렸어요. 그 일을 기사로 섰죠.

    당시 매일 기사를 썼는데 동아일보 차를 타고 취재를 하러 왔다 갔다 하면 시민들이 박수치고 만세 부르고 했어요. 김주열 열사의 시체를 빼 돌렸다는 기사가 보도가 되고 그걸 본 전 국민들이 알게 되고 서울까지 확산이 되서 데모가 시작이 되고 4월 18일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가행진을 했죠.

    국회까지 행진을 하고 돌아가던 중에 반공청년단이 학생들을 습격했는데 이것이 제2의 도화선이 되서 4월 19일은 전 시민,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거예요.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원래는 이승만 박사 동상이었는데 그걸 학생들이 넘어뜨려서 새끼줄로 목을 매서 끌고 다녔어요. 자유당 물러가라고, 부정선거 그만두라는 시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경무대에서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했죠.

    총탄이 날아오는 현장을 동아일보가 광화문에 있으니까 취재하러 뛰어다녔어요. 바로 앞을 총알이 스쳐가기도 했어요.그게 4.19인데 학생들이 183명이 죽고 부상자가 6,300명이에요.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나왔지만 군인들도 학생들과 마음은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학생들이 탱크 위에 올라가서 만세를 부를 수 있었죠. 군인들은 발포를 안 했어요. 마지막 4월 25일은 대학교 교수들이 거리시위를 했는데 이게 마지막 시위였죠.

    다음 날인 26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각계, 각층 대표들과 이야기를 들어 보고 또 국민들이 하야를 원하니까 하야성명을 발표했던 거죠. 그러고 나서 외무부 장관으로서 허정씨가 행정과도수반이 되고 이승만 박사 내외분이 5월 29일에 하와이로 망명을 하셨어요.

    4월 26일에 이승만 박사가 하야하고 27일에 허정 과도내각이 서는데 28일에 이기붕씨 부인인 박마리아 여사,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이기도 한 큰 아들 이강석과 이강옥이 모두 자살을 했죠. 문제의 발단은 이기붕씨의 부통령 때문이었죠. 이기붕씨가 4.19가 나자 군부대 군단장실이나 사단장실에 피신할 만한 곳이 없나 하고 찾아갔는데 모두 냉대를 하니까 돌아와서 청와대 직원들 관사에 있다가 결국 4월 28일에 큰 아들 강석이가 부모와 동생을 총으로 쏘고 자신은 자살을 했어요.

    ▶ 그 당시 기자로서는 굉장히 기사거리가 많았을 거 같아요.

    그때는 조석간이었어요. 나이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고. 신문사도 몇 개 없었는데 자랑이 아니라 당시 동아일보는 아무리 압력이 와도 굴하지 않고 올바르게 썼어요. 국민들이 동아일보를 보고 희망을 갖는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 정치의 중심을 관통한 8선은 목숨 건 투쟁의 결과

    ▶ 결국 자유당이 물러가고 민주당이 들어오고 5.16혁명이 나는 와중에서 기자생활을 하셨는데 박정희 대통령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윤보선 대통령은 5.16혁명이 나자 올게 왔다고 했어요. 5.16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장군들이 윤보선 대통령에게 ''''우리들이 혁명을 하지만 각하는 우리가 모십니다. 이것은 인조반정입니다.''''라는 말을 했다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지나가는 말로 들었다지만 어쨌든 혁명은 났거든요.

    윤보선 대통령은 정권이 자기에게 올 줄 알았는데 올 것 같지도 않고 줄 것 같지도 않거든요. 그래서 청와대에서 6월 초에 기자회견을 했어요. ''''9월 UN 총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군사 정부는 민간인에게 조속히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내가 취재를 했는데 동아일보 1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가 됐어요. 다른 신문은 검열 때문에 감히 기사도 못 썼어요.

    그랬더니 5.16 군사정부에서는 윤보선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동아일보가 혁명정부와 국민을 이간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냈다고 해서 나를 잡아넣은 거예요. 그래서 포고령 위반으로 내가 들어가게 된 거죠. 그때 이진희 기자라고 나중에 문공부 장관한 사람인데 견습기자로 있을 당시 이 사람과 내가 육군형무소에 들어가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윤보선 대통령은 자기가 말한 내용을 신문기사로 냈는데 대통령을 구속시키지 못하니까 모든 책임을 기자에게 돌린 거예요. 고 조병옥 박사의 부인이신 노정란 여사가 윤보선 대통령에게 찾아가서 대통령이 말한 것을 쓴 기자가 구속이 됐는데 어떻게 청와대에 앉아계시냐고 두 번이나 항의를 하셨다고 해요.

    ▶ 자유당 시절부터 기자로, 정치인으로 완전히 정치의 중심에 서 계셨어요. 국회의원으로서는 8선을 하신 거죠. 국회의장은 두 번을 하셨고요.

    나보다 많이 한 사람이 3명 있어요. 9선을 한 사람이 있는데 김영삼, 김종필, 박준규씨고 8선은 나 혼자고 7선은 몇 사람 있어요.

    ▶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하고 역대 대통령을 다 만나보셨는데 짧게 평을 해 주신다면?

    대통령에 대한 평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다만 불쌍한 것은 이 나라 국민들이에요. 마음으로부터 존경할 만한 전직 대통령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박정희 대통령과는 3선 개헌 때부터는 안 만나셨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를 일으켰고 국제적인 지위를 높였고 많은 일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데 마지막 장기집권으로 인해서 민주주의에 역행한 것도 사실이죠.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3선 개헌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5.19 구국 혁명을 했으면 대통령이 만든 헌법을 본인인 지키셔야지 또 고쳐서 대통령이 된다면 그건 구국혁명이 아니라고 반대를 했는데 공화당에서 끝까지 반대를 한 사람은 정무영 선생과 나 둘뿐이었어요.

    정무영 선생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하루 동안 고생을 하시고 나서는 정계 은퇴를 해 버리셨고 나는 그때 나이가 30대였는데 정계 은퇴는 의미가 없어서 권력형 부정부패의 실세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비서실장을 해임시켜야 한다는 결의안을 내고 투쟁을 했는데 정말 목숨을 걸고 투쟁을 했어요. 3선 개헌 이후에 박 대통령에게 밉보여서 8년 동안 정치를 못 했어요. 외국에도 못 나가고. 그러다가 10대 때 국회에 복귀하자마자 10.26이 나서 돌아가셨어요.

    ▶ 김영삼 대통령과도 인연이 많으시죠?

    인연이 많아요. 내가 동아일보 기자였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사사오입 개헌 때 자유당을 탈당했고 4대 부산에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 때 떨어지고 나서 자주 어울렸어요.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했죠.

    ◇ 커피 한 잔의 인연, 정치도 사랑도 계산해서는 안 돼

    ▶ 역사를 돌아보시면 중요한 시기마다 늘 바른 말을 하셨는데, 이로 인해서 생명의 위협이나 혹은 가족의 반대는 없으셨어요?

    생명의 위협을 느낀 때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비서실장의 해임 결의안을 내고 정면으로 붙을 때는 집에 한 열흘 정도 못 들어가고 피해 다녔어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때는 무자비했어요. 그때 야당 당수인 김영삼씨 차를 타고 가는데 자동차에 초산을 뿌리고 하수인들을 전부 인천 바다에 집어넣고 그랬잖아요. 정말 목숨 걸고 했죠.

    그런데 요즘 정치인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바르게 말 하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할 때가 많아요. 내가 8선을 하고 국회의장을 두 번을 했지만 이렇게 하면 유리할 거다, 이렇게 하면 다음번에 당선될 것이라고 계산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정치와 사랑은 계산하면 안 된다는 것이 내 소신이고 지론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8선도 하고 국회의장도 하는 것이지, 계산을 하는 사람은 도중에 전부 실패를 해요.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저 여자랑 결혼해서 아파트도 얻고 차도 갖겠다고 하는 사람은 전부 이혼하고 파탄 나잖아요.

    ▶ 이만섭 의장께서는 전혀 계산 안하고 결혼하셨겠네요.(웃음)

    계산 전혀 안 했어요. 커피 한 잔 얻어먹고 결혼했다니까요. 내가 연세대학교 응원단장일 때 서울 시내의 대학교가 몇 개 안되니까 응원단장이라고 하면 꽤 알려졌었어요. 그래서 아내가 경향신문 조사부 기자였을 때 그런 사람이라면 한 번 만나보겠다고 해서 광화문에 있는 다방에서 만났어요.

    그런데 차 값이 없는 거예요. 내가 대학 다닐 때는 4년 동안 돈이 없어서 점심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버스는 상이군인은 아니었지만 제대증을 보이면 공짜로 타기도 했었어요. 어쨌든 버스는 내렸으니 만났는데 뭘 얘기했는지 하나도 기억은 안 나고 커피 값을 어떻게 하나 걱정만 했어요. 지금은 더치 페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뭘 해도 남자가 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나가는데 그 아가씨가 커피 값을 탁 내고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만 하면 됐다 해서 커피 한 잔에 결혼했는데 지금도 집 사람한테 커피 한 잔에 속았다고 그러면 집 사람은 커피 한 잔 사 주고 속았다고 그러면서 웃어요. 계산할 거 뭐 있어요, 다 똑같은데.

    ▶ 4.19 혁명이 오늘날 우리의 역사 속에 주는 교훈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우리나라 정치가 파란과 격동의 연속이었는데 그 과정 속에서 조금씩이나마 민주주의가 발전되어 왔어요. 그리고 4.19는 1인 독재, 장기집권, 부정선거에 항거해서 일어난 거죠. 민주주의에 큰 획을 그은 거예요. 지금도 다른 곳은 못 가도 4.19 묘지에는 꼭 가요. 183명의 학생의 희생이, 그 피가 헛되지 않고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국민의 힘, 학생의 힘이 크다는 것을 느끼죠. 그리고 앞으로 위정자들이 이것을 교훈 삼아서 민심을 천심으로 알고 나 혼자만이 옳다, 나 혼자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독선적인 생각을 버려야겠죠.

    ▶ 결국 4.19혁명이 민주주의의 씨를 뿌렸다는 말씀이시죠. 늘 건강하시고 나라가 잘 못 갈 때는 바른 말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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